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01
01000 Omnibus – Seraph. =========================================================================
7. 작전명 ‘꽃잠’.
살얼음 같던 아침 식사 시간이 끝났다.
김수현이 모습을 감추자, 세라프는 한숨을 폭폭 쉬며 걸음을 옮겼고, 암암리에 휴전한 여인들은 서둘러 따라 식당을 나섰다.
예닐곱 명이 한 천사의 뒤꽁무니를 살금살금 뒤쫓는 광경은 나름 진풍경이었다.
그러나 세라프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정원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내 힘없이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응시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라프의 행동은 점점 기괴해졌다.
가령 처음에는 하염없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만 바라보더니,
느닷없이 얼굴을 감싸 쥐고 ‘몰라 몰라.’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든가,
눈을 감고 양손을 꽉 주먹 쥔 채 필사적으로 심호흡한다든가,
하지만 그러면서도 양 날개는 쉴 새 없이 펄럭펄럭 오르락내리락한다든가,
결국에는 도저히 진정이 안 되는지 이상한 신음을 흘리며 꿇어앉더니 정원에 머리를 쿵쿵 찧는다든가.
“…저, 천사가 저러는 거 처음 봐요.”
조용히 지켜보던 남다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머지도 하나같이 끄덕끄덕.
왜냐면 이제는 숫제 양 무릎을 꼭 안고 정원을 뒹굴뒹굴 구르는 중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오빠랑 뭔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김한별이 초조히 뒤를 돌아보자, 고연주가 낯을 찡그렸다.
“그건 나도 알아. 문제는 뭔 일이 있었는가, 이게 중요해.”
이에 관한 의견은 분분했다.
‘흑역사를 떠올리고 저러는 걸 거다.’ 라는 소견도 있었지만, ‘김수현과 싸워 상심에 젖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하다.’ 라는 말이 지배적이었다.
아침에 식당에 둘이 마주쳤을 때 풍겼던 분위기는 확실히 수상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우…. 으, 응? 여기서 다 뭐하는 거야?”
‘싸웠다.’ 와 ‘아니, 좀 더 지켜보자.’ 로 의견이 갈려 한창 어수선할 때, 늦잠을 잔 이유정이 나타났다.
눈을 비비며 거대 석조에 숨어 있는 여인들을 보더니 문득 건너편 정원의 세라프를 확인하고 혀를 찼다.
“쯧, 역시 싸웠나 보네.”
“응? 그게 무슨 말이니?”
안 그래도 노심초사하던 고연주가 재빠르게 물었다.
“아…. 언니. 실은 어젯밤 잠이 안 와서…. 오빠랑 같이 자고 싶었는데…. 그러니까 엿들으려고 한 건 절대 아니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어서 말해봐.”
고연주의 재촉에 이유정은 바로 어제 일을 털어놓았다.
밤중에 몰래 올라간 것부터 집무실에 세라프가 있는 걸 확인한 것 등등.
서로 고성이 오갔다는 내용과, 말다툼이 끝나고 세라프가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갔다는 내용은, ‘싸웠다.’ 는 의견에 힘을 싣기 충분하고도 남았다.
“뭐라고 싸웠는지 못 들었어?”
“응. 자세히 못 들었어. 그냥 오빠는 서운하다고 하고, 쟤는 오빠한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고…. 아무튼, 분위기 엄청나게 험악했어.”
고연주의 낯에 심각한 빛이 역력해졌다.
정말로 후자일 경우 문제 될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특히 세라프를 초대한 그 날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거듭 말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김수현이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게 딱 두 개가 있다.
자식, 불화 조장.
그 병적인 성격을 아는 고연주는 김수현이 ‘분별 있게 처신해라.’ 는 말조차 탐탁지 않게 여길 걸 잘 알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묵묵히 있던 정하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침에 별말 없던 걸 보면 세라프 씨가 잘 처신한 것 같은데….”
그렇기는 하다.
작정하고 고자질했으면 이미 한바탕 사달이 났을 테니까.
하지만 끝내 말하지 않은 건 고연주의 경고대로 분별 있게 처신한 거라고 볼 수 있을 터.
말인즉 여자의 의리(?)를 지킨 셈이다.
…라고 여인들은 동시에 생각하고 있었다.
이 생각이 착각이라는 걸, 사실 사랑이 듬뿍 오고 가는 후끈후끈한 싸움이었다는 걸 꿈에도 알지 못한 채.
“너무 안쓰러워. 본인도 얼마나 답답하면….”
마음 약한 임한나가 걱정 짙은 눈빛으로 세라프를 응시했다.
“그래요. 몇 달 동안 눈치 준 것도 사실이고…. 이쯤 되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김한별도 조심스레 의견을 개진했다.
수 쌍의 시선이 모이자, 고연주는 여전히 좌절 중인 세라프를 바라봤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네. 어차피 세라프까지는 이해하려 했으니까.”
김한별과 임한나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완곡히 돌려 말했지만, 뭔 뜻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드디어 안주인의 허락이 떨어졌다.
“어때요?”
고연주가 흘끗 쳐다보니 남다은, 이유정, 차소림도 동시에 한 여인을 돌아봤다.
제갈 해솔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러자고요. 애초 우리 네 명은 아무 짓도 안 했어요?”
한 발짝 빼기는 했으나 어쨌든 동의했다.
이렇게 ‘S.F’, ‘W.E.F’ 두 단체의 임시 동맹이 성립됐다.
“좋아.”
고연주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고.”
여인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
오늘도 수행 인원 준비에 여념이 없던 조승우는 갑작스러운 호출에 서둘러 일 층으로 내려갔다.
김수현도 아니고, 고연주의 개인 호출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르셨습니까? 그림자 여왕님.”
“아, 바로 오셨네요?”
“하하, 뭐 그렇죠. 그런데 어쩐 일로…?”
“다름이 아니고. 오늘 그이 스케줄 좀 알고 싶어서요. 언제쯤 들어올까요?”
조승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고연주 주변으로 몹시 분주한 기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쎄요. 늦어도 저녁 전에는 오실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 그이랑 밖에서 저녁 좀 해결하고 와줄래요?”
“예?”
“좀 늦게 들어와 달라는 말이에요.”
‘하지만 클랜 로드는 오늘 따님과 저녁 약속을….’ 이라고 말하려던 조승우는, 불현듯 등에 흐르는 뜻 모를 식은땀을 느꼈다.
“오늘은, 굉장히, 중요한, 날이니까…. 부탁해요?”
스타카토(Staccato)처럼 뚝뚝 끊어 말하는 투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뭔 일인지는 몰라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의지였다.
그때 공교롭게도 로비를 쫄랑쫄랑 가로지르는 여아를 확인한 조승우는,
“아,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해보죠.”
황급히 몸을 돌려 수나를 쫓았다.
“수, 수나 님! 잠시만!”
“…응? 뭐야! 하찮은 인간 주제에 함부로 말 걸지 마!”
“그게 아니라….”
“시끄럽다고…. 으, 응? 아빠가? 진짜 진짜?”
뭔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윽고 수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쏜 살처럼 계단을 올랐다.
“참 알기 쉬운 꼬맹이라니까.”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고연주는 정원을 응시했다.
아까 실의에 빠져 있던 세라프는, 어느새 다수의 손에 잡혀 어딘가로 억지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자자, 가자고요.”
“자, 잠시만…!”
“빼지 말고 얌전히 와요. 우리가 이렇게 밀어주는 게 어디 흔한 일인 줄 알아요?”
“아, 아니…!”
차분히 보고 있던 고연주는 오래간만에 할 일이 생겼다는 듯 양팔을 걷어붙였다.
“가자, 한나야. 시간은 좀 벌었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잖니.”
“그럼요. 이런 준비는 아무리 해도 부족하죠. 후후.”
임한나도 싱글벙글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모아 질끈 묶었다.
두 여인이 향하는 곳은 대목욕탕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리하여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홀딱 벗겨진 세라프는 강제로 열탕에 쑤셔 넣어졌다.
이 방면에 관해서 고연주와 임한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였다.
무려 서너 시간이나 들여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겼으며, 온몸을 구석구석 꼼꼼히 닦고 어느 방으로 데려갔다.
이때만큼은 끝없는 혼란 속에서 헤엄치던 세라프도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방 안에는 옷가지, 구두, 장신구, 심지어 향수 등 물경 수백을 헤아리는 사치품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니까.
“후, 이 정도면 충분해.”
방을 돌아본 고연주는 흡족해하며 세라프의 몸을 꽁꽁 싸매던 수건을 확 풀어 젖혔다.
세라프가 비명을 질렀다.
“일단 속옷부터 시작해볼까?”
“어? 이건 누구 거예요?”
그러거나 말거나, 남다은이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색 속옷을 들어 올렸다.
유두를 가리는 부분이 큼지막한 하트 형상으로 뚫려 노출된 브래지어와, 마찬가지로 음부를 가리는 부분이 같은 모양으로 구멍 나 훤히 트인, 몹시 야한 속옷이었다.
어지간한 고연주도 혀를 내둘렀다.
“가슴 트임에 밑 트임까지…. 나 참, 누구 건지 몰라도 죽여주네. 세라프 씨? 이거 입을 수 있어요?”
“네? 어떤…. 네에에에에에에에?”
간신히 진정하던 세라프가 다시 기절초풍했다.
항상 올곧은 몸가짐으로 살아온 천사로서는 자극이 심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 상스럽습니다! 파렴치합니다! 도대체 누가 저런…!”
“수현이는 좋아하던데….”
임한나는 혼잣말하며 낯을 붉혔고, 여러 명이 다른 속옷을 한 아름 들어 올려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상 범주에 속하는 속옷이 도저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터벨트, 망사, 갈라, T, 꽃다발, 콕, 젤리, 살 색 밴드, 일회용 반창고 등등, 세라프가 보는 것마다 경기를 일으키는 것뿐.
차소림이 자기 건 어떠냐며 추천한 곰돌이나 딸기 무늬 속옷이 예사로 보일 지경이었다.
“와…. 진짜 너무하네. 다들 평소에 어떤 플레이를 하는 거예요?”
“차라리 완전히 노출하는 건 어때요?”
“오, 노팬티도 나름….”
“안 돼. 승부 속옷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줄 알아? 첫날밤부터 노출 변태로 낙인 찍히게 하려고 그래?”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천사가 겨우 힘을 내 레이스로 장식된 리본 모양 끈 팬티를 고르는 가운데, 임한나는 세라프의 흰 살결에 페로몬 캔들을 살짝 발랐다.
이유정은 고데기와 빗으로 무장해 윤이 흐르는 은발을 매만졌고, 김한별은 고운 손을 다듬기 시작했으며, 정하연은 신부 화장을 준비했다.
그리고 제갈 해솔은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참 부럽네요.”
고연주가 세라프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드레스를 고르러 가는 동안, 제갈 해솔이 천사 앞에 털썩 마주앉았다.
“네, 네?”
“젠장, 부럽다고요. 난 첫 경험이 난교 중에 이뤄졌는데, 누구는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고. 아이고, 내 팔자야!”
새색시처럼 수줍어하던 세라프는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가, 키득거리는 소리에 살그머니 눈을 들었다.
“뭐, 됐어요. 아무튼, 드레스랑 장신구 고르는 동안 우리는 어서 말투나 교정하죠.”
“말투…. 말씀이십니까?”
“네. 그 말씀이십니까? 같은 걸 고쳐야 해요.” 라고 말한 제갈 해솔은,
“좀 애교 있게 바꿔보자고요. 아이이잉~. 자기이이~. 세라프는 오늘 자기랑 있고 시포오오~. 이 정도는 힘들더라도.”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눈을 찡긋 감는다.
“…….”
세라프는 명백히 비위가 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 작품 후기 ============================
1000회….
감회가 새롭네요.
1회를 업데이트 한 게 2012년 12월인데, 어느새 네 자릿수까지 늘어났는지….
하하.
상당히 공교로운 기분이에요.
사실 1000화를 달성한 오늘 1월 18일이 제 생일임과 동시에, 드디어 비주얼 노벨이 출시되는 날이거든요.(설마 출시가 또 연기되지는 않겠지요? ㄷㄷㄷㄷ)
아무튼, 새삼스럽지만, 여기까지 같이 와주신 독자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서 외전도 끝내고, 메모라이즈도 이북 및 연재로 새롭게 수정하고, 새 신작도 준비하는 등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_(__)_
PS. 못 받은 분들까지 포함해 전부 딱지 보냈습니다.
한 번 개인 선물함 확인해보시고, 여전히 못 받으신 분께서 계시다면 저한테 말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