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70
00369 미안해. 형. =========================================================================
하얀 빛이 스며든 목 울대서, 이내 몇 줄기 가느다란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Ah…?”
남성 사용자는 일순 멍한 음성을 뱉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피를 왈칵 쏟아내더니, 목이 싹둑 잘려 땅으로 떨어진다.
툭! 데구루루….
이윽고 9명의 머리가 바닥을 뒹구는 것과 함께,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속속히 빈 공간이 생기었다.
“Watch out!”
“Is a Monster! Monster!”
한순간 적들 사이로 다시금 미약한 혼란이 이는 게 느껴졌다. 9명의 목이 동시에 날아간 게 꽤나 놀라운 모양이다. 그러나 상대를 배려해주는, 일말의 망설임도 있을 수는 없다. 난 놈들이 쓰러진 즉시 달려가 앞이 막힐 때마다 사납게 검을 찌르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푸욱! 스칵!
검 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심장을 후볐고, 검날은 사정없이 목을 그어버린다. 나는 두 번 공격할 필요가 없도록 일격에 죽일 수 있는 급소만을 노렸다. 무의미한 추가타를 줄일 때마다 그만큼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혼란에 빠진 틈을 잘 찔렀는지, 검이 닿을 때마다 적들의 목과 가슴에 숭숭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길을 꾸역꾸역 만들곤 있었지만, 반대로 마음은 점차 급해지고 있었다.
이쯤 됐으면 정령술사도 뭔가 이상한걸 느꼈을 터. 혹시라도 위험을 감지하고 후방으로 빠져버린다면, 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최대한 빨리 이동하지 않으면….’
이러한 마음이 반영되었는지, 두 검을 잡고 있던 손의 놀림이 약간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방어에 할애하는 부분을 일부 줄이고 공격에 더욱 치중하는 것이다. 비록 정교함이 약간 떨어질지라도 파괴력을 높이는 선택이었다.
훙훙훙훙훙훙훙훙!
이윽고 물 흐르듯 유연하게 이어지던 검로(劍路)는, 거친 바람 소리를 담은 비틀린 궤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상태 그대로 뛰어들어 왼쪽 발을 디딤과 동시에 반 바퀴 크게 회전했다. 그리고 오른발이 앞으로 나간 순간, 양팔에 힘을 주어 거세게 떨쳐 올렸다.
스르륵!
뭔가가 날카롭게 베이는 소리와 함께 복잡한 형태를 그리던 궤도에 남은 잔상은, 하나하나 매서운 검기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나마 눈치 빠른 놈들은 몸을 피하거나 방패를 들어 방어하려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검기가 닿은 순간 사방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피 분수가 시야를 가득히 가렸다.
다시 확보된 피가 낭자한 공간으로 파고들며, 나는 쉬지 않고 양손에 쥔 검을 있는 힘껏 교차시켰다. 타깃이 된 적은 얼떨결에 검을 들어올렸지만, 곧 쪼개진 무기와 함께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Back off! Back off!”
“Stay away from Monster!”
그렇게 어찌어찌 성공적으로 돌파를 이어갈 즈음, 사방에서 소란과 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들이 유난히 크게 흘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움직임에 하나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부근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적들이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방팔방으로 꽉 막혀있던 둘레였는데, 내가 가는 곳마다 뒷걸음질을 하며 오히려 길을 터주고 있었다.
‘응?’
한순간 적들의 뜻 모를 속셈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오묘한 살기가 목덜미를 깊숙이 찌르는 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패앵!
등 뒤로부터 들려오는 섬뜩한 파공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꺾었다.
휘리릭!
‘호?’
목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 그것의 정체는, 바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조그만 손도끼였다. 애당초 후방으로 들어오는 공격에 대해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에, 피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도끼에 담긴 위력 하나만큼은 제법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나는 약간 소름이 돋는걸 느끼며 바삐 상황을 살폈다.
이 와중에도 적들은 부단히 나와의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어느덧 내가 서 있는 주위로 둥그런 공간이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생각을 지워버렸다. 온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만일에 대비하고, 다시 검을 세워 돌격해 들어갔다. 아까부터 화살이나 마법 공격이 생각보다 뜸해진 게 의심스러웠지만 이미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온 이상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다.
나는 곧바로 두 개의 검을 곧추세우고, 다시 달려듦과 동시에 마력의 파동을 쏘아 보냈다.
카캉! 카카캉!
그러나 이번엔 대비하고 있었는지, 기세 좋게 들어가던 파동은 순식간에 겹겹이 세워진 방어막에 진로가 막혔다. 그 광경에 살짝 눈살을 찌푸릴 즈음, 갑작스레 전후좌우로 접근해오는 8개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8명이 들어오는 경로는 나를 완벽히 에워싼 형태였다. 더구나 들어오는 움직임을 보면 꽤나 매끄럽고 신속해, 실력이 범상치 않은 자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놈들과 가까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윽고 우왕좌왕 물러나는 적들의 앞으로 정확히 8명이 속속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3명, 3명, 2명. 절반은 근접 계열 사용자로 보였고, 나머지 절반은 암살자 같았다. 나도 모르게 숨을 한 번 들이키자, 은은한 살기를 품은 공기에 코끝이 저릿해지는걸 느꼈다.
‘무시하기는 힘들겠네.’
간신히 일으켰던 혼란이었지만 그럼에도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려있다. 이미 도처는 적들로 꽉꽉 들어찬 상태였다. 공간 조건상 이동을 위한 이형환위의 발동은 상당히 제한되어버렸다. 그래서 그것을 억척스럽게 뚫어가는 도중이었는데 난데없이 8명이 등장했다.
그 의도는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아마 내가 무차별적으로 날뛰는 것을 잠시나마 묶어보려는 심산이리라.
‘전열을 가다듬으려는 건가?’
“You shall die….”
찰나 동안 이어졌던 대치는, 나직한 목소리가 울린 순간 깨어졌다. 정면에 서 있던 남성이 입을 엶과 동시에 8명이 한꺼번에 나에게 덮쳐든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껴지는 살기에 나는 침착히 이형환위를 발동하였다.
휙!
그리고 흘끗 뒤를 돌아보자, 방금 전까지 내가있던 자리에 거의 동시에 달려든 놈들을 볼 수 있었다. 지독히도 놀라운 합격 능력이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칼리고 아브락사스’를 횡으로 쳤고, ‘빅토리아의 영광’을 조절해 이제 2번 남은 능력 ‘검 빛’을 날렸다.
챙챙챙챙챙챙챙챙챙!
잠시 후, 내게 등을 보였던 자들의 등에 기다란 일자의 검상이 생기고, 마주보는 방향에 있던 자들의 목에 하얀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나를 죽이겠다고 선언한 남자를 비롯해, 3, 4명의 사용자는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무너뜨렸다.
이제 남은 인원은 3명. 그리고 나는 잠시간 속으로 혀를 찼다.
‘검 빛’이 사기인 이유는 본래의 힘에 더해 나 자신의 사용자 정보를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방금 전에는 ‘검술전문가’로서의 권능을 담았고, 때에 따라서는 ‘화정’의 힘도 담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 만큼, 지금으로써는 그저 급한 마음에 바삐 능력을 발동했던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남은 한 번의 능력은 아껴야 한다.’
정령술사와 자웅을 겨루는 게 아니라, 죽이고 빼앗고 나오는 게 목적이었다. 물론 아직 비장의 수는 남아있지만, 혹시 모르니 이제 한 번 남은 검 빛은 아껴두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게 정리하고서, 나는 다시 내게 공격해 들어오는 3명의 적을 맞이했다.
“Kyaah!”
꽤나 독특한 기합성과 함께 3명은 전방위로 퍼져 달려들었다. 공교롭게도 앞선 전투에서 암살자가 모두 죽었는지, 달려오는 놈들은 전부 대검을 들고 있는 근접 계열이었다.
나는 들어오는 궤도를 계산해, 침착히 검을 들어 그것을 방어했다. 그리고 각각의 검이 맞부딪친 순간 손목이 묵직해지는걸 느꼈으나, 이내 들어온 힘을 되돌리자마자 도로 튕겨나가는 놈들을 볼 수 있었다.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진가가 발휘된 것이다.
끝끝내 무기를 놓치지 않은 건 칭찬해줄 만했지만 3명은 하나같이 팔이 크게 들려 가슴을 훤히 드러낸 상태였다. 나는 바로 처리할 생각에 검을 들어올려 앞으로 눕혔다.
그때였다.
찰랑!
한순간 볼에 차가운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린 게 느껴졌다. 일순 눈이 크게 떠졌지만 일단 할 일은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잽을 날리듯 검을 재빠르게 연타했다. 그리고 막 밀려나가던 놈들의 목에서 핏줄기가 터져 나오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곧바로 얼굴을 쓸었다.
손목에 묻어있는 것은, 확실한 물이었다.
물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속으로 놀라움이 일었다. 하지만 이내 속을 가라앉히곤 검을 들어, 주변 상황을 냉정히 살피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했다. 비록 8명과의 전투가 순식간에 끝났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 적들이 잠잠히 있었다는 건 뭔가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사방을 막고는 있지만 스스로 물러서며 내게 공간을 만들어주기까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를 주시하는 적들의 분위기도 미묘하다. 마치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듯한 태도처럼 보인다. 아까까지는 어느 정도의 혼란이 동반된 상태였다면, 지금은 묘한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창이 끝난, 발사 대기만을 기다리는 수많은 마법들이 느껴졌다. 또한 나를 겨냥하고 있는 무수한 활과 석궁들도 보였고, 그들 앞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는 근접 계열들도 밟힌다.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백 명의 사용자들은, 조금 전에 비해 굉장히 정돈된 전열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집중 사격’진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설마….’
번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나는 발 빠르게 마력 감지에 집중했고, 이내 물 냄새가 코를 물씬 찔러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물의 정령술사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상하군. 아직 닿을 정도는 아니…. 아.’
아니. 그럴 수 있다. 따져보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게 분명하다. 물의 정령술사는 도망을 선택하지 않았다. 내가 뛰어든 것을 인지하고, 오히려 나를 처리하기 위해 스스로 다가온 것이다. 즉 서로 거리를 줄여왔다는 소리. 하기야 입장 바꿔 생각해봐도, 혼자 뛰어든 적이 무서워 도망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Fire!”
퍼버버버버버버벙!
그리고, 이러한 의아함을 채 삼킬 새도 없이, 이어지는 외침과 함께 준비된 수많은 마법이 발출되는 소리가 들렸다. 쏘아진 마법들은 잠시 하늘로 올라갔다가 이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어 나에게로 하강했다.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놈들은 간교하게도 자신들 부근에 방어막을 치고, 내 일대로 동시다발적으로 마법을 쏟아 붓고 있었다.
어찌됐든 일단은 해보자는 생각에, 나는 양 검을 쥐어 쏘아져 들어오는 얼음의 창과 바람의 칼날을 쳐내기 시작했다.
펑펑펑펑! 펑펑펑펑!
검의 궤도에 닿은 마법은 여지없이 잘라졌지만, 들어오는 양은 모조리 쳐내기 버거울 정도였다. 그리고 간간히 몸에 미약한 흔들림도 느껴지고 있었다. 놓치는 마법들은 지금이야 고유 마법 저항력으로 버틴다고는 해도, 계속해서 누적되면 어찌될지 장담할 수 없다.
“Fire!”
슈슈슉! 슈슈슈슉!
진퇴양난의 상황에 우선 방어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음에는 무수한 화살비가 허공을 갈라 사선으로 내리 꽂혔다. 이것은 쳐낼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나는 이를 꾹 깨물곤 이형환위를 발동했다. 사방이 막혀있으니 결국 피할 곳은 하나. 내키지는 않지만, 허공이었다.
허공으로 이동한 후 유도 마법에 대비해 슬쩍 고개를 내리자, 순간 의외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벗어나자마자 초토화된 대지에는 가히 백은 넘어 보이는 화살들이 고슴도치처럼 꽂혀있다. 그것들은 내게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찰랑!
마치 기다렸다는 듯, 때맞춰 들어온 물의 공격. 허공을 매섭게 가르는 하나의 물줄기.
한 줄기 물빛 채찍이 허공을 직선으로 갈라, 내 정수리로 치고 들어왔다. 나는 담담히 검을 들어 그것을 쳐내었다. 그리고 미묘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본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찰랑! 찰랑! 찰랑! 찰랑!
어느새 허공에 떠오른 내 부근으로, 수십 개의 물줄기가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이형환휘를 사용할 것을…. 알고 있었군.’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쳐내었던 물보라처럼 흩어진 물줄기는, 다시 여러 갈래로 합치어 각각이 하나의 줄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겨냥하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채찍처럼 휘감아 들었다.
쐐액!
이 찰나의 순간.
나는 침착히 고개를 숙이었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물줄기들이 이어지는 곳에 몰려있는 사용자들과, 그들의 중앙에 서 있는 한 푸른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싸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킥.”
그리고 그것을 보며, 나 또한 여인을 향해 마주 미소 지어주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칼리고 아브락사스’를 으스러져라 쥐었다.
이윽고, 허공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칼리고 아브락사스의 잠재 능력. 부서진 파편(Broken Fragments)을 발동합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네. 오늘 돌아왔습니다. 시험이 오후에 끝나서, 자정 업데이트가 조금 늦었습니다.(양해 부탁해요!)
독자분들의 응원과 흔쾌히 기다려주신 덕분에 시험은 잘 보았습니다. 물론 결과야 나와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게 준비했다고 생각합니다. 😀
오늘 쭉 코멘트를 읽었는데요. 매우 날카로운 분들이 계시더군요.
무엇보다 가장 마음이 끌렸던 건 1인친 주인공 시점인데도 묘사가 너무 많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확실히 묘사가 구구절절 하더라고요. 그 탓에 긴박감이 없어지고, 급박한 상황답지 않게 너무 여유로운 느낌이었달까요. 하하.
그래서 미사여구를 간결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가볼 예정입니다.
원체 묘사하는걸 좋아하는 터라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요. 5일만에 글을 잡아서 약간 갸우뚱하기도 하고요. 혹시라도 어색한 점이 보이신다면 독자분들의 아낌없는 지적 부탁합니다.
아…. 아무튼 시험이 끝나니 후련해요. 시험 과목이 많아서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동생들이랑 학교 도서관에서 밤새면서 공부하고, 야식도 먹고 나름 재밌게 한 것 같습니다. 기분도 괜찮으니 뭐든 게 다 아름답게 느껴져요. 하하하.
다시 한 번 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 감사 드리며, 오늘부터 일일 연재를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