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69
00368 미안해. 형. =========================================================================
‘느껴진다.’
제 3의 눈과 마력 감지를 동원해 ‘물의 기운에’에 집중하자, 앞에서 그와 관련된 기운이 물씬 풍겨오는 게 느껴진다. 무언가 굉장히 집중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사정거리’라는 말을 들은 순간 어쩌면 정령술사도 가까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제법 나와있는 상태였다.
나를 잡으러 나온 건지 아니면 거인을 백업하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확실한 건 암살에 대한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것이다.
방향은 거의 정면. 거리는 대강 100미터….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되는 것 같지만, 기척을 잡은 이상 남은 건 최대한 빠르게 다다르는 것뿐이었다.
‘평소라면 금방 돌파할 수 있을 거린데….’
하지만 그렇게 맘 놓고 달리기에는 눈앞에 보이는 적의 숫자가 너무나 많다. 서서히 심장이 달구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곤 달리는 힘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있는 힘껏 달리는 와중, 문득 형에게 들었던 말들이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는 게 느껴졌다.
‘지금 여기가 네 놀이터로 보여?’
‘네가 무슨 영웅이야?’
‘아니. 왜 네가 해야 되는 건데?’
“…….”
알고 있다. 이러한 행동이 비정상적으로 보여질 것이라는 것 정도는.
그럼에도 내가 나서는 것을 자처한 이유는 까닭 없이 나서고 싶어서도 아니었고, 영웅이 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형.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해서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1회 차에서 망가질 대로 망가졌던 나였다면, 정신을 차리자마자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전쟁에 참가하지를 않았을 테지. 그리고 그러한 성격을 2회 차에 다다른 지금까지 유지했다면, 형을 강제로 끌고서라도 도주한다는(물론 형이 동의할 리는 없겠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까?
지금의 나와 형은 혈혈단신(孑孑單身)이 아니다. 머셔너리와 해밀이라는 클랜의 로드이고, 각 울타리 안에 있는 사용자들을 이끄는 입장이었다. 1회 차에서 나 때문에 목숨을 버렸던 해밀 클랜원들이나, 2회 차에서 나를 믿고 따라온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나와 더 이상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홀 플레인의 대명제(大命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러한 명제 아래, 나는 여럿을 생각했고 그에 따라 결정할 수 있었다. 즉 ‘형’이라는 단수에서 ‘그들’이라는 복수로 의미를 확장한 것이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그들 모두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나였지만, 난 그 모든 것을 고려하고서라도 최대한 많이 살릴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더욱 미안한 건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한 길을 선택함으로써 발생한 부담은, 형과 비비앙에게 고스란히 돌아가 버리고 말았으니까.
‘나도 만만치는 않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웃겼기에, 나는 킥 웃어버리곤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장소를 벗어나자마자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있는 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훤히 트인 들판을 가득 메운 적들은 나와 마주보는 방향으로 재빠르게 달려오는 중이었다. 마치 지금껏 벌였던 공성전에서 당했던 것을 일거에 되갚겠다는 양, 무기를 꼬나 쥔 놈들의 기세가 흉흉하기 그지없다.
이윽고 놈들 또한 나를 발견한듯했다. 꼭 흥분한 도사견처럼 흉포한 살의를 띄우던 눈가에, 일순 당혹이라는 감정이 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명백한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Khahahahahahahaha!”
처음 눈에 들었던 도끼 전사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신나게 웃는다. 아마 내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으로 비춰지는 모양이다.
그러한 적들을 보자, 2회 차를 시작하기 훨씬 전…. 그러니까 전투에 미쳐 살았을 적. 옛날에 느꼈던 감정들이 갑작스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었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것은 살의로 가장한 맹목적인 광기였다.
지금부터 나는 눈앞의 무수한 적들을 뚫고 들어가, ‘정령술사’를 암살해야 한다.
나는 차분히 속을 가다듬었다. 머릿속을 떠돌던 형의 말을 깨끗이 비우고, 그 자리를 전투에 대한 계산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손에 들린 검을 꾹 쥐어 마력을 폭발적으로 불어넣는다.
해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후.”
해낼 자신이 없었다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웅웅웅웅웅웅웅웅!
키야아아아아아아!
마력을 가득 먹은 ‘빅토리아의 영광’과 ‘칼리고 아브락사스’는, 빛과 어둠이라는 서로 상반된 색깔을 뿌리며 미친 듯이 울어 젖혔다.
피피피피피피피핑!
그때, 시위를 놓는 소리와 함께 무수한 화살들이 쏟아져 내렸다. 선공으로 검기를 갈기려 했었기에, 나는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곤 급히 몸을 피했다. 그렇게 궤도에서 벗어나자 날 선 바람 소리에 이어 화살촉이 애꿎은 땅을 치는 소리가 들리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한 차례 기합을 내지르곤 대지를 크게 차 올랐다.
펄럭!
얼굴을 스치는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적들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아니,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이미 선두 안으로 들어온 상황이었다. 설핏 시선을 내리자, 나를 따라 고개를 들어올리는 적들이 보인다. 설마 이 정도 도약력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대다수가 놀란 눈초리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비어있는 공간을 확인한 후, 그 상태 그대로 몸을 하강했다. 그렇게 사뿐히 땅에 착지하자, 사방을 둘러싼 서 대륙 사용자들과 그 속에 간간이 섞여있는 부랑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내 옆으로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멍한 눈초리를 보내는 한 명의 남성 미국인이 서 있다.
“Hi.”
그런 그의 눈짓에, 나는 간단한 인사와 목에 검을 꽂는 것으로 화답해주었다. 그리고 놈의 가슴을 발로 세게 밀어 차버렸다.
이어지는, 그리고 이제부터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일 수 없다.
민첩 능력치 98. 이형환위(移形換位). 궁신탄영(弓身彈影). 오로쓰로스 부츠 등등.
내 사용자 정보는 속도에 가장 최적화되어있다. 어지간한 사용자의 동체 시력으로는 쫓아올 수 없는 수준. 그런 만큼 적들에게 약간의 종적이라도 잡을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해서, 나는 반걸음 정도 확보된 공간으로 옮겼다. 그리고 아까 막혔던 능력을 펼치기 위해, 양손에 들린 검을 교차하듯 내려그어 횡으로 길게 휘두른다.
한순간 검에 어렸던 기운은 움직임을 멈춘듯했다. 그러나 곧 폭발적으로 용솟음쳐 오르더니, 칼끝으로 성스러운 빛과 어두운 기운이 한 줄기 흘러나온다. 기운은 휘둘러진 궤도를 따라, 허공에 기다란 곡선을 그리는 잔상을 남기었다.
이윽고 1초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 대기에 그려진 상(像)은 각기 다른 기운을 품은 너울거리는 파동으로 변하였다. 그 상태로 발출하자, 이제 막 달려드려는 적들을 향해 거침없이 쏘아져 나갔다.
촤촤촤촤!
“Whoops!”
“Noooooooo!”
두 파동의 돌진은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깡그리 집어삼켰다. 흰 파(波)는 깔끔하게 잘라나가고, 어두운 파는 게걸스럽게 찢어발긴다. 마력의 파도에 치인 사용자들은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나감과 함께 둔탁한 비명을 질렀다. 공기 중에 뿌려진 붉은 핏물은 아직 남은 잔상에 닿자마자 부서진 낙엽처럼 산산이 흩어진다.
파동의 벌이는 피의 축제를 계속해서 보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은 없다. 나는 바로 궁신탄영의 능력을 발동해 파동이 만들어준 공간으로 튀어 올랐다.
퉁, 배꼽이 쏠리는 느낌과 함께 이번엔 금빛 머리칼을 갖고 있는 미국인 여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은 제법 가련해 보였지만, 나는 지체 않고 상단으로 검을 찔러 들었다.
푹!
칼리고 아브락사스는 목젖에 부드럽게 꼽혔다. 미처 반응할 생각도 못했는지 여인의 눈이 일순 동그래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세게 비틀어 뽑아내려는 순간, 등뒤로 정신 없는 소란에 묻힌 미약한 고함소리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검을 마저 뽑는 것과 동시에, 보지도 않고 ‘빅토리아의 영광’을 휘둘렀다.
“Catherine…! Keuak!”
꽈드득!
검날에서 뭔가를 거칠게 찢는 감촉이 전해졌다. 흘끗 뒤를 돌아보자 꽤나 두터운 장갑을 걸친 한 사내가 보인다. 그런 사내의 흉갑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거칠게 찢어 뜯겨진 상태였다.
이 찰나의 순간, 나는 방금 전 베어 넘긴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눈동자에는 강한 불신이 서려 있고, 입은 벙긋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 죽은 여인과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지. 복수를 하려고 뒤를 노리려 했던 모양이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겨우 한 호흡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첫 일격으로 만들었던 혼란도 잠깐. 곧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살기의 바늘에 피부가 따끔거린다. 이형환위를 사용하려면 사정거리 내 빈 공간을 찾는 게 필수였기에, 나는 물샐틈없는 전장의 한복판을 신속하게 훑었다.
약간의 틈이라도 있으면 된다. 물론 이 전장 내에 한정하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내가 목표로 하는 정령술사와 최대한 동선을 겹치게 할 것.
적들을 일일이 상대할 수는 없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암살이었고(사실상 이제 와서 암살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최대한 신속하게 죽이고 빠져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빠져나가기 힘들어질 테니까.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다행히 비어있는 공간을 찾은 순간, 나는 주저 않고 마력을 일으켰다.
팟! 팟! 팟!
능력을 세 번 연달아 발동했다. 그 동안 눈을 세 번 깜빡였는데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눈앞의 풍경이 변하였다.
이윽고 다시 능력을 발동하려 공간을 찾는 순간, 나는 다급히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섬뜩한 소리를 동반한 한 자루 단창이, 코앞을 살짝 스치어 지나간다.
피피피피피핑!
그와 동시에 들리는 여러 발의 화살소리.
‘미친놈들.’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재빠르게 창을 쳐내었고, 이번엔 반대로 몸을 굽혔다.
물론 노블 미스릴 셔츠나 내구를 따지면 설령 몇 발 맞아도 어느 정도 견딜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마 이러한 난전 상황에서 화살을 쏠 줄은 몰랐기에, 어디 한 번 아군의 화살에 당해보라는 심보가 생겨버렸다. 물론 화살이 길을 만들어주리라는 일말의 기대도 겸사겸사 섞여 있었다.
이윽고 화살비가 곧바로 등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간 이후, 나는 곧바로 몸을 피었다. 그리고 기대가 어긋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나간 화살은 아군을 꿰뚫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엉거주춤 멈칫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한 바퀴 빙글 돌아 다시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궁수 전용 유도(Homing) 능력이 깃들어있는 모양이다.
“쯧.”
나는 가볍게 혀를 차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리고 아브락사스를 하늘 높이 던지었다. 그리고 오른팔을 길게 뻗어, 방금 나를 창으로 공격한 사내의 목을 움켜잡았다.
이윽고 수발의 화살이 나를 곧바로 치려는 순간, 나는 지체 않고 그를 끌어와 방패로 삼았다.
푸슉, 푸슉! 푸슉, 푸슉, 푸슉!
한 발 한 발 꽂힐 때마다, 대신 맞아준 사내의 몸이 크게 떨어 울린다. 그래도 절명하지는 않았는지 미약한 떨림이 지속적으로 느껴졌지만,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한 상태였다. 적들은 계속해서 빽빽이 모여들고 있었다.
해서 나는 바로 손을 우그러뜨려 목을 박살내고는, 그를 앞으로 세게 던졌다. 그리고 바로 손을 옮겨 손바닥에 착 떨어져 내린 칼리고 아브락사스의 손잡이를 느끼었다.
여전히 빈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다시 허공으로 뛰어 이형환위로 착지하는 방법이 있지만, 적들이 정신을 차린 이상 위험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허공에 오른 이상 원거리 공격은 더욱 집중될 것이고, 만에 하나 허공에서도 발을 디딜만한 공간을 찾지 못할 경우 상황은 굉장히 난감해진다.
‘할 수 없지.’
아주 짧은 동안, 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직 여력은 남아있다. 남아있다 못해 충만한 상태였다. 그러니 벌써부터 도박을 감행하기보다는, 한 번 할 수 있는 데까지 활로를 만들어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정령술사에 도착하기 전까지 최대한 아껴두려 했지만….
나는 결국 빅토리아의 영광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리고 맹렬히 돌진하여 검에 잠재된 능력 ‘검 빛’을 발동했다.
우웅!
그러자 일순 빅토리아의 영광이 찬연한 빛을 내뿜는가 싶더니.
챙챙챙챙챙챙챙챙챙!
이내 검의 형상을 띤 9줄기의 빛이 청명한 검음을 내었다.
이윽고 검 빛은 앞을 가로막는 사용자 9명의 목에 정확히, 그리고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 작품 후기 ============================
저번 후기에 말씀 드렸던 대로, 다음 주 수요일 업데이트를 일요일 자정으로 당겼습니다.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네요. 하하.
그럼 다음 주 월, 화, 수, 목, 금요일은 중간고사의 영향으로 휴재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10월 19일(토요일)부터 일일 연재를 재개하도록 할게요. 🙂
독자분들 모두 행복한 한 주 보내세요! 토요일에 다시 만나요! |ㅇ3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