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76
76. 다시 만난 소녀
펄럭─
눈앞에 나부끼는 거대한 플래카드.
아연은 핑크색 야구 모자를 벗고 기분 좋은 얼굴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 돈 냄새.’
저 멀리 사람들이 줄을 선 곳이 보였다. 얼핏 보면 ATM처럼 보이는 그것은 면허증 자동 인식기였다.
어찌나 북적북적한지 인증 배지(Badge)를 발급받기 위한 대기 열이 거의 옥션 회장 입구까지 다다라 있었다.
‘정직하게 순서를 기다리다간 날이 저물겠는걸.’
돈과 시간은 비례하는 법. 아연은 망설임 없이 대기 열 가장 앞쪽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오래 기다렸지? 쏘리쏘리.”
가장 앞줄, 순서를 기다리던 한 헌터에게 다가가 능청스레 툭, 어깨를 쳤다.
힐끔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에 돌연 의문이 깃든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해 오니 그럴 만도 했다.
“엥, 누구…….”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팠어. 우리 순서는 아직이야?”
“아니, 사람 잘못 보신 것─.”
헌터가 헙, 입을 닫았다.
자신의 주머니에 묵직한 무언가가 쑥 들어왔다. 5만 원권 지폐 뭉치. 헌터의 목젖이 꿀꺽, 상하로 크게 움직였다.
“어라, 벌써 우리 차례네? 가자, 친구.”
“어, 어어…….”
만만세, 21세기 자본주의 시대.
돈만 있다면야 5초 만에 절친 사이가 될 수 있는 세상이었다.
죄책감? 그런 것 따위 없었다. 어차피 ‘옥션 고인물’들에게 이러한 유료 새치기는 불문율이나 다름없었으니.
‘현명한 거지.’
꼭두새벽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배지 발급 순서만 주야장천 기다리는 녀석들이야말로 바보다.
삑. 헌터 면허증으로 인식기 위를 가볍게 터치하자,
「인식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인식이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내 음성과 함께 기계 아래로 데구루루 떨어지는 배지 하나. 알파벳 ‘H’와 ‘A’가 뒤얽힌 형태의 인증 배지였다.
참가비를 지불한 정식 헌터에게 등급에 따라 지급되는 물건이다. 소지하고만 있어도 지정 구역 한정 자동 통역 기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칩 환전도 했고, 그럼 다음은…….’
칩(Chip).
전 세계 헌터들에게 통용되는 시스템 화폐가 코인이라면 칩이란 옥션 개최 측에서 발급하는 헌터 옥션용 일회용 화폐를 말했다. 경매품을 선입찰할 시 필요한, 어쩌면 코인보다 더 중요한 화폐기도 했다.
‘첫째 둘째 날에 넉넉히 칩을 벌어 두지 않으면 셋째 날 경매 때 아무리 좋은 물건이 나오고 코인이 있어도 그림의 떡이란 말씀.’
어디 보자. 팡, 풍선껌을 터뜨린 아연이 허공에 손을 가져갔다.
[인벤토리를 불러옵니다.] [ – – – Loading – – – ]이윽고 시야 가득 떠오르는 인벤토리창. 반투명도를 40%로 지정한 뒤 ‘등급별 아이템 정렬’을 터치하면…….
촤라락─
발끝까지 내려오는 아이템 리스트. 아연이 지난 1년간 열심히 축적한 귀염둥이들이었다.
영웅급 아이템 112개, 희귀급 아이템 338개. 이 정도면 칩 1만 장 정도는 거뜬히 벌 수 있을 것.
아, 빨리 12일이 됐으면! 아연은 큰 기대를 품고 자신의 매대를 보기 좋게 정돈했다.
그러나.
“…….”
휘이이이잉.
한 시간 동안 매대를 방문한 손님은 총 3명. 판매 아이템 총 0개.
‘실화냐.’
주변을 둘러보면 분명 헌터 떼가 우글우글했다. 한눈에 보아도 작년보다 훨씬 엄청난 수의 인파. 그러나 저 많은 헌터들 중 아연의 고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연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잘못됐다.
가격이 너무 비싼가? 아니, 이 품질이면 응당 이 정도 값은 받아야지. 장소가 별로인가? 아닌데. 여기가 가장 명당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경쟁자가 있는 거야.’
그것도 가까운 곳에.
아연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는다. 그리고 머지않아 목표를 발견했다.
저런 구석진 자리에 매대를 깔고 있는 주제에 남의 손님까지 다 뺏어 가다니……! 판매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치밀하고 간악한 녀석임에 틀림없었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아야겠다. 판매를 일시 중지한 아연은 성큼성큼 걸어 경쟁자의 매대로 향했다. 그런데.
“엥.”
흑호의 가죽.
날카로운 송곳니.
단단한 짐승 뼈.
조촐한 매대 위에 진열된 아이템들은 생각보다 너무나 초라한 것들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물건을 팔고 있나 했더니.’
뭐야, 별거 없잖아. 이런 잡템들을 상대로 콧김을 내뿜은 게 민망할 지경이었다.
아연은 김이 샌 얼굴로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그대로 그곳을 벗어나려는데.
“미쳤다. ‘흑호의 가죽’ 15장에 칩 1장이라는데?”
“나 아까 저기서 ‘붉은 결정’ 하나에 칩 2장 주고 바꿔 먹었어.”
“어디어디?”
그뿐만 아니라, 듣자 하니 송곳니는 20개에 칩 1장. 심지어 뼈 25개에 칩 1장?! 이건 거의 ‘우리 사장님이 미쳤어요’ 수준.
‘말도 안 돼.’
게이트 공략권을 따내는 데 걸리는 노력과 시간, 그리고 게이트 입장 후 몬스터를 토벌하는 데에 소비하는 인력과 자원, 생명 수당 등을 따져 보면 아무리 잡템이라고 해도 가죽 15장에 칩 1장은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아이템 시세도 제대로 모르는 초보 헌터? 아니, 참가비만 300코인이 넘는 이 거대 옥션에 그런 초보 헌터는 참가조차 힘들 텐데. 초보한테 그만한 코인은 요원한 일이니.
그렇다면…… 금수저에 버금간다는 ‘계약수저’?
궁금증이 가득한 아연의 시선이 또르륵 굴렀다. 우글거리는 인파 너머 판매자의 얼굴을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찾는 아이템이라도?”
무심한 기색으로 힐끗, 이쪽을 향하는 검은 눈동자.
‘이 사람…….’
아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낯이 익었다. 흰 티에 청바지 차림. 특별할 것 없는 차림새지만…….
매대 앞을 기웃거리던 아연은 매대 구석에 놓인, 과한 장식의 검은 양산을 발견했다.
동시에 문득 뇌리를 스치는 기억.
‘엥. 자갈치시장? 언니 설마 언노운 게이트에 가려는 건 아니지?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데, 언니 랭크가 뭔데요?’
‘F급.’
맞아, 기억났다.
그날 KTX 옆자리에 앉았던 정신 나간…… 아니, 용감한 컨셉 헌터였다.
“대박! 언니, 나 기억 안 나요? 그때 KTX에서!”
“……?”
가느다랗게 변한 눈매에 문득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녀는 아연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헐, 실망쓰. 나 모르겠어요? 내가 사탕도 줬는데.”
도르륵 시선을 굴리던 은하가 한 박자 늦게 반응을 보였다.
“……아.”
이제야 기억이 난 듯했다. 뭐 어떤가. 아연은 반갑게 웃으며 자연스레 은하 곁에 섰다.
“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
“그때 결국 부산 갔나 보더라? 인터넷에서 봤어요. 제천대성이랑 맞짱 떴다는 거 진짜예요? 아니죠?”
“…….”
은하가 입을 다물었다.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연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모양. 주변을 지나치던 헌터들, 매대 근처에서 아이템을 구경하던 헌터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은하에게 쏠렸다.
“웁스.”
아연이 자신의 입을 살짝 틀어막았다.
* * *
현재 시각 오후 2시.
세종중앙공원에서 3일간 헌터 옥션이 열리는 탓에 인근 음식점은 어딜 가나 개미 떼 같은 헌터들로 북적북적했다.
아연은 장사를 망친 사죄의 의미로 점심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은하를 이곳 카페까지 데려왔다.
“언니, 진짜 쏘리.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원래 목소리가 좀 커서.”
아연은 멋쩍게 웃으며 빨대를 매만졌다.
“됐어. 홍보한 셈 치면 되니까.”
은하는 샌드위치 포장을 까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목소리의 높낮이나 말투, 표정으로 보아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
빤히 은하를 주시하는 분홍색 눈동자.
정색하며 책임져라 소리칠 줄 알았는데 정말 샌드위치 하나로 봐주다니. 아연이 그간 알던 어른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아연은 은하의 음료 잔에 직접 빨대를 꽂아 주며 배시시 웃었다. 은하는 그런 아연을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샌드위치를 거의 다 먹어 갈 때 즈음. 아연은 은하가 옆자리에 가지런히 세워 둔 까만 양산을 발견했다.
“……언니, 저 양산은 도대체 어디서 난 거예요? 사려고 해도 못 살 것 같은 디자인인데.”
“주웠어.”
은하가 단조롭게 답했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사람이다.
‘제천대성이랑 맞짱 떴다느니 언노운 게이트의 찐 토벌자라느니,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따라다니는 것도 그렇고, 참가비만 300코인이 넘는 옥션에 버젓이 참여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진짜 F급이 맞긴 맞는 거야? 은하의 앞에서 음료를 휘저으며, 아연은 생각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보통 아연이 봐 왔던 컨셉 헌터나 헌터 BJ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었다.
일단 첫 번째, 단순히 ‘관종’인 경우.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관종들은 대부분 묻지 않아도 자신의 대한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곤 했다.
그러나 은하는 KTX에서 만났을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도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할 뿐, 자신의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지 않았다.
더구나 아직 깊은 사이는 아니었으나 이 언니는 그다지 사람들의 관심을 달가워하는 타입이 아닌 게 눈에 딱 보였다.
그렇다면 두 번째. 비전투적인 고유 능력을 소유한 헌터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컨셉 헌터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
그래, 차라리 이쪽이 가능성이 높겠다.
그런 거라면 저런 불편한 드레스를 입어 가면서까지 헌터 활동을 하는 것도, 적자를 보면서까지 칩을 긁어모으려고 하는 것 역시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
“언니도 프리 헌터라고 했죠? 계약한 곳이 페이가 좀 짠가?”
새까만 시선이 이곳을 향한다. 잠시 침묵하던 은하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계약은 중도 파기했어.”
헐.
“왜요?”
프리 헌터에게 있어서 계약은 밥줄이자 생명줄이었다.
“그럼 의뢰인은 있어요?”
“…….”
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물끄러미 은하를 응시하던 아연은 발끝을 까딱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아연이 탁! 테이블을 내리쳤다.
“좋아요. 그럼 사죄도 할 겸 옥션 선배로서 몇 가지 팁을 줄게요. 언니에게만 특별히.”
팁? 콜라 잔을 쥐려던 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우선 다른 거 다 집어치우고 오후부터는 아이템 가격부터 올려요. 가죽 15장에 칩 1개라는 건 진짜 미친 거임. 뭐 가죽이 몇만 장 있으면 모르겠는데.”
“있어.”
쪼르륵, 빨대로 음료를 빨아 올리는 소리가 유독 컸다.
기세 좋게 조언을 이어 가려던 아연은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버렸다.
은하는 초연한 얼굴로 덧붙였다.
“최소 5만 장.”
“…….”
“…….”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