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62
00361 함정(1) =========================================================================
홀 플레인, 소환(召喚)의 방.
회색 빛으로 둘러싸인 아치형 천장(Vault) 아래로, 방의 중앙엔 직사각형 모양의 제단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중앙에 놓인 잿빛 제단에는, 한 명의 아름다운 천사 세라프가 미동도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딱 하나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이따금 미약하게 일렁이는 새하얀 날개뿐.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수심에 젖은 얼굴은 마치 정적 속에 묻혀버린 듯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 어째서….”
그때였다. 가만히 감겨있던 눈이 한순간 번쩍 뜨이는가 싶더니, 이내 눈꺼풀 안으로 숨겨져 있던 옥 빛 눈동자가 한 번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떠한 사실에 심히 당황했는지, 드러난 세라프의 눈동자는 미미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왜 하필 지금…. 화정의 각성이….”
어지간히도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세라프는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해 중간중간 흐리었다. 어느덧 미약했던 날갯짓은 사정없이 살랑거렸고, 뱉어낸 음성에는 수심에서 비롯된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있었다.
“안 돼…. 아직은 시기상조….”
하지만 이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깨달았는지, 천사의 얼굴에 처연한 감정이 스쳤다.
“수현….”
이윽고 고운 입술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새어 나온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들을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음성에는 간절하리만치 느껴지는 애달픔이 담겨있었다.
세라프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리곤 양손을 꼭 맞잡아 올린 채, 예의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빅토리아의 영광’과 용이 맞닿기 직전 이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이 멈추고 말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크게 울린다.
‘방금 전에 들린 목소리는…. 분명….’
격돌 직전, 심장에 잠재된 힘이 크게 폭발한 건 느꼈다. 하지만 그 이후 벌어진 상황은 내 의지를 확실히 벗어나 있었다.
시간이 멈춘 세상. 내부를 울리는, 익숙하진 않지만 낯설지도 않은 목소리. 그리고 아까부터 거세게 요동치는 심장의 고동.
갑작스레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상황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차분히 숨을 들이켰다가, 다시 내쉰다. 심호흡을 반복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렇게 어느 정도 속을 가다듬은 후에야 나는 다시 눈을 뜰 수 있었고, 그제야 상황을 약간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아….”
세상은 멈췄던 게 아니었다. 그렇게 착각했을 뿐이다. 내부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멈춘 것은 단 하나. 그것은, 바로 거대한 불길을 일으키며 날아온 용염(龍炎)이었다.
– 멍하니 있지마. 흥. 이 바보 멍청이.
띠링!
그때, 다시 한 번 내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이어서 눈앞 허공으로 메시지 창 하나가 떠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화정(火正)의 각성 1단계, 영역 선포(Area Declared) – “태고(太古)의 격으로 명할지 어니.”가 시작됩니다.』
‘화정? 각성?’
그리고 메시지를 끝까지 읽은 순간,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화정의 각성이라고는 하지만, 어떠한 전조도 징조도 보이지 않은 갑작스레 이루어진 각성이었다. 그렇게 영문도 모르는 상황에 가만히 입술에 침만 적시고 있을 즈음이었다.
– 왜 이렇게 멍하니 있어. 나랑 처음 얘기하는 것도 아니면서. 응. 이번이 세 번째인가?
이것은…. 화정의 목소리?
–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엄청 늦게 알아맞히네. 이 바보 멍청이.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된 거지? 아니 왜 네가 갑자기 지금 나온 거야?
화정이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이 신기했지만, 나는 호기심을 꾹 밀어 넣었다. 지금으로서는 단순히 벌어진 일만 파악했을 뿐이다. ‘왜.’ 이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화정의 생각은 다른지, 돌아온 말은 내 기대와는 한참 어긋난 대답이었다.
– 상황은 나중에. 지금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고?
– 일단 내 임의대로 선포하긴 했지만…. 어찌됐든 지금 일대는 ‘영역 선포’에 들어간 상태야. 지금 네 수준으로는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
…어떻게 하면 되지?
화정의 말에 나는 곧바로 생각을 고쳤다. 하기야 지금 한가로이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시간이 없다는데 자꾸 물고 늘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내 신속한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문득 화정의 기운이 몸 안을 한 바퀴 빙글 도는 게 느껴졌다.
– 응!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하고 싶은 대로?
– 그래. 아까 이미 영역은 선포된 상태라고 말했잖아! 이 바보야!
아까부터 자꾸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게 무척이나 거슬렸지만, 나는 침착히 시선을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그러자 여전히 불똥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용의 형상을 이룬 불꽃들이 보인다.
‘하고 싶은 대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단숨에 잘라낼 생각으로 달려들었던 터라, 오른손에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마력을 뿜어내는 ‘빅토리아의 영광’이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나는 그것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 대신, 비어있는 왼손을 활짝 피어 용염의 앞으로 가져다 대었다. 더 이상 뜨거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대로 사라지라고 말하면, 사라지는 건가?
– 사라져.
흩어지라고 말하면?
– 흩어져.
단문단답(短文短答)이었지만, 나는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지금 이 일대에 있는 염화(炎火)의 기운은 모두 내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그렇군. 그래서 ‘영역선포’라는 이름이 붙은 거구나.
– 맞아. 비록 영역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넓은 범위라고 볼 수는 없지만, 누구를 탓하겠어? 아무튼 시간 없으니까 빨리 끝내. 슬슬 몸에 부담이 느껴질 테니까.
몸에 부담이 느껴진다. 그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순간적인 마력 폭발로 인해 극도로 활성화됐던 회로는 이내 조금씩 기세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예전에 한창 체력이 낮았을 때 느꼈던 익숙한 감각이 온몸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멸? 되돌림? 방향 선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선택지의 폭이 굉장히 너무도 넓어서, 순간적으로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할지 많은 고민이 들었다.
이후 약 10초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결국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왼손은 이미 용염에 대어둔 상태. 이윽고 하나의 염원을 담아 그것을 서서히 허공으로 끌어올리자, 그에 따라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거칠 것은 없다. 몸에 걸리는 부담이 점차 거세어지는 것을 느끼는 만큼, 나는 지체 없이 팔을 왼편으로 뻗었다.
“가라.”
단 한 마디였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크롸롸롸롸롸롸롸!
말 한마디와 한 번의 팔짓을 했을 뿐인데, 동부의 사용자들을 쪼갤 듯 달려들었던 용염은 내 말에 반응하듯 커다란 포효를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신속히 방향을 바꾸어 바바라의 성벽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의 끝을 채 보기도 전에, 주변으로 뭔가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기분은….’
해방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해제라고 해야 할까?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윽고 전신을 휘돌던 이글거림이 한순간 사그라지는가 싶더니, 머릿속으로 어둠이 차츰 찾아 들기 시작했다. 한순간 휘청거리는 와중에서도 나는 간신히 성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용염이 내가 지시한 성벽을 거세게 덮치는 것을 확인했을 즈음.
– 잘자. 우리…. 다음에 또 봐.
아쉽게 느껴지는 화정의 목소리와 함께,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
따뜻한 빛 무리가 온몸을 휘감는다. 그러자 몽롱한 머리에 차차 정신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형! 형!”
“깨어나셨어요! 깨어나셨다고요!”
‘시끄러워.’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가슴속에 차오른 숨을 뱉고 고개를 들자 천장에 상아색 천막이 보인다. 아무래도 정신을 잃은 직후 개인 막사로 옮겨진 듯싶었다.
“제가…. 얼마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나요?”
끙 힘을 주어 상반신을 일으키자, 내 양쪽 어깨로 누군가의 손길이 살며시 닿은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나를 따라 몸을 일으킨 정하연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잃지는 않으셨어요. 수현 덕분에 부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진지로 후퇴할 수 있었고요. 그러니, 일단은 푹 주무세요.”
이윽고 어깨에는 가해지는 미약한 힘이 상반신을 다시 침대로 이끌었지만,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 손을 떼어내었다. 그리고 속으로 바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화정.
– …….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전처럼 멋대로 나타나 말을 걸었다가, 또 멋대로 사라진 모양이다. 혹시 몰라 한참 동안 말을 걸어봤지만 결국 응답 없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몸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혹여 또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까 많은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무척 양호한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도 어지럽지 않고 마력 회로도 일절 손상된 곳 없이 평소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물론 마디마디에 미약한 결림이 느껴졌지만, 곧 회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클랜 로드. 몸 상태는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딱히 이상한 데는 없어요.”
“다행이네요. 아주버님과 검후께서 좋은 약초를 주셨어요. 엘릭서 정도는 아니었지만….”
“형이랑 검후가요?”
내 물음에 정하연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곤 말을 덧붙였다.
“두분 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 있다가 가셨어요. 회의가 있다고 하셔서….”
형은 그렇다 치더라도, 검후라….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제야 막사에 한 가득 모여있는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머셔너리 클랜원들이었다. 하나같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내가 정신을 잃었다는 소식에 다들 한 걸음에 달려온 모양이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도 있어 설핏 반가운 마음이 일었지만, 모두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고 있는 터라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해서, 나는 한두 번 헛기침을 하고 얼른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흐흠.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에 나는 달려들던 용염을 다시 도시로 되돌렸다.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무척 궁금했기에 현 상황에 대한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작스레 이상한 위화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나는 엄습한 위화감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모두 온 줄 알았던 머셔너리 클랜원들 이었는데,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신상용씨는?”
“아….”
그냥 아무 의미 없이 한 마디 툭 던진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순간 클랜원들에 얼굴에 미묘한 빛이 스치는걸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뭔가 말하기 싫어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자,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이번 전투에서 사망한 겁니까?”
“아, 아니에요 형. 죽은 건 아니에요.”
대답은 안현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한 번 신경이 쓰이니 더듬거리는 말투조차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럼?”
“그게….”
안현은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쩝쩝 입맛을 다시곤 말을 이었다.
“지금 상용이 형 상황이 별로 안 좋아서요.”
“어떻게 안 좋은데?”
“에…. 혹시 소문 못 들으셨어요?”
“소문?”
신상용에 대한 모종의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금시초문이었기에 나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안현이 다시 입을 여는 게 보였다. 그때였다.
“현이 너. 쓸데없는 말 하지마. 조용히 해.”
정하연이 일순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내자 안현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서서히 눈길을 거둔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분사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냥 아직 전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도 나름 노력하고 있는 것 같으니, 너무 심려 마세요. 클랜 로드. 일단은 휴식을….”
“사용자 정하연.”
“네, 네?”
나는 정하연의 말을 끊고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몇몇 클랜원들이 반사적으로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지만, 이내 지그시 내려다보자 엉거주춤 엉덩이를 붙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용자 신상용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 작품 후기 ============================
화정의 각성에 대해서 적고 싶은 이야기는 많습니다. 그래도 한 회에 모두 담아내는 것보다는, 차차 풀어가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즈음 그런 기법을 자주 쓰고 있어서요. 예를 들면 저번에 나오다 말았던 마지막 카드에 그려져 있던 그림도, 다음 회에 나올 예정이에요. 🙂
『 리리플 』
1. 데바란 : 1등 축하합니다. 이제는 1등에서 자주 보는 느낌이에요. ㅎㅎ.
2. 자베트 : 바보. 멍청이. 앞으로 봐서, 비밀을 확! 터뜨릴지 아니면 계속 비밀로 할지 생각해보겠습니다.
3. 어설픈후니 : 화정과의 재미있는 대화는 다음 기회로 미루었습니다. 🙂
4. 의기2010 : 격으로만 따지자면, 용염은 화정한테 말도 못 붙입니다. 화정이 어머니라면, 용염은 손주의 손주의 손주의 손주의 손주의 손주의 손주보다 더 아래에 있다고 보시면 되요.(?)
5. 눈물강 : 화정에 대해 구상할 때 애초에 그렇게 구상했습니다. 물론, 같은 화염 계열이라고 해도 분명히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있습니다.
6. 뇌전신룡 : 주먹이나 발을 쓰는 자들도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
7. 타나투스 : 헉. 바로 맞추셨네요. 체력이 101이 되지 않는 이상, 화정은 여전히 김수현의 발목을 붙잡을 겁니다. 설령 100을 찍는다고 하더라도요.
8. KireiAutumn : 김수현을 건들지 말라는 소리였습니다.
9. 훈제달팽이 : 전쟁이 끝나고 화정의 비밀을 일부 밝힐 예정입니다. 그때 어느 정도 정체를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
10. 건전한소환사 : 흠. 새로운 설문이라. 무척이나 댕기는데요? 🙂 한 번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