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30
00529 큰 결정. =========================================================================
마침내 100일이라는 기나긴 장정을 마치고, 사용자 아카데미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료식의 막이 올랐다.
애초 홍보 주차에 확실한 밀어주기를 약속했던 만큼, 중앙 관리 기구는 공약을 나름 잘 지켜주었다 볼 수 있었다. 교관으로 참가한 클랜들에 한해서 모두에 공평한 홍보 기회를 부여해주었으니.
그러한 기회는 수료식 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중간중간 시간만 잡아먹는 코너를 과감히 삭제 및 축소하고, 새로운 코너를 개설한 것이다. 새로운 코너의 이름은 질의 문답으로, 교육생들이 클랜에 관해 여러 궁금한 점을 스스로 묻게 하는 목적으로 개설된 코너였다.
결국에는 홍보 기회를 한 번 더 마련해주겠다는 소리였으니, 교관들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각 클랜에 배당된 코너에는 12분이라는 시간제한이 있고, 그러한 점을 고려하면 애초 처음의 수료식과 끝나는 시간은 엇비슷하다. 그렇다면 지루하게 기다리기보다는 나름 알차게 보내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중앙 관리 기구에서 추가로 내건 조건은, ‘질의 문답’ 코너의 개설을 만장일치로 통과하게 해주었다. 그 조건이란 바로….
“예. 우리 한울 클랜은 아직은 그저 그런 클랜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재에 불과합니다. 비록 아직은 작은 클랜에 불과할지라도,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클랜이라 믿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와 함께 클랜을 발전시킬 뜻있는 분이 있다면, 손을 들어주십시오.”
대 강당. 객석에는 중앙 관리 기구 인사들과 교육생들이 앉아 무대를 응시하고 있다. 중앙 무대에는 통통한 체형의 사내가 애처롭기 짝이 없는 얼굴로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열렬한 토로에도 불구하고 객석의 반응은 0%. 정확히는 별 관심이 없다고나 할까.
객석을 둘러보는 사내의 얼굴에 미묘한 절망감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입을 지그시 깨문 사내가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한다. 그리고 털썩 무릎을 꿇으며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한울 클랜은 여러분들을 꼭 모시고 싶습니다!”
이윽고 사내의 후면에 서 있던 일련의 사용자들도 통통한 사내를 따라 무릎을 꿇는다.
웅성웅성.
비로소 객석에서 일말의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의 어이없다는 반응으로 결코 좋은 호응이라 볼 수 없다. 객석의 반응을 들었는지 사내의 얼굴에 참담함이 깃들었다.
기실 사내의 사정이야 어찌됐든 방금 행동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번 코너는 한 마디로 정리해, 교육생들에 과시하기 위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교관 입장에서.
지금 사내의 후면에 있는 사용자들만 봐도 그렇다. 저들은 한울 클랜 소속 사용자들로 이번 코너를 위해 특별히 초청된 사용자들이다. 즉 교관으로 들어온 사용자만이 아니라, 소속 클랜원들이 함께 홍보하는 자리인 것이다. 그게 바로 중앙 관리 기구에서 내건 조건인 ‘코너에는 교관을 제외한 8명 이하의 소속 클랜원들의 입장 또한 허가한다.’였다.
그런 만큼 과시 혹은 화려한 퍼포먼스를 통해 우리 클랜은 이렇다는 걸 보여주어야 하는데, 사내는 오히려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진심을 통한 호소로 교육생들의 마음을 움직일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썩 좋은 방법은 아닌 모양.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으니까.
결국 통통한 사내를 비롯한 9명의 한울 클랜원들은 쓸쓸히 퇴장하고 말았다. 그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간 후, 이어서 중후한 음성이 대 강당을 울린다.
– 다음 질의 문답 코너에 나올 클랜은 머셔너리 클랜입니다. 모두 정숙해주십시오.
그 순간 객석에 흐르던 기류가 갑작스럽게 일변했다. 지루했던 기류는 한순간 사그라지고 호기심과 기대감이 대 강당을 가득히 메운다. 교육생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쭉 빼며 중앙 무대를 응시했다. 방금 한울 클랜 때의 태도와는 극명하게 비교되는 태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냉정히 말해서 한울이 볼 것 없는 쭉정이라면, 머셔너리는 현재 북 대륙 내 첫손으로 꼽히는 클랜이었으니까.
더구나 다른 클랜들과는 달리, 머셔너리는 단 한 번 홍보한 적 없으며 교육생들의 영입에도 열을 올리지 않았다. 그런 만큼 머셔너리가 도대체 어떤 클랜인지,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일체의 홍보를 금지한 김수현의 선택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코너에 한해서 아주 탁월했다고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저벅저벅. 저벅저벅.
저벅저벅. 저벅저벅.
– 머셔너리 클랜이 입장합니다.
이윽고 발을 묵직하게 내디디며 잇따라 걷는 소리가 들리고, 동시에 증폭된 음성이 머셔너리 클랜의 입장을 알렸다.
곧 가장 선두에 선 사내를 시작으로 총 8명의 사용자가 무대로 걸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3명의 사내와 5명의 여인.
방금 한울 클랜원들과는 뭔가 다른 기운이 느껴진 것일까? 무대를 바라보는 교육생들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상태였다. 오죽하면 지금 대 강당에 흐르는 정적이 엄숙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그에 반해, 천천히 몸을 돌려 교육생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은 담담하기 그지없다. 되레 태연한 여유가 넘쳐흘러 보일 정도. 하지만 오만하게 보이지 않는다. 가슴 상단에 각인된 붉게 빛나는 문양은, 그들이 머셔너리 클랜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윽고 김수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정하연이 반걸음 따라 나서며 주문을 외웠다. 음성 증폭 마법이었다.
– 반갑습니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이번 코너에서 총 8명의 클랜원과 여러분께 인사드리게 됐으며, 지금부터 12분 동안 질의 문답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거창한 미사여구 없는 매우 간단한 인사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12분이라는 시간에 비해 물어볼 것은 산더미였으니까.
교육생들은 앞 다투어 손을 들었다. 이내 김수현이 한 명을 가리키자 지목받은 사내가 바른 자세로 몸을 일으킨다.
“질문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부로 사용자가 된 조동현입니다.”
– 반갑습니다. 그럼 사용자 조동현. 어떤 질문이지요?
“예. 다름이 아니라 14주 교육을 받는 동안 머셔너리 클랜과 클랜원들의 이름을 몇 번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림자 여왕 님 등등 말이지요. 사실 조금 어긋난 질문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궁금합니다. 혹시 지금 무대에 보이는 분들이 누구신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 어렵지 않네요. 질문을 허락합니다.
사내는 그 모든 말을 아주 빠른 속도로 말했고, 김수현은 곧바로 허락했다. 그리고 가장 왼쪽에 서 있는 여인을 가리킨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 우선 방금 조동현 교육생이 언급한, 그림자 여왕 고연주입니다.
고연주는 나른히 웃으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조동현을 향해 살며시 눈을 감아 보이기까지. 그 모습에 조동현을 비롯한 여러 사내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으나, 김수현은 전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 검후 남다은입니다. 검사 계열이라면 몇 번 들어봤을지도 모르겠군요.
남다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 관심도 없다는 양 그저 냉랭한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을 뿐.
– 신궁 선유운. 섬광 차소림입니다.
선유운과 차소림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둘이 원체 무뚝뚝한 성격이라 그런지 역시나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 그리고…. 흠. 나머지 네 명은 여러분들도 아실 테니 이만 생략하도록 하죠. 이상입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머지 네 명이라 함은 안현, 안솔, 정하연, 신재룡이었다. 이미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활동했던 만큼 딱히 알려줄 필요가 없었던 탓이다.
질문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조동현은 아직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저 한껏 붉어진 얼굴로 처음 소개한 고연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 결국 옆에 앉은 여인이 툭 건드리자 그제야 황급히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첫 번째 질문이 끝난 후. 김수현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자 교육생들은 자동적으로 손을 들었다.
그때였다. 한 명 한 명 미끄러지듯 지나가던 시선이 갑작스럽게 정지했다. 누군가를 정확하게 응시하는 김수현의 눈동자에 강한 이채가 스친다. 이내 김수현이 한쪽을 가리키자 한 늘씬한 여인이 살랑 몸을 일으켰다.
“질문을 받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저는 오늘부로 사용자가 된 제갈 해솔입니다.”
– …예. 반갑습니다. 그럼 어떤 질문인가요?
“음~. 사실 조금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릴게요. 제가 궁금한 건 바로 머셔너리 클랜의 인원에 대해서 에요.”
– 인원?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 그런지 김수현의 눈 꼬리가 올라갔다. 제갈 해솔은 잔잔히 말을 이었다.
“네. 인원이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머셔너리가 현재 북 대륙 내 최고의 클랜이고, 또 그렇게 들어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따금 다른 클랜의 교관님들은 머셔너리는 적은 인원수가 가장 큰 문제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명백한 한계가 있는 클랜이라 그러시던데….”
그 말이 나온 순간 대 강당이 크게 술렁였다. 방금 발언은 어찌 보면 고발이나 다름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갈 해솔은 전혀 아랑곳 않은 채, 오히려 예쁘게 눈웃음치며 질문을 마쳤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머셔너리 로드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수현이 지그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인지, 이미 코너를 마치고 내려간 교관 중 몇몇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을 내비친다. 한 서너 명 정도가 김수현의 눈치를 살피면서 한편으로는 제갈 해솔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지금 심정으로는 찢어 죽이고 싶지 않을까.
– 질문을 허락합니다.
그때였다. 어수선한 소란 속에서 말한 김수현이 차분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음성 증폭 마법의 범위를 벗어나 정하연이 따라오려고 했으나, 김수현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 머셔너리가 현재 최고의 클랜 중 하나로 불리는 이유는 사용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많은 사용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무대의 가장 앞쪽까지 걸어간 김수현이 나직이 말했다.
“여기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소란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김수현은 곧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간혹 어떤 사용자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합니다.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수에는 장사 없다고. 하지만 반대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잘 키운 사용자 하나, 열 사용자 부럽지 않다.”
비록 한없이 낮으나 마력이 충만이 들어있는 목소리였다. 교육생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김수현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시크릿, 레어 클래스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갖은 고생을 해 100명의 보통 사용자들을 모아봤자, 수준 높은 마법사 5명만 있어도 1초 만에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게 현실이죠. 그래서 클랜 내 핵심 사용자의 수준과, 그들을 받쳐줄 수 있는 장비 등의 수단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김수현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마치 누구보고 들으라고 하는 듯이.
그것은 비단 교육생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다. 코란 연합 때부터 시작된 인원 지적을 하는 사용자들과 항상 인원을 늘리자고 주장하는 클랜원들.
“그래서 머셔너리 클랜이 잠재성이 높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될 수 있는 사용자들을 원하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사용자가 아닌, 언제 어디서라도 살 수 있는 사용자. 그걸 위해 우리는 철저히 가르치고 지원해 핵심 사용자들만으로 클랜을 구성합니다.”
그 모두를 대상으로 한 김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클랜원이 많으면 장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이 많아지니 없을 리가 없죠.”
“그러나. 우리와 비슷한 평가를 받는 대형 클랜들처럼 인원을 대폭 늘릴 계획은, 앞으로 결단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머셔너리는, 머셔너리만의 창설 목적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들의 말이 틀리다는 게 아닙니다. 다를 뿐입니다. 저는 머셔너리만의 방식을,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한 명이 열 명 백 명을 당해낼 수 있는, 적은 인원으로 열 배 백 배의 효율을 보일 수 있는, 그런 클랜. 소수 정예라 함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김수현의 말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제갈 해솔이 다시 손을 번쩍 들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채 말이 나오기도 전에, 흘끗 바라본 김수현이 선수를 쳤다.
“그렇다면 궁금하시겠죠. 그게 과연 가능하냐고.”
제갈 해솔은 입을 다물었다.
“예. 가능합니다. 지금껏 머셔너리가 걸어온 길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머셔너리는 어느 클랜보다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탁 까놓고 말해서, 의뢰 좀 받고 유적 좀 발굴한 클랜입니다. 클래스, 재정, 장비 등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클랜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한 앞서 말한 것들은 제외하고, 우리에게는 교육생들을 핵심 사용자로 성장시킬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수단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어느 클랜도 가지지 못한 머셔너리만의 고유의 수단입니다.”
안 그래도 김수현의 연설에 빠져있던 교육생들은 하나같이 귀를 쫑긋 세웠다. 사실 교육생들이 클랜을 고르는데 가장 큰 관심사는 클랜의 명성이나 지원 정도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충족하고 있는데, 그것을 앞서는 무언가가 더 있다?
교육생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며 김수현은 차분히 숨을 골랐다. 이토록 말을 길게 한 건 실로 오랜만이라 약간은 숨이 찬 탓이다.
그렇게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김수현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이번 수료식을 마치면 4 능력치 포인트를 받게 됩니다. 포인트의 중요성은 다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해보면. 머셔너리는 교육생, 즉 신규 사용자에 한해 2 능력치 포인트를 추가로 지급할 수단이 있습니다.”
2포인트 추가 지급. 분명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나온 순간, 대 강당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적은 곧 미약한 술렁거림을 시작으로 요동쳤다. 흡사 폭풍이 다가오기 직전의 전야와도 같이.
그리고 바로 그 직전.
김수현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상입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
수료식이 끝났다.
나는 클랜원들에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 지시한 후, 주변을 빽빽이 메운 인파를 헤치며 간신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사실 더 일찍 나올 수도 있었는데 교육생들뿐만 아니라 교관들에게까지 붙잡혀 곤욕을 치른 탓이다.
하기야 나름 이해는 가지만서도. 사용자 아카데미와 견줄 수 있는 용병 아카데미의 설립은 그들로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나 또한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다. 차희영과 진수현은 괜찮다. 이미 모두 얘기를 끝내놓은 상태이니까. 차희영은 이미 안현의 옆에 붙어있는걸 확인했고 진수현은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제갈 해솔은 아직 아니었다. 이스탄텔 로우의 영입 제안에 대한 가부는 오늘 수료식이 끝난 후 결정된다고 했으니, 지금쯤 슬슬 결과가 나와야 정상이다. 과연 승낙했을까? 거부했을까? 아니 그전에 왜 보이지가 않는 거지?
사용자가 많은 것도 있지만, 제갈 해솔이나 한소영이 그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한쪽으로 비껴선 채 계속해서 입구를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걱정이 들었다. 혹시 수송 능력을 사용해서 나간 게 아닐까하는, 나름 가능성 높은 걱정이.
아까 당돌하게도 질문하던 제갈 해솔을 떠올리며 나는 걸음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입구에서 기다리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 마력 감지를 돌리며 찾으려는 찰나였다.
“야! 김수현! 너 여기 있었어?”
간만에 들어보지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시선을 돌리자 무에 그리 급한지. 후다닥 달려오는 한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처형의 공주 연혜림이었다.
“아 드디어 찾았네! 오랜만!”
“연혜림? 네가 왜.”
“어. 다른 게 아니라 한소영이 알려주라고 하는게 있어서.”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연혜림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금세 바짝 붙었다. 그리고 목 부근으로 얼굴을 들이밀더니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갈 해솔 영입 실패.”
그리고 바로 떨어지며 몸을 돌렸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실패했다고?”
“어, 어. 그런데 미안. 나 지금 엄청 급해서. 정신이 없어. 아무튼 확실히 전했다?”
“잠깐만! 그럼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몰라! 얘기 방금 끝냈으니까 여기 있으면 알아서 나오겠지!”
그렇게 외친 연혜림은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제갈 해솔 영입 실패? 그럼 거절했다는 소린가?
그때였다.
우웅.
느닷없이 아까 펼친 마력 감지에 무언가 미약한 마력의 흐름이 걸렸다. 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운이 좋았다. 이내 마력이 이동한 지점을 쫓자, 사용자들이 몰린 입구를 넘어 그나마 한산한 장소에 생겨난 하나의 흔적을 발견 수 있었다.
익숙한 뒤태였다. 길게 흘러내린 생머리와 늘씬하게 뻗어 내린 다리맵시.
여인은 바로 제갈 해솔이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 수송이었는지 그 누구도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감탄할 수는 없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얼른 달리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제갈 해솔이 몸을 돌아보더니 마치 여기 내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양, 정확히 나를 주시한다.
그렇게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 질문에 회답해주셔서 감사해요. 말씀은 잘 들었어요. 매우 인상 깊었어요. 정말로.
머릿속을 가볍게 울리는 미성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멈추고 말았다.
부근에 제갈 해솔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까부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 말인즉슨, 제갈 해솔은 약 80미터의 거리를 넘어 내게 말을 전달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나만 들을 수 있도록.
그러나 어떻게 한 거지라 생각하기도 전.
– 그럼 안녕히. 그때 밤중에 만남은 엄청 즐거웠는데.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윽고 제갈 해솔은 예전 이스터 에그에서 한 공주 인사처럼, 나를 보며 살며시 고개와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바람처럼 몸을 돌려 사뿐사뿐 걸어간다. 내게로 오는 방향이 아닌 정문이 있는 방향으로.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변은 여전히 웅성대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갈 해솔의 모습은 인파에 묻혀 더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그럼 안녕히 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쫓아갈 필요는 없겠지.
사실 망연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이러한 경우를 예상한 만큼 미리 생각해둔 대비책을 실행해야 하는 게 우선이다. 왜냐하면 상대는 제갈 해솔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입구를 나서 최대한 사용자들이 없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품속으로 손을 넣자 연초와 둥글둥글한 구슬이 잡혔다. 통신용 수정구. 그렇지만 여타 수정구와는 달리 거무칙칙한 빛을 내뿜는 수정구로, 오늘 아침 고연주가 가져와 건네준 것이었다.
나는 두 개를 동시에 그러모으며 꺼내들었다. 손가락 틈으로 연초를 끼고, 그 안으로 구슬을 잡는다. 이러면 혹여 다른 사용자가 보더라도 연초를 피우고 있다 생각할 것이다.
이윽고 연초에 불을 붙여 입으로 가까이함과 동시에, 나는 안으로 쥔 수정구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무척 다행히도 통신은 바로 연결되었다.
(아. 또 뭡니까. 머셔너리 로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번에 코란 연합 사건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이내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재빠르게 속삭였다.
“주변에 사람 많다. 헛소리 하지 마.”
어느덧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차분해지려고 애쓰고는 있었지만 목소리는 스스로 들어도 굉장히 심각하다.
그러한 기색을 느꼈는지 투덜거림은 곧장 멈추었다. 이런 일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놈들인 만큼, 곧바로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을 것이다.
나는 연초를 무는 체하며 수정구를 더욱 가까이했다. 물론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손을 최대한 오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세히 설명할 시간 없어. 의뢰는 저번이랑 똑같아.”
(흠. 그렇군요. 그런데 잠시만요. 머셔너리 로드. 최근에 같이 간 창관 말입니다. 정말 죽이지 않았습니까?)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 바로 회답했다.
“그래. 확실히 죽여줬지.”
(그렇죠. 그래서 다시 한 번 가보고는 싶은데, 거기가 어디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혹시, 거기 이름이 뭐였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아. 이제 갓 장사 시작한 곳이라 아직 유명하지는 않아. 그 건물 이름이 아마 해솔이었지? 그때 재갈 물고하는 플레이가 정말 죽여줬는데.”
(크. 그렇군요. 사실 아직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말씀을 들으니까 또 가보고 싶어지기는 하네요. …아무래도 그래야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언제 한 번 같이 가시죠. 언제쯤 시간이 괜찮으십니까?)
“나야 좋지. 지금 당장에라도 좋아. 아니.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그러시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뚝 끊겼다. 마침 왁자지껄 떠드는 사용자 한 무리가 지나가, 나는 연초를 힘껏 빨아들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느새 수정구에서는, 더는 빛이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후. 드디어 사용자 아카데미 파트가 끝났습니다. 물론 완전히 라고 볼 수는 없지요. 하하. 진수현과의 대화 내용은 다음 회에 회상 내용으로 언급될 예정이고, 제갈 해솔의 처리도 다음 회에 나올 예정입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매듭을 지은 것 같아 속이 후련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