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35
01034 Omnibus – Sovereign Of Sword. =========================================================================
한소영의 이상한 강요에 김수연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김유연은 벌컥 성을 내며 둘 사이를 가로막는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웃고 지나갈 한가로운 풍경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곳은 전장이었다.
창과 칼이 난무하는, 그리하여 뿌려진 선혈이 강물처럼 흐르는.
즉 어떤 변수가 터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전쟁터.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
처음 이상 징조를 느낀 건 정신적 혼란에 빠져 있던 김수현이었다.
이내 세 여인도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얼굴로 급히 성벽 너머를 바라봤다.
돌아본 곳에는 땅거미가 스민 허공에 시커먼 점 하나가 찍혀 있다.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크기가 점차 커진다.
하늘을 비행하는 그것은, 뭔가가 거세게 펄펄 나부낄 만큼 무서운 속도로 쇄도해오는 중이었다.
불과 십 초도 안 돼서 한 소녀로 변했을 정도로.
휘날리는 것의 정체가 칠흑색 머리카락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건 그 소녀가 약 이십 미터 거리를 남기고 정지했을 때였다.
“말도 안 돼! 타나토스가 참가했다는 정보는…!”
“수연아, 이스탄텔 로우 로드!”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김유연이 급한 음성으로 외치며 통신 구슬을 꺼냈다.
김수연은 아차 했고, 한소영도 서둘러 통신 구슬을 꺼내 들었다.
“오호!”
이윽고 자그마한 체구치곤 성숙한 외모의 미인이 성 위를 올려다보며 탄성을 질렀다.
스리슬쩍 아래를 내려다본 김수현의 눈빛이 느닷없이 강렬해졌다.
왜냐면 성 아래의 여인은 익히 알고 있는 상대였으니까.
“타나토스?”
독백처럼 작은 음성이었지만, 타나토스의 눈꼬리가 휘어지며 입이 벌어졌다.
“와, 날 알고 있어?”
둘이 주고받는 대화에 김수연은 힐끗 김수현을 쳐다봤다.
하지만 표정이 읽히지 않는다.
김수현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타나토스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너였구나?”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재밌네.”
타나토스는 김수현과 김수연을 번갈아 보며 으흐흐 웃음을 흘렸다.
하긴 그녀 또한 구천급의 신.
화정이 아는 걸 타나토스가 모를 리 없다.
“시공간을 넘어서 다중 우주에 간섭한다…. 정말이지 이 세계는 질리지가 않는다니까…. 아무튼, 환영해!”
두 팔을 활짝 벌린 타나토스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외쳤다.
“고마워.”
쟤도 등장했구나, 라고 생각하던 김수현은 싱겁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깔깔 웃어 젖히던 타나토스가 살그머니 정색했다.
비웃는 느낌은 여전했으나, 어쭈, 이것 봐라? 라는 기색이 희미하게 섞여들었다.
“너….”
잠깐의 공백 후, 타나토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주위가 갑자기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탓에 그녀의 말은 어수선한 소란 속에 묻혀 버렸다.
김유연과 한소영이 재빠르게 통신을 돌려 병력을 호출한 것이다.
타나토스는 성벽 위로 속속히 올라오는 사용자들을 보며 아미를 찌푸렸다.
그리고 아군의 동향을 살피는 김수현 역시 머리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구천급 신 타나토스.
확실히 위험한 상대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죽음의 신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만 봐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만하니까.
하지만 북 대륙 쪽에도 대응할 수단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신이라고 해도 어쨌든 아바타인 이상, 화정이 보조하는 김수연이라면 충분히 겨룰 수 있을 터.
실제로 원래 세계에서 타나토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 김수현은 맞상대하는 걸 넘어서 완전히 압도했었다.
그런데 주변의 아군은 타나토스를 향해 강렬한 적의를 내뿜는 동시에 숨길 수 없는 공포감을 비추고 있었다.
전자는 그렇다손 쳐도, 필요 이상으로 겁내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아아아-.”
타나토스는 양손을 허리에 얹으며 푹 고개를 떨궜다.
과도하다 생각될 정도의 큰 한숨을 내쉬며.
이내 시큰둥하게 입맛을 다시더니 눈을 게슴츠레 뜬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당장 조용히 사라지면…. 봐준다.”
그 말에 김수현이 헛웃음을 지으려는 찰나, 주변의 반응을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곳곳에서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게 전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봐줄 게. 진짜로. 사실, 이거 내 멋대로 온 거거든? 저놈에게 볼 일이 있어서.”
말인즉 이 자리는 김수현만 있으면 된다, 살려줄 테니 조용히 꺼져라, 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타나토스는 귀찮아하는 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건 꼭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한 말투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김수현조차도.
“다, 닥쳐! 이 괴물!”
그때 한쪽에서 발악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의기는 장하나, 안타깝게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너, 너 때문에…!”
“아앙?”
타나토스가 눈을 한 번 부라리자, 삿대질하며 외치던 여인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피식 웃은 타나토스는 느긋이 들어 올린 오른손을 주먹 쥐었다.
가만히 보고 있던 김수연이 발 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하지 마.”
“흥.”
“하지 말라고 했어. 타나토스.”
“닥쳐, 아직 3차 각성도 못 이룬 주제에. 이제 너한테는 관심 없어. 그보다….”
살벌하게 받아친 타나토스는 다시금 김수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들었어. 아스모데우스를 한 방에 날렸다며?”
김수현은 대답은커녕,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예의 무심한 얼굴빛으로 조용히 응시한다.
“그거 있잖아.”
킬킬거리는 소슬한 웃음이 흘렀다.
그 다음 순간, 타나토스의 오른손이 가볍게 내뻗어진 것과.
“피해!”
김수연이 악을 쓰는 것.
쾅!
그리고 거대한 폭음과 함께 성벽에 구멍이 뻥 뚫린 건 그야말로 창졸간 벌어진 일이었다.
고오오오-.
잿가루로 화한 부스러기가 흩날린다.
방금까지 여인이 서 있는 성벽에는 공혈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군데군데 젖어 번지는 핏물만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뿐.
“타나토스으으으으!”
분노에 찬 김수연의 고성이 일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거, 나도 할 줄 아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타나토스는 실실 웃으며 오른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명백한 도발.
사실상 이렇게까지 집적거리는 이유는 하나였다.
“어때? 응?”
이 세계에 강제로 간섭한 존재에 호승심이 생겨난 것이다.
물론 죽음의 신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만큼 고작 인간 몇 명 날렸다고 자랑거리가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김수현은 타나토스가 저렇게 자신하는 근원을 암암리에 느끼고 있었다.
단도직입으로 말해서 이 세계의 죽음의 신은 원래 세계의 타나토스보다 곱절은 강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어떻게 저만큼이나 힘을 회복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수천, 혹은 수만 명의 사용자가 제물로 바쳐져 타나토스의 양분이 되었을 거라는 점.
거기다 아스모데우스의 경우도 따져보면….
‘동, 남 대륙은 완전히 결딴났다고 봐야겠군.’
김수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틀랜타 공략도 늦었고, 악마는 이미 전면에 등장했고, 북 대륙은 아직 내전 중이다.
이 정도만 해도 최악이라 할 만한데 타나토스까지 등장했다.
어째, 이 세계는 알면 알아갈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쯤이면 일 회차보다 낫다고 하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여태껏 버티고 있는 게 용하다 생각될 정도랄까.
애초 왜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런데 말이야~. 나 무지무지 궁금한 게 있는데~.”
상념을 정리하는 동안, 타나토스는 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렸다.
“너, 다른 세계에서 왔잖아? 그럼 네 세계에서 난 어땠어?”
“…죽었어.”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김수현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약간 초점이 어긋났지만, 어쨌든 간결한 대답이었다.
“죽었다고? 누구한테?”
“나한테.”
“어떻게 죽었는데?”
“목숨을 구걸하면서.”
타나토스는 입을 닫았다.
흥에 겨운 눈동자는 어느새 침잠해 서슬 퍼런빛을 뿌리고 있다.
명색이 신이니만큼 싸구려 도발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단지 아까부터 내내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게 몹시 거슬렸다.
인간 주제에.
지금 이 자리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건 신인 자기 자신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타나토스는 히쭉 웃어 보였다.
“기대되는 걸~. 그런데 입만큼이나 실력은 있으시려나~?”
김수현은 김수연을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드디어 싸우는 건가, 반색하던 타나토스는 이윽고 멍한 얼굴을 보였다.
성벽 끝까지 아슬아슬하게 선 김수현이 두 손을 주머니로 찔러 넣었기 때문이다.
말로는 얼마든지 도발해도 상관없다.
그냥 흘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전투를 앞두고 저따위 태도를 보인다는 건 모욕 중의 모욕이다.
어떤 의도로 저런 건방진 행동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삼 초 줄 게. 손 빼. 죽기 싫으면.”
두둑두둑.
눈을 가늘게 뜬 타나토스가 낮은 목소리로 뇌까리며 손을 꺾는다.
“너…?”
한편, 김수현을 보고 있던 김수연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 떨렸다.
“…….”
이제껏 변화 없던 얼굴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김수현이 이 세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김수현이 홀 플레인으로 돌아오고 나서 단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던 표정이었다.
“놀고 있네.”
타나토스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네가 정색하면….”
이윽고 아까처럼 오른손을 꽉 쥐더니.
“어쩔 건.”
기습적으로 정면으로 힘차게 질렀다.
“데!”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