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36
00535 두 달 후. =========================================================================
홀 플레인은 총 네 개의 대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동, 서, 남, 북 대륙.
그 중 남 대륙의 최남단에는(물론 미개척 지역은 제외한다.), 요정의 숲이라는 명칭을 지닌 거대한 수림(樹林)이 자리 잡고 있다. 숲의 넓이도 상당하지만,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요정의 숲은 인간이나 괴물들이 살지 않는다.
오직 요정들만이 살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는 숲. 그게 바로 요정들의 왕국으로 불리는 요정의 숲이다.
날은 아직 어스름했다. 짙푸른 구름으로 가려진 탓인지, 하늘에 아직 해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하얀 안개가 뽀얗게 내려앉아 숲을 몽환적으로 휘감고 있었고, 풀잎에 촉촉이 맺힌 이슬이 새벽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숲의 새벽은 몹시 춥다. 이따금 간간이 부는 숲 바람 소리만이 들릴 뿐, 숲은 무척 조용했다.
휘이잉, 휘이이잉.
그때 마침 불어오는 찬바람을 느꼈는지, 수풀에 누워있던 한 여인이 눈을 떠 한두 번 깜빡였다.
곧 느릿한 손놀림으로 풀잎에 맺힌 이슬을 훔쳐 핥아 마신 여인은, 차분히 몸을 일으켜 한쪽 방향을 응시했다. 잠시 후, 희뿌연 안개 속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한 쌍의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개 속에서 나타난 인영은 키가 훤칠하고 귀가 긴 호리호리한 사내였다. 그러나 여인의 귀도 비슷한 점을 고려하면, 사내와 여인이 바로 요정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사내가 적당한 거리를 남긴 채 지그시 응시하자, 여인은 처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로 60일째인가요? 위그드라실의 꽃이 개화한지?”
“그렇지. 정확히 60일째.”
“그렇군요….”
“왜. 아쉽나? 몇 백 년을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코앞에서 여왕의 자리를 놓친 게?”
사내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낮았다. 어찌 들으면 짐승이 낮게 으르렁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여인은 한숨을 가느다랗게 흘리며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아니에요. 저는 그 누구보다 마르가리타의 귀환을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여왕의 자리는…. 애당초 저와는 맞지 않는 자리에요.”
“그런가. 그럼 새로운 여왕의 탄생에 모두가 기뻐하는 지금, 왜 그렇게 슬퍼하는 거지.”
“슬프니까요. 저는 여왕의 공백이 채워지기를 기다렸던 게 아닌, 친우로서의 마르가리타가 생환하기를 바랐으니까요.”
“800년 전 태어난 꽃은 이미 3년 전에 시들었다. 이제 와서….”
“알아요. 이런 감정이 옳지 않다는 건. 하지만 새로운 위그드라실의 꽃이 피어났다는 건, 결국 새로운 여왕이 탄생했다는 소리. 바꾸어 말하면 제가 여태껏 간직하던 마르가리타의 기억을 떠나 보내야 한다는 소리죠. …그것이 저에게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을 주는군요.”
“정신차려. 지금 이런 중요한 때에 그런 인간들이 느낄만한 감정에 휘둘린다는 말인가? 하이로서 실격이다!”
사내의 입에서 고함이 나왔지만 여인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이 맞는다는 듯 고요한 눈으로 사내를 응시할 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니뮤에!”
결국 한동안 여인을 지그시 노려보던 사내는 입을 꾹 닫으며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모든 하이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다시 낮아진 목소리에 여인은 고개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 쓸쓸함이 감돌던 눈동자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모든 하이들이 기다리고 있다고요? 이 시간에?”
“가면 알게 될 일이다.”
“지금 말해줘요. …설마. 새로운 여왕을 찾아 나서려는?”
“아니. 다른 일이야. 남 대륙 인간들이 연락을 보내왔다 하더군.”
이윽고 우뚝 걸음을 멈춘 사내는 반쯤 얼굴을 돌려 여인을 주시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검이 소식을 전해왔다.”
*
화창한 아침.
“이건 좀 어려운데.”
편한 자세로 서 있는 허준영이 뚱한 얼굴로 투덜거린다.
“흠. 그럼 다시 한 번 설명을….”
나는 잠시 턱을 매만졌다가 머리를 갸웃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허준영은 귀찮다는 얼굴로 머리를 흔들고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 설명은 그만. 이건 이해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실행의 문제라고. 아니. 마력 회로의 문제야. 흐름이 꼬이거나 엉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네가 말해준 마력 흐름의 속도를 맞출 수가 없다는 말이다. 내가 무슨 괴물도 아니고.”
“음? 너 그래도 궁신탄영은 꽤 빠르게 익혔잖아.”
“궁신탄영과 이형환위가 같나? 어빌리티 난이도가 비교도 안되니까 이러고 징징대는 게 아닌가. …젠장.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수준인걸 알았다면 애당초 교환하는 게 아니었는데.”
“왜 그래.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니까? 궁신탄영을 2주 만에 익혔으면 이형환위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텐데. 끽해야 4주….”
“네가 4주 만에 익혔나 보군. 미안하다. 6주가 지나도 못 익혀서.”
“…….”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얼마 만에 익혔더라?
그때였다.
“미친. 지금 누구 놀려요?”
옆에서 들려오는 뾰족한 외침에 시선을 돌리자 온몸을 웅크리고 있는 유정이 보였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만, 얼굴에 짜증이 잔뜩 서린 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마치 위협을 인지한 풍뎅이처럼 한껏 웅크리던 유정은 이내 힘찬 기합을 내지르며 상반신을 활짝 펼쳤다.
“핫!”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든 채 만세를 하고 있는 유정만이 보일 뿐.
“핫.”
이내 조용히 따라 한 허준영이 입을 가리며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리자, 유정이 발끈한 얼굴로 거칠게 두 손을 내렸다.
“적당히 쪼개지? 못하고 있는 건 서로 마찬가지인데. 기분 존나 더럽게 만드네.”
“성격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라. 나는 적어도 궁신탄영은 익혔다. …이렇게 말이지!”
그 말이 끝난 순간 허준영이 잔뜩 몸을 웅크리는가 싶더니, 퉁, 발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저 앞으로 멀어져 간다. 그리고 재차 궁신탄영을 사용해 제자리로 원위치 하기까지.
곧 어깨를 으쓱이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자 유정의 두 눈이 사납게 치켜 떠졌다. 하지만 할 말이 없는지 발만 동동 구르다가, 결국에는 나를 쳐다보며 방방 뛰었다.
“아 오빠! 나도 좀 가르쳐줘! 응? 왜 나는 안 가르쳐주고 준영이 오빠만 가르쳐주는데?”
내가 언제?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유정의 성질머리를 알고 있는 만큼 나는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한 번 더 상세히 설명해주려는 찰나, 유정이 온몸을 흔들며 호들갑을 떤다.
“아이. 나도 설명 말고. 저번에 해줬던 거 해줘.”
“저번에 해줬던 거?”
“그 있잖아. 서로 찰싹 붙어서 자세도 잡아주고, 마력 흐름도 이끌어주는 거. 응?”
“…….”
아니 무슨 말을 해도.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서로 찰싹 붙어서 자세를 잡아준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좋은 말 아닌가.
그러고 보니 눈이 묘하게 반짝이는 게, 뭔가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곧 허준영이 “제 2의 치녀 등장인가.”라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와, 나는 바로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오늘 전수는 그만두기로.
“미안한데. 오늘은 그만 가봐야 할 것 같다. 전수는 다음에 해주마.”
“응? 어딜 가? 오늘 아침 내내 봐주기로 했잖아.”
“곧 점심이잖아. 이 정도면 충분히 봐줬지. 그리고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너도 알 텐데?”
“…아. 맞다. 오늘 그날이었지.”
그러자 오늘 어떤 일정이 있는가를 떠올렸는지 유정이 아차 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이내 서운한 빛을 비추는 게 약간 마음에 걸렸으나, 나는 가슴과 허리를 당당히 폈다. 오늘 일정은 나름 중요한 이벤트인 만큼 유정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이윽고 조금 더 연습하겠다는 둘에게 격려를 빙자한 절대 싸우지 말라는 말을 신신당부한 후, 나는 밝은 햇살이 드리운 정문을 나섰다.
“나도 한 번 해볼까. 핫.”
“이 자식이 진짜!”
…목적지는 워프 게이트.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였다.
*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 도착했다.
사방팔방에 흐드러져있는 부스러기나 거의 다 쓰러져가는 건물들. 주변을 둘러보자 처음 공략했을 때와 별다를 게 없는, 여전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번에 한 번 청소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거야 길을 트는 정도에 불과했을 뿐이다.
좋게 말하면 고풍스럽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 누군가 눌러앉아 살만한 곳은 못되었다. 하지만 큰 상관은 없다. 어차피 개방 도시로의 계획을 포기한 만큼 괜한 돈을 들일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 내가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를 방문한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용병 아카데미 때문이다.
근 두 달 전 제갈 해솔과 차희영을 첫 번째 교육생으로 입소시킨 후, 오늘이 바로 대망의 첫 번째 수료식을 거행하는 날이었다.(사용자 아카데미와 용병 아카데미의 교육 기간은 약 40일 정도 차이가 난다.)
잠시 후.
폐허 속에서 홀로 깔끔하고 웅장한 위용을 뽐내는 과거 마볼로의 성채, 현재 용병 아카데미를 바라본 후, 나는 마력 감지를 돌리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1층 로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기실 사용자 아카데미와 비교하면 용병 아카데미가 손색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성채 하나만 달랑 개축하고 아카데미라 부르는 것도 웃기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한 해에 정원이 6명이라는 제한이 걸려있는데, 교관까지 합쳐 10명 내외로 활동할 아카데미를 큼지막하게 짓는다면, 그것 또한 웃기는 일이었으니까.
“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불현듯 마력 감지에 세 명 정도의 기척이 걸리는 게 느껴졌다. 오. 같은 층에 있는 건가?
마침 같은 1층에서 느껴지는 기척이라 나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과거 응접실을 개조한 방의 창을 들여다본 찰나.
“호.”
조금이지만, 감탄하고 말았다.
안에는 앞에서 열심히 강의하고 있는 헬레나 루 에이옌스와 한껏 집중한 얼굴로 듣고 있는 제갈 해솔과 차희영이 있었다. 특히 헬레나는 어찌나 열심히 강의하는지 얼굴과 몸짓을 곁들여 열변하고 있을 정도.
오늘이 수료식이라 설렁설렁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러기는커녕 마지막 날까지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자, 갑작스럽게 마음에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은 나쁘지 않으니까.
그러다 문득 미약한 호기심이 일었다. 도대체 무슨 강의를 하는데 저렇게 연기까지 하며 열심히 하는 걸까?
돌연 궁금한 기분이 들어, 나는 창문을 들여다본 채 한껏 청력을 돋웠다.
“…그래서 저는 외쳤습니다. 아아! 마그나카르타!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심지어 제 몸마저도 바치겠어요!”
…뭐?
아니. 누가 누구를 사랑해?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하지만 마그나카르타는 오히려 저를 더럽다는 눈빛으로 보았지요. 아~. 하지만 이해합니다. 저와 마르나카르타는 적의 관계. 이 헬레나 루 에이옌스는 어쩔 수 없이 인간들의 지휘관을 맡은 몸이라….”
“자, 잠시 만요. 헬레나 교관님!”
“응? 갑자기 왜 그러지요? 차희영 교육생?”
“다름이 아니라 조금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저도 예전에 우리 클랜의 용이 잠든 산맥을 공략한 기록을 읽어본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관심이 깊어져서, 나름 관련 설화도 찾아봤고요. 그런데….”
“지금 내 설명이 기록과 상이하다 이 말입니까?”
“네, 네.”
그러자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헬레나는 혀를 쯧쯧 차며 말을 이었다.
“이런 말이 있죠. 드러난 거짓말은 아름답고, 가려진 진실을 추악하다. 차희영 교육생은 참 순수하군요.”
“…네?”
“그 설화에 대한 기록들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인간들이 자기 편하게 해석해놓은 일기에 불과하죠.”
“그, 그게 정말이에요?”
차희영이 화들짝 놀라며 말하자, 헬레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네. 생각해보세요. 차희영 교육생은 누가 적었는지도 모르는 기록을 믿겠습니까? 아니면 그때 그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인, 이 헬레나 루 에이옌스의 말을 믿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조금 석연치 않은 점이 있기는 했어요. 왜 모든 전투가 끝났는데, 대 영웅이 저주를 받아들였는지. 아, 아! 설마!”
“네.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너, 너무해요! 고작 사랑 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만큼이나 마그나카르타를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
당당히 맞받아치는 헬레나. 하지만 그런 헬레나의 오른팔은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마 내면에 공존하는 진정한 헬레나의 영혼이 난동을 부리는 게 틀림없다. 하기야 억울하기도 하겠지. 저리도 개소리를 지껄이는데.
“실은 여기서 하나 더 추가로 밝히건대. 저는 마그나카르타의 아이를 임신한 적이….”
“네에에에~?!”
서로 꿍 짝을 주고받는 헬레나와 차희영.
이윽고 나를 보며 배시시 손을 흔드는 제갈 해솔과 눈을 마주친 후. 나는 주먹을 슬슬 쓰다듬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아까 잠시나마 감동했던 마음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다행히 자리가 일찍 끝나서 예약 취소하고 자정에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