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61
00460 선택. 대 영웅? 아니면 마그나카르타? =========================================================================
마그나카르타의 부탁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우선은 걸려있는 봉인을 되돌린다. 그리고 봉인을 되돌리는 과정에서 길을 틀어 영혼이 몸 안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한 마디로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관에 동결돼있는 대 영웅의 육체를 해동한 후, 자신과 대 영웅의 영혼을 차례대로 넣어달라는 소리였다.
그 영혼이란, 지금 눈앞에 동동 떠 있는 조막만 한 구체였다. 검은빛과 하얀빛을 띠고 있던 두 개의 구체. 이게 바로 마그나카르타와 대 영웅의 영혼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마그나카르타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인간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
대 영웅의 몸을 차지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 대 영웅에게 복수를 하겠다.
마그나카르타는 대 영웅의 육체에 자신의 영혼을 먼저 넣어준 후, 대 영웅의 영혼을 추가로 넣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말인즉슨 사실상 육체의 주인은 대 영웅이었으나, 마그나카르타가 먼저 들어감으로써 육체의 지배권을 획득한다.
그러면 두 번째로 들어간 대 영웅은 어떻게 될까? 바로 집을 빼앗긴 세입자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영면에 들고 싶다.
생각해보면, 일련의 과정은 인간의 육체에 용의 영혼이 들어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서로의 파장이 맞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또한 한결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육체와 영혼은 서로의 파장이 맞는 방향으로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 즉 졸지에 세입자 신세가 됐으나, 대 영웅의 영혼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육체의 지배권을 되찾아오려 안간힘을 쓸 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그나카르타도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이러한 과정. 즉 파장이 맞지 않는 영혼이 지속적으로 머무르고 서로 주도권을 찾으려 싸우는 동안, 대 영웅의 육체는 견디지 못해 균열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 결국에 남은 길은 하나.
바로 사망이다. 육체가 사망하면 영혼이 승천하게 되니, 결국 이게 바로 마그나카르타가 말한 영면이었다. 어떻게 보면 대 전쟁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는 주도권 싸움이라고나 할까.
“하나, 하나, 둘, 셋, 다섯….”
나는 마그나카르타가 말해준 대로 왼쪽부터 차례대로 구슬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총 일곱 개의 구슬 중 다섯 번째 구슬을 다섯 번 누르고 나서야 손을 멈추었다. 아직 누르지 않은 두 개의 구슬이 있기는 했지만, 마그나카르타가 절대 손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한 터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천천히 양손을 들었다. 이제 남은 일은 관의 손바닥 형상에 손을 대고 마력을 주입하는 것. 곧 차가운 벽돌의 감촉을 느끼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자, 우뚝 세워져 있는 비석의 모습과 홀을 가득 메우고 있는 마법 진이 보인다.
사실 구슬을 누르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이미 대 영웅이 모든 조건이나 준비를 해놓은 상태라고 하니, 나로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일.
지금쯤 부르르 떨고 있을 대 영웅에게 일말의 감사를 표하며, 나는 힘껏 마력을 일으켜 관으로 흘려 넣었다.
그러자 칙칙한 빛을 띠던 마법 진에 곧바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마 구슬을 눌렀을 때부터 모종의 장치가 작동해서 그런지, 마력을 부여하자마자 삽시간에 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후르르르르르르륵!
반응은 예상보다 거칠었다. 내가 서 있던 관을 중심으로, 초록빛을 띤 일곱 갈래의 불길이 일어나 각자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한없이 뻗어나가던 초록빛 불길이 멈춘 것은, 마법 진의 끝 방향에 세워진 비석에 다다랐을 때였다. 불길을 받은 일곱 개의 비석이 순식간에 초록빛으로 물들여진다.
웅웅웅웅웅웅웅웅!
이어서 비석은 거센 진동음을 토해내며 찬연한 옥빛을 내뿜었고, 곧 한 차례 커다란 방전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꽈꽝!
귀를 크게 울릴 정도의 폭음을 터뜨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천장이 뚫려있기에 망정이지, 홀이 밀폐된 공간이었다면 후 폭풍이 장난 아니었을 것이다.
이윽고 폭음 후에 볼 수 있었던 광경은, 한층 크기를 키운 초록색 불길이 비석에서 되돌아오는 현상이었다.
파지직! 파지지직!
금세 중심에 도착한 불길은 삼키듯이 관을 휘감아 버렸다. 그러자 한순간 초록색 스파크가 크게 튀어 오르더니, 이내 빛이 둥글게 퍼져나가며 바닥에 그려진 각인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치 거푸집에 쇳물을 붓는 것처럼, 내가 서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범위를 넓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관도 이러한 현상에 동조하듯이,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며 부르르 진동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법 진 전체가 초록색으로 밝혀졌을 때였다.
“헉.”
일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말았다. 관에 대고 있던 손바닥에서 느닷없이 화끈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비단 손뿐만이 아니었다. 관 전체가 가열된 듯, 내가 서 있는 주변에도 뜻 모를 후끈후끈한 기운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하여 자세히 관을 들여다보자 곧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의 뚜껑이라 생각되는 부분의 바로 아래에 길게 그어진 틈이 있었는데, 그 틈에서 물이 줄줄 새어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대 영웅의 육체가 동결상태였다고 했던가? 그 생각을 떠올리자 바로 저 물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 대 영웅의 육체를 감싸던 얼음이, 마법 진에서 일어난 불길에 녹아 흘러나오는 물일 것이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한순간 관이 거세게 흔들림과 함께 형상에 접착돼있던 두 손이 툭 떼어지는 걸 느꼈다.
여기까지는 마그나카르타가 말한 대로였다. 나는 빠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였다. 여전히 앞쪽을 주시하고 있던 찰나, 이리저리 흔들리던 관 뚜껑이 갑자기 활짝 열리는 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찰랑, 찰랑!
물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관의 안쪽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흡사 무언가에 잡혀 끌려 올려진 것처럼 축 늘어진 육체가 허공으로 둥실둥실 떠오른다.
드디어 나왔다. 나는 마침내 대 영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생전에 사용한 무구를 그대로 착용한 상태라, 몸은 갑옷을 비롯한 장비들로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사내가 그녀라 밝혔듯이 보이는 대 영웅의 얼굴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눈은 감은 상태였지만, 가늘고 긴 눈썹을 보니 눈동자도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백한 코밑으로는 얼음 빛을 띠는 입술이 보였고, 그 아래로 보이는 턱은 갸름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인상은 전체적으로 무표정해 보였으나, 폭포수 같은 은빛 머리칼과 부분부분 드러난 물기 젖은 피부가 새하얗다. 거기다 몸에 걸친 반 갑옷마저 옅은 은빛을 내뿜고 있어,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의 성스럽고 거룩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튼 꽤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는 있었지만, 감상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거의 막바지에 이른 상태이기도 했거니와 이제 내가 다시 움직일 때였기 때문이다.
한 번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은 후.
나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두 개의 구체를 응시했다. 검은 구체와 하얀 구체. 그 중에서,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떠오른 육체를 향해 검은 구체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검은 구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 영웅의 육체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파지지지지지직!
한순간 눈앞으로 눈부실 정도의 커다란 방전이 일어나더니, 비석의 소음 또한 더욱 커져 주변을 가득히 메웠다.
그와 동시에 대 영웅의 육체가 심하게 요동치며 환한 빛이 휩싸였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이어서 쉴 틈도 없이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되었다. 은은한 빛이 흐르던 은빛 머리칼이, 점차 연한 붉은빛을 띤 짙은 칠흑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머리카락이 완연히 칠흑 색으로 물들었을 즈음.
파직, 파지직!
거센 불꽃을 튀기던 스파크가 약간이나마 잦아들었다. 그러더니, 고운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고 있자, 이내 두 눈이 번쩍 뜨이는 것과 함께 심유한 빛을 뿌리는 검은색 눈동자 드러났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마그나카르타의 성공을 예감할 수 있었다.
가장 난관이라 여겼던 영혼의 정착에 성공했으니, 이제 적어도 팔부능선은 넘은 셈이다.
그윽한 눈동자와 마주하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할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인은, 아니 마그나카르타는 두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남은 구체 하나를 마저 육체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나서 바로 몸을 돌려 클랜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두 영혼이 맞부딪쳐 거대한 마력 폭풍이 일어날 예정이기에, 가까이 있는 것보다는 최대한 거리를 떨어트리는 게 나으리라.
그 와중에도 어떻게 피할 생각은 했는지, 클랜원은 다들 마법 진에서 최대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얼굴들이 모두 똑같다. 멍하니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게, 내가 다가가자 하나같이 의문에 찬 시선을 쏟아내었다.
“기, 김수현.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역시나 호기심의 여왕인 비비앙이 첫 말문을 떼었으나, 나는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미 마그나카르타와 입을 맞춰 논 터라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아씨! 알려줘! 궁금해 죽겠단 말이야!”
그래도 여전히 칭얼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와 나는 앞을 가리켰다.
꽈꽝!
그러자 그 순간, 공교롭게도 다시금 고막이 얼얼할 정도의 굉음이 홀을 울렸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가 다시 쳐다보자, 마침 막바지에 다다른 해방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둥글게, 빙그르르 돌며 허공으로 떠오르는 대 영웅의 육체. 그 육체의 주변으로 수많은 포물선을 그리며 다투고 있는 검고 하얀 빛 줄기들.
두 영혼은 처음에는 격렬하게 싸우는 듯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얀 빛 줄기가 서서히 사그라져 잔상만을 남기고, 검은 빛 줄기가 차차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종래에는 대 영웅의 육체가 검은 빛 무리에 완전히 먹혀 들었다. 대 영웅이 원래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미리 신체를 차지한 마그나카르타가 승리했다.
한 마디로, 이제 끝났다는 소리였다.
화아아악!
그렇게 생각한 찰나, 눈부신 빛의 명멸이 시야를 가득히 메웠다.
홀을 빽빽이 메울 정도의 엄청난 빛의 발광에 나는 살그머니 눈을 감았다.
문득 이번 탐험에서는 유난히 눈을 감는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이번 일이 끝나고 머셔너리 하우스로 돌아가게 되면, 고연주에게 눈이 좋아지는 허브 차를 타달라 할 것이라 필히 다짐했다.
그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은 것 같다. 눈동자를 아릿하게 만드는 감각을 느끼며 눈을 뜨자, 가물가물한 시야로 한 검은빛 덩어리가 바닥으로 서서히 내려앉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내 완전히 시야가 회복돼 나는 눈을 크게 치켜 떴다.
어느새 바닥으로 내려온 빛 덩이는, 묶인 실을 풀듯이 가장 위쪽을 시작으로 줄기줄기 빛을 풀어 내리는 중이었다.
곧이어 빛이 모두 흘러내렸을 때.
조금 사그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환한 빛을 내뿜는 중앙 사이로, 비로소 한 여인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흰 갑옷으로 흘러내리는 칠흑 색 머리칼. 그리고 나를 주시하는 칠흑 색 눈동자.
마침내, 마그나카르타가 대 영웅의 육체를 빌어 부활에 성공한 것이다.
마그나카르타는 살그머니 눈을 감았다. 수천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해방된 기쁨을 음미하려는지, 고개를 살며시 젖히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일순 어수선하게 변한 클랜원들이 뭐라 말하는 게 들렸으나,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마그나카르타를 응시했다.
이윽고 빛과 소음이 점차 확연히 가라앉았을 즈음.
차분히 눈을 뜬 마그나카르타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와의 거리를 줄여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비척거리며 힘겹게 걷고 있었으나, 오랜 시간 동결돼있던 점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걸음이었다. 아까 몸을 감쌌던 녹색 불길이 육체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역할을 한 듯싶었다.
마그나카르타는 나와 약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어디선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들이 들렸다.
“김수현. 지금 이게 어찌된 상황인지, 이제 설명을 부탁할 수 있을까.”
앞서 일어난 현상이나, 눈앞 여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아서일까.
항상 침착하던 허준영도 이번만큼은 긴장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안될 것은 없다. 나는 머리를 한 번 끄덕인 후 마그나카르타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내 신호를 받은 마그나카르타가 부드러이 웃어 보인다.
그때였다.
스르릉, 챙!
휙!
한순간 청명한 검음이 울리더니 마그나카르타의 신형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손에는 성검으로 보이는 무구가 쥐어져 있었다.
아직 몸 상태가 불완전해서 그런지 그렇게 위력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면 내 목이 꿰 뚫릴 것은 두 말할 여지도 없을 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마그나카르타의 공세에는 살기가 섞여 있지 않았다. 또한 내 가슴속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하얀 빛이 새어 나오는 중이었고, 사실 굳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푹!
2초 후, 살을 부드럽게 파고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몸에서 난 소리가 아닌, 마그나카르타의 몸에서 난 소리였다.
흘끗 시선을 내려다보니, 종이 한 장이 들어갈 틈만을 남긴 채 멈춰선 흑색 검이 보였다. 어떻게든 내 목을 뚫으려 힘을 주는지 검 끝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하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 더는 전진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는 차분히 가슴을 쓰다듬었다. 이로써 마그나카르타의 서약을 담은 계약의 증표가 제대로 발동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시선을 올리자, 어느덧 바로 앞에서 우뚝 멈춘 마그나카르타가 보였다. 그리고 그런 마그나카르타의 몸 주변으로 너덧 개의 병장기들이 싸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목에는 허준영 특유의 길쭉한 검이 비스듬히 닿아있고, 남다은의 설아와 차소림의 아르쿠스 창은 양다리를 겨누고 있었다. 내 목에도 서늘한 감각이 느껴지는 게 선유운이 어깨 위로 화살을 걸친 듯싶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옆으로 돌아갔는지, 유정이 붉은색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마그나카르타의 옆구리를 깊숙이 찌르고 있었다.
“콜록!”
곧 거센 기침을 토해내는 마그나카르타.
가슴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점차 사그라지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굳이 이렇게 확인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콜록! 보, 보다…. 후우…. 보다 확실한 믿음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나저나…. 좋은 부하들을 두셨습니다? 설마 정말 찌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요. 콜록, 콜록!”
차분한 대화가 오고 가자 클랜원들의 의문에 찬 눈길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내 겨누고 있던 무기를 하나하나 걷어내 주자 마그나카르타는 옆구리를 쓱 문지르며 몇 걸음 물러섰다.
잠시 후, 숨을 고른 마그나카르타가 고운 미성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로써 제 말이 진실임은 입증했습니다. 그럼 이제, 동료 분들에게 오해를 풀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이쯤 되면 머리 회전이 빠른 클랜원은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섭게 쏘아 보내는 시선은 여전했다.
이제야 진실을 입증하는 방법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는지, 마그나카르타는 어깨를 으쓱이며 검을 집어넣었다.
“제 이름은 헬레나 루 에이옌스.”
그리고는 양손을 느릿하게 내리더니 살며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카트라츠 최후의 별이었으며, 대 영웅이라 불리었던 여인입니다.”
*
알카트라츠 최후의 별, 대 영웅 헬레나 루 에이옌스.
사실대로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은, 마그나카르타의 특별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대 영웅 행세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 큰 상관은 없기에 허락해주었다. 차후 클랜 생활에 적응하려면 적어도 마그나카르타보다는 대 영웅이 나을 테니까(하여 나 또한 앞으로 대 영웅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약간의 도움을 주기 위해, 나는 대 영웅의 부활을 내가 선택한 것으로 돌려주었다. 자신의 죄를 알고 참회하려는 대 영웅을 내가 살살 구슬려 부활시켰다고 각색한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자, 클랜원들은 그제야 약간 누그러진 시선으로 헬레나 루 에이옌스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하는 클랜원은 있었으나 클랜 로드의 결정에 극렬히 반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비비앙이나 사샤도 처음부터 우리와 좋은 인연을 맺었던 건 아니었다. 더구나 계약의 증표로 서약을 맺었으니 무슨 걱정이 있을까?
아까 나를 공격한 것은 단순한 계약의 확인 절차에 불과했다고 해명하자, 클랜원들은 대체로 수긍한 낯빛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역시나, 클랜원들 또한 홀 플레인의 사용자였다. 마지막으로 염원의 비석으로 이야기를 마친 순간, 다들 기대 어린 눈빛으로 서로를 번갈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이제 네가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군.”
“물론입니다. 혹시 아까 여섯 번째 구슬과 일곱 번째 구슬을 건드셨는지요?”
“전혀.”
“그러면 됐습니다. 발동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그동안 동료 분들에게 간단한 설명이라도 해주시길.”
이제 몸 상태가 상당 부분 돌아왔는지, 말을 마친 헬레나는 휙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클랜원들이 삽시간에 나를 에워싸 반짝반짝 빛나는 시선을 보내었다. 그것은 얼른 말해달라는 무언의 압박….
“저기…. 오빠.”
그때.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시선을 돌리자, 고개를 갸웃하는 한별이 보였다.
“왜?”
“약속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멋대로 부활시킨 것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는데, 약속이라고 함은 꼭 서로 거래를 했다는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려 애쓰며,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설득했거든. 솔직히 영혼들의 반응에 대해서 조금 거짓말을 했어. 처음에는 워낙 죄책감이 심해서…. 아무튼 나중에 맹세의 검으로 한 번 만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직접 사과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거든? 그러니까 구미가 당긴 모양이더라. 그래서 도와주는 대가로 염원의 비석을 발동하게 해달라고 한 거야.”
스스로 말하면서도 구멍이 많은 거짓말이라고 느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거 그냥 말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일단은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튼 마그나카르타, 아니 헬레나와 약속한 것도 있으니까.
그러나 한별은 여전히 납득 못했는지 살며시 아미를 찡그렸다.
“…그래요? 하지만 저는 왠지 모르게 이상해요. 행동이나 태도가, 전혀 죄책감을 가진 사람으로 안 보여요.”
“김한별. 그만하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때 허준영이 앞으로 나서 한별의 말을 제지했다. 나는 쓰게 웃었다. 요즘 들어 연기력이 한참 떨어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허준영이 가장 먼저 눈치챈 것 같았다.
한별은 쌀쌀맞은 눈빛으로 허준영을 쳐다봤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입 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그나카르타…. 젠장.
헬레나. 루. 에이옌스. 에게 들은 대로 염원의 비석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한 사용자당 오직 한 번의 기회만 부여된다는 것. 그리고 개인의 욕심이 최우선으로 앞서있을 경우 염원이 발동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이건 좀 애매한데요….”
“개인의 욕심이라니. 그런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자 설명을 들은 클랜원들은 모두 난색을 표했다.
사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딱히 더 해줄 말은 없었다. 소원 자체가 개인의 욕심으로 비롯되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욕심을 제한해버린다면, 과연 빌 수 있는 소원이 있기나 할까?
그때였다.
꾸르릉, 꾸르르릉!
모두가 염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찰나,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얼른 중앙으로 몸을 돌아보자, 어느새 마법 진의 중앙으로 이동해있는 한 비석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석을 중심으로, 남은 여섯 개의 비석이 육망성을 이루고 있었다.
이어서 헬레나가 팔을 움직인 순간, 마력이 흐르는 웅혼한 소리와 함께 가운데 비석의 정 중앙으로 초록빛이 둥글게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비석 전면을 물들인 초록빛은, 흡사 물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고요하게 일렁이는 풍경을 보였다. 마치 소환의 방으로 들어가는 포탈을 보는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염원의 비석이 발동했다.
============================ 작품 후기 ============================
아이고. 드디어 염원의 비석까지 왔네요. 저야말로 팔부능선을 넘었습니다. 하하하.
솔직히 인원수가 적다면 모를까. 저 모든 인원이 하나하나 어떤 염원을 비는지 적는 건 무리일 것 같고요, 한 서너 명 정도면 조명할 계획입니다. 남은 클랜원은 그냥 간단히 염원의 결과만 적을 예정이고요.
그럼 여기서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작성해볼까요?
1. 또 여성이냐?!
Sol ) 하지만 정신은 남성입니다.
2. 아무튼 육체는 여성이잖아. 얘도 공략 대상이지? 김수현 주변에 여성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Sol )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용은 그냥 부려먹으려고 데려왔지, 전혀 공략의 대상이 아니에요. 이미 수명도 정해져 있는걸요.
3. 뭐야. 그러면 왜 살려낸 거지?
Sol ) 여러 군데 쓸모가 있거든요. 강철 산맥을 앞두고 머셔너리 마법사들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도 있고, 마법 도시 마지아와 관련해서 여러 문제들도 해결해줄 수 있고요. 물론 전력 증강에도 도움이 되겠지요.
4. 그럼 용에 대한 베드신의 계획은?
Sol ) 절대로, 네버 없을 겁니다. 농담조로 성적인 내용이 나올 수는 있어도, 실제로 쓸 가능성은 0%에 수렴합니다. 그런 내용을 쓴다고 상상해보면, 아무래도 정신체가 남성이다 보니 저도 극렬한 거부감이 일 것 같아요.
5. 잠깐만. 타로 카드에 용이 있지 않았나?
Sol ) Yes. 그렇습니다. 다만 그 용은 이 용이 아닙니다. 후후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