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35
00534 새로운 여왕. =========================================================================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 정도의 강력한 마력의 파동과 익숙한 울음소리.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나는 약간 내려간 계단을 다시 올라와, 곧바로 복도를 달렸다.
이윽고 창고의 보안을 해제해 안으로 들어간 순간.
나는 내부서 한 가득 흘러나오는 빛의 향연에 잠시 눈을 감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앙!”
그때, 재차 들려오는 고통에 찬 비명. 나는 이를 악물고 시선을 돌렸다. 이어서 안력을 한 가득 끌어올리자, 비로소 내부 상황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허공에는 마르가 떠올라 있었다.
순간적으로 멍멍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강렬한 빛에 휩싸인 채 사방팔방으로 웅혼한 마력을 쏘아 보내는 그 모습이, 잠시지만 마르의 비명을 잊게 할 만큼 성스럽고 거룩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빠!”
애타는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자, 바닥에 주저앉은 채 벌벌 떨고 있는 유정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크게 심호흡하며 다가가,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야?”
“오, 오빠! 내, 내가 어떻게 한 게 아니라!”
“잠시만. 진정해.”
“어, 어?”
나는 지긋이 유정을 응시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호들갑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오직 두 가지. 우선 발생한 일에 대한 대처 방안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그 방안을 마련하려면 왜 일을 터뜨렸냐고 다그치는 게 아닌, 어떤 과정을 거쳐 일이 발생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제발 진정하고. 어떻게 된 건지 말해봐.”
그런 내 마음을 느낀 걸까. 불안히 흔들리던 유정의 눈동자가 조금이나마 가라앉는다.
“모, 모르겠어. 그냥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창고나 구경시켜주려고 데려왔는데, 갑자기 비명이….”
“갑자기 비명만 들렸다고?”
“으, 응. 그냥 저쪽 선반에만 앉혀놓고 창고 정리하고 있었는데….”
“저쪽 선반.”
나는 유정이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빠르게 선반을 훑자, 곧 어지럽혀진 성과들 사이로 이상한 점 하나가 눈에 밟혔다.
가로 세로 15cm 정도 돼 보이는 푸른 상자. 예전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성과 중 하나인 탈루스 프로페타였다.
하지만 무언가 다르다. 상자가 개봉된 건 둘째 치고서라도, 예전에는 겉면에 은은한 빛을 흘렸던 것 같은데, 지금은 빛은커녕 평범한 상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치 이미 사용한 것처럼.
그때였다.
“빠, 빠아아아아아!”
나를 부르는 외침에 급히 허공을 쳐다본 순간, 돌연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강렬한 빛을 내뿜는 무언가가 마르의 등에 화살처럼 내리 꽂히고, 이어서 허공에 떠 있던 마르가 갑작스럽게 바닥에 떨어진다.
이윽고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받아낸 순간, 나는 마르의 등에 꽂힌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빛은, 화살이 아니었다. 예전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서 가져온 찢겨진 요정 여왕의 날개였다.
아니. 더는 찢겨진 상태가 아니다. 이제는 열두 쌍 모두가 마르의 등에 달린 채 눈부실 정도의 찬연한 빛을 내뿜고 있다. 아까 창고로 들어오면서 느꼈던 성스럽고 거룩한 기운을 폭풍처럼 흘려내면서.
곧, 변화가 시작되었다.
창고 내부를 가득 메우던 빛이 천천히, 그러나 한꺼번에 마르의 몸 속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조금씩 조금씩 밀려오던 것들은, 이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내며 마르의 자그마한 몸에 파도처럼 들이닥치고 있었다. 척 봐도 절대로 좋지 않은 상황.
“무슨 일이야?!”
“갑자기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크, 클랜 로드?”
그와 동시에, 마찬가지로 이상 현상을 느꼈는지 클랜원들이 한 명 한 명 달려오는 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차마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나는 침착해지려 애쓰며 마르를 내려다보았다. 밀려오는 마력의 파도를 견디기 힘든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간신히 눈을 떠, 나를 향해 힘겹게 손을 내미는 마르.
“빠…. 빠아…. 빠아아…. 으어어엉…!”
고사리 같은 손을 꼭 붙잡아주며,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신기를 복원하는 능력을 가진 탈루스 프로페타.
요정 여왕의 일생이 담겨있는 열두 쌍의 날개.
그 순간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 나는 곧장 눈을 뜨며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1. 이름(Name) : 마르
2. 클래스(Class) : -(미정)
3. 소속 국가(Nation) : -(미정)
4. 소속 단체(Clan) : -(미정)
5. 진명 • 국적 : 하프 엘프(Half Elf), 요정 여왕의 후계자 • 요정의 숲
6. 성별(Sex) : 여성(0)
7. 신장 • 체중 : 54.7cm • 5.3kg
8. 성향 : 질서 • 순수(Lawful • Pure)
– 금기로 일컬어지는 요정의 날개가 강제로 이식되었습니다. 원래는 금기의 부작용으로 이식 즉시 사망했어야 마땅하나, 과거 요정 여왕의 날개라는 점. 그리고 피 이식자가 요정 여왕의 적통 후계자라는 점. 이 두 가지 원인이 호환돼 강제 시험에 든 상태입니다.
– 하지만 여전히 금기라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혈통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고 해도, 800년간 쌓아 올린 신기는 이제 갓 태어난 후계자가 받아들이기에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 내부에 감당할 수 없는 폭주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중상입니다. 이대로 시간이 경과한다면 곧 100% 사망에 이릅니다.
수많은 정보들이 주르륵 떠올랐지만,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곧 사망에 이른다는 말만이 보일 뿐.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해결책 하나를 떠올렸다. 머릿속에 비비앙을 치료했던 일이 떠올라 나는 머리를 번쩍 들며 외쳤다.
“엘릭서!”
“에, 엘릭서? 금방 가져올게!”
그나마 가장 가까이 있던 유정이 곧장 반응했으나, 나는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갑작스럽게 마르가 비명을 뚝 멎었기 때문이다. 오직 간헐적인 떨림만이 전해져 오는 게, 온몸에 불길한 감각이 엄습하고 있었다.
“여, 여기!”
이내 유정의 외침이 들려옴과 동시에, 나는 손을 뻗어 허공섭물의 묘리를 일으켰다. 엘릭서는 노란 액체를 찰랑이며 날아와 내 손에 잡혔다.
그 순간.
“끄륵!”
한순간 마르의 눈이 까뒤집히며 허리가 곡선으로 휘었다. 동시에 한껏 벌려진 입에서 허연 거품이 흘러나온다.
“마, 마르야! 오, 오빠아악!”
유정의 괴성과 동시에, 나는 주저 않고 병마개를 부러뜨려 엘릭서를 박아 넣었다. 그때였다.
“In fluxum lineae.”
누군가 담담히 주문을 영창하는 소리.
이윽고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꿀렁꿀렁 천천히 내려가던 엘릭서가, 마치 빨대처럼 하나의 줄기로 압축된 것이다. 이어서 가느다란 줄기로 변한 액체가 마르의 입안으로 유연히 흘러내려간다.
이내 모든 액체가 물 흐르듯 사라졌을 무렵, 그 누군가가 건너편에 털썩 주저앉는다.
“혹시 늦을 수도 있어,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손을 썼습니다. 부디 용서를.”
마법을 사용한 장본인은 헬레나 루 에이옌스였다.
“…고맙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린 후, 다시 마르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즉효라는 설정을 지닌 엘릭서라 그런지 마르의 몸은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조금 전 당장에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던 모습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다. 안정되어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부르르 떨리는 입에서 격한 숨이 터져 나오는 것은 아직은 숨이 붙어있다는 증거이리라.
간발의 차로 고비를 넘긴 건가 싶어, 나는 참았던 숨을 흘렸다.
“후…. 정말 위험했다. 겨우 안정된 건가.”
“아직입니다. 엘릭서는 임시 방편에 불과할 뿐.”
…뭐?
뭔 소린가 싶어 시선을 들자, 전에 없던 긴장한 얼굴로 마르를 내려다보는 헬레나가 보인다.
헬레나의 말이 이어졌다.
“오히려 이제 시작입니다.”
“그게 무….”
그때였다.
그것은, 무척이나 뜬금없었다.
쿠쿠쿠쿠, 쿠쿠쿠쿠….
별안간 창고에 마력의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마치 갑작스럽게 차오른 물을 감당치 못한 둑이 터져, 물이 한꺼번에 개방된 느낌이랄까.
이어서 벌어진 현상은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삽시간에 벌어졌다. 돌풍은 사방팔방에서 휘몰아쳐 오르며 마르의 몸으로 게걸스레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잠잠해지던 것도 잠시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마력의 흐름이 마르의 몸을 스칠 때마다 굉음이 창고를 휩쓸었다.
휘몰아치는 돌풍 속에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금기의 부작용입니다.”
헬레나가 담담히 회답한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라,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요정에게 허락된 날개는 최대 열두 쌍 까지니까요. 그것도 오직 여왕만이 열두 쌍의 날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리고 지금 마르의 날개는 13쌍입니다.”
그 말에 나는 멍하니 마르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원래 가지고 있던 한 쌍과 새로 이식된 열두 쌍의 날개를 합쳐, 마르의 등에는 총 13쌍의 날개가 달려있었다.
“요정 여왕의 후계자라는 점과 엘릭서의 효능으로 어찌어찌 상황은 호전됐지만…. 그런데 과연 이 세상이 13쌍의 날개를 허락해줄지 의문이군요.”
“에, 엘릭서 더 있지 않아? 그럼 또 엘릭서를!”
유정이 발악하듯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헬레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용없습니다.”
“어, 어째서?”
“엘릭서기 천고의 영약이기는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각성 과정은 최소 며칠은 걸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며칠 사이에 수십, 수백 번의 위기가 찾아올 터인데. 그때마다 엘릭서를 사용하실 겁니까?”
“…….”
불가능하다. 엘릭서라고 해봐야 10병도 채 안 되는데, 수십 수백 번을 사용할 여유는 없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느덧 끈임 없이 들려오던 울음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마력이 파도 칠 때마다 온몸을 덜거덕거릴 뿐. 그러나 여전히 얼굴에 고통의 빛이 떠오르는걸 보면 아직 정신은 있다는 방증이다. 나는 마르를 꼭 붙잡았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간섭할 수 없는 차원입니다. 그저 기다리며,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할 뿐이지요.”
그러나 헬레나는 냉정하다 생각될 정도로 고요히 말을 이었다.
기적이라.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아니. 생각나지 않는다.
“나,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털썩, 유정이 주저앉는다.
돌풍은 시시각각 거세어지고 있었다. 마르는 마치 목이 마른 사람처럼 더운 숨을 뿜어내며 내 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마치 도와달라고 절절히 외치는 것 같아, 나는 더더욱 무력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내가 이토록 무력했다는 말인가? 정말로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이윽고 마르의 몸이 축 늘어지며 피부에 연한 실금이 떠오를 무렵.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본능에 따라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한 병의, 아니 남아있는 모든 엘릭서가 우수수 날아와 손에 잡히고, 일부는 바닥에 떨어진다.
곧 피부가 살그머니 갈라지는 광경을 보며, 손가락에 반사적으로 힘을 주려는 순간.
“모두 비켜주세요!”
“어, 어어?”
문득 등 뒤로 한별이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우당탕 달려들어와 내 손을 휙 잡아채는 게 느껴졌다.
“……!”
시선을 돌리자, 정말 급하게 달려온 듯 숨마저도 참고 있는듯한 얼굴이 보인다.
모습을 보인 사용자는 한별이 아니었다.
“…너.”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눈을 부릅뜬 여인은, 바로 안솔이었다.
안솔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오른팔을 내밀었다.
이윽고 안솔의 손에 쥐어진 지팡이가 내 얼굴을 비스듬히 지나쳐 정확히 마르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순간.
“…기적!”
안솔은 참았던 숨을 일거에 토해내며 한 단어를 외쳤다.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퇴고를 마치고 후기를 적느라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었네요. 하하하.
음. 다름이 아니오라, 이번 회로 새로운 여왕의 파트가 끝났음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즉, 예전 구상으로 따지고 보면 2부가 끝났다고 보셔도 좋습니다.
물론 2부의 끝이 원래 이런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는 마몬을 처치하고, 이후 돌아와 강철 산맥 공략의 소집령이 떨어지는 순간이었지요. 그러나 총 4부를 3부로, 또 2부로 줄인 이상 구상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이번 회로 2부를 마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몬 처치 내용을 앞으로 옮기고 강철 산맥 소집령을 최대한 뒤로 미루게 된 것이지요. 그 편이 더 이어지는데 부담이 적으리라 생각됐으니까요.
아마 조금 갑작스럽게 느끼는 독자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실 이후의 구상 중 필요한 내용은 있습니다. 새로 영입한 사용자들의 성장이나, 저번에 얻은 성과들의 배분이나, 능력을 가르치거나, 마르의 변화 등등 말이지요.
하지만 그 부분은 상세히 적지 않고 점프할 생각입니다. 물론 완전히 생략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이 모든 과정은 최소한으로 축소됐으며, 결과를 중심으로 언급될 예정입니다. 아마 2회 안으로 모두 정리될 듯싶네요. 그런 만큼, 다음 회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의 내용이 나올 예정입니다. 물론 예전처럼 2년을 뛰어넘는 건 아니고 그저 한두 달 정도의 공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4부를 2부로 줄인 만큼 매우 기나긴 2부이지만, 이제는 실질적으로 3부로 돌입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음 회 부터는 강철 산맥의 공략을 중점으로 다룰 예정이며, 악마와 타 대륙 사용자 등이 모습을 비출 계획입니다.
이점 독자 분들께 양해를 구하며, 이만 긴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