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38
00537 평온한 날은 끝나고. =========================================================================
문을 두드린 클랜원은 신재룡이었다. 내부 소식을 가져온 것이다.
혹시나 했지만, 다행히(?) 별것 아닌 소식이었다. 2주전 의뢰를 받아 떠난 클랜원들 무사히 완수하고 방금 귀환했다는 소식.
기별을 듣고 1층으로 내려가자 마침 선두에서 왁자지껄 떠들며 들어오는 두 사내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안현과 진수현이었다.
“형. 의뢰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형님! 이번에도 제대로 완수했다고요! 벌써 3승 0패에요! 3승 0패!”
안현은 깍듯이 머리를 숙이며 귀환을 보고했고, 진수현은 손가락 3개를 펼치며 신나서 떠들었다. 얼굴을 보니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 3승 0패라 함은, 의뢰를 3번 받아 전부 완수했다는 말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올리며 회답했다.
“그래. 수고했다.”
“에이. 수고는요. 재미만 있었는데요.”
천성이 전투를 꺼리지 않는, 호전성이 강해서 그런 걸까. 진수현은 전혀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빠르게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진수현을 보며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근 두 달간 진수현은 그 누구보다 왕성히 활동했고, 또 그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했다. 원체 붙임성 좋은 성격인 것도 있지만, 사실 다른 이유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진수현을 보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게 한 가지 있기 때문이다.
아. 이 사용자는 정말로 홀 플레인을 사랑하는구나 라고.
말 그대로 진수현은 진심으로 홀 플레인을 좋아하고 또한 즐길 줄 아는 사용자였다.
거기서 내가 해준 것은, 사실 별다른 것은 없다. 그저 환경을 충족시켜주었을 뿐.
목에 힘 좀 주고 다닐 수 있는 소속감, 훌륭한 장비, 좋은 동료들, 색다른 임무, 맛있는 밥과 술, 그리고 다시 돌아와 따뜻하게 쉴 수 있는 클랜 하우스 등등. 말인즉슨, 활동하는데 그 어떤 걱정도 하지 않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그 결과는?
과거에 암담한 시절을 겪었던 만큼, 진수현은 현재 내가 만들어준 환경에 흠뻑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게 바로 내가 노린 것이기도 했고.
“아참.”
그때였다. 흐흐 웃어 젖히던 진수현이 갑작스럽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는, 나와 안현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형님.”
“응?”
“실은 말입니다. 저 이번에 중대한 결심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중대한 결심?”
“예. 이번 의뢰 중 안현한테 자세히 들을 수 있었거든요. 사용자 신상용에 대해서 말이죠.”
“신상용?”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그 양반 이름은 갑자기 왜 나와?
진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바로 2년 전 전쟁에서 동생들의 목숨을 구하고 대신 사망한 사실과, 안현이 부활을 위해 GP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요. …저 진수현. 그 사정을 듣고 나서 정말로, 참말로 감동했습니다.”
“아…. 그래. 다 예전 일이지.”
“그래서 말입니다.”
“……?”
잠시 말을 멈춘 진수현은 촉촉한 눈동자로 안현을 응시했다. 안현 또한 살짝 젖은 두 눈으로 진수현을 돌아봤다.
그렇게 한동안 마주하던 둘은, 별안간 서로의 주먹을 세게 맞부딪쳤다. 그리고 진수현이 선두로, 안현이 이어서 외쳤다.
“비록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홀 플레인에 들어오지는 못했으나!”
“죽기만은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이기를 바라오니!”
“어…. 에…. 으, 으음! 나 진수현은 안현을 도와 사용자 신상용의 부활에 한 팔 거들기로!”
“음…. 흠…. 흐, 흐흠! 아무튼 그래서 진수현과 의형제를 맺기로 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황천토후여. 이 뜻을 굽어 살피소서…. 이기는 한데.
하지만 아무래도 딱 앞 두 구절까지만 아는 듯, 둘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한 번 더 주먹을 마주쳤다. 그리고 아파죽겠다는 얼굴로 입을 꽉 깨물기까지.
와. 어떻게 저렇게 똑같이 행동하는 거지?
그렇게 앞뒤를 깡그리 잘라먹은, 매우 간소한 도원결의를 맺은 두 사내는 서로 사이 좋게 어깨동무를 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 둘을 보다가 나는 차분히 시선을 돌려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신상용의 무덤이 있는 방향이었다.
보고 있습니까? 신상용?
지금 여기에 당신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사용자가 있습니다.
“크로스!”
“크로스!”
그것도 둘이나요.
“아빠아. 저런 사람들을 보고 바보라고 하는 거예요?”
잠시 후, 품에 안겨있던 마르가 살짝 고개를 들어 내 귀에 속닥거렸다. 나는 그 말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요. 바보라는 게 문제지만요.
그렇게 신상용에 보내는 전언을 마친 후,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마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보니까아, 이상하게 불편한 기분이 들어서요. 이게 한심하다는 감정인가요?”
얘야. 가끔은 너무 솔직한 것도 죄가 된단다.
자꾸만 고개를 갸웃하는 마르의 등을 토닥인 후, 나는 바보 듀오를 따라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왕 내려왔으니, 식당에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올라갈 셈이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왁자지껄한 소리가 귓전을 가득히 메워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나는 약간이지만 놀라고 말았다. 생각보다 식당에 있는 클랜원들이 많았던 것이다. 군데군데 빈 테이블은 보이나,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자유롭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늘 보이는 인원은 유난히 많다.
곧 나를 보며 인사하는 클랜원들을 향해 나는 곧바로 마르를 앞세워 주의를 돌렸다. 마르는 떨어지기 싫다는 듯 내 옷깃을 세게 움켰으나, 나는 기어코 억지로 떠넘긴 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주방과 붙은 테이블에 몸을 앉힐 수 있었다.
“어. 클랜 로드. 또 오신 겁니까?”
마침 나와 있었는지, 머셔너리 클랜의 주방장인 사용자 박상남이 다가오며 인사를 했다.
“아. 차 한 잔 생각이 나서요.”
“그렇군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사용자 박상남은 음식 솜씨는 물론, 서글서글한 인상과 부드러운 태도를 지닌 클랜원이었다. 오죽하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들 상남 형님이라고 부르며 좋아할 정도였다.
이윽고 박상남이 가져온 차를 마시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리, 리더! 펴, 편안한 밤은 보내셨습니까? 하, 하하하….’
신상용.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동시에 조금이지만 미묘한 기분도 들었다. 딱히 마음에 두고 있다기보다는….
예전 마르와 관련해 일어난 사건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조금은 착잡한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설마 그때 느꼈던 무력감을 또 느낄지는 몰랐으니까.
그렇게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을 무렵, 문득 박상남이 맞은편에 앉는 게 느껴졌다. 흘끗 시선을 올리자 너그럽게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클랜 로드. 그러고 보니 요즘 클랜 분위기가 참 평온한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가요? 저는 정신이 없는데.”
“하하하. 확실히 시끌시끌하기는 합니다. 저는 말입니다. 그래도 이런 시끌벅적함이 참 좋습니다. 큰 사건이나 사고 없이, 모두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보면 평온하기는 하지요.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습니다.”
박상남은 흐뭇한 얼굴로 옆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여러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시끄럽게 떠드는 클랜원들이 보인다. 그 중 단연 압권은 바로 안현과 진수현이었다. 벌써 주문하고 음식이 나왔는지, 테이블에 그릇을 가득 채운 채 신나게 떠들며 먹고 마시는 중이다.
“상남 형님! 여기 추가 주문이요!”
그러고도 부족한지 안현이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박상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런. 이만 일어나야겠네요.”
“너무 많이 주지는 마세요. 배 나옵니다.”
“허허. 알겠습니다. …그리고 클랜 로드. 아마 오늘 밤 잠은 잘 오실 겁니다. 차에 술을 약간 섞었거든요.”
“예?”
“들어오실 때 얼굴이 조금 안 좋아 보이셔서. 아무튼, 오늘 밤은 부디 푹 주무시길.”
“…예?”
의아한 기분에 쳐다보았으나 박상남은 빙긋 웃기만 하고 주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차에서 허연 김이 피어 오를 무렵, 나는 뒤늦게 박상남의 배려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열 마디 말의 격려가 아닌 하나의 행동으로 보여준 격려를.
과연. 이래서 클랜원들이 박상남을 좋아하는 건가.
안현과 진수현은 테이블에 놓인 접시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어느새 음식을 깡그리 흡입한 모양. 그리고 바로 옆 테이블을 쳐다보더니 서로를 보며 낄낄 웃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에서는, 유정, 안솔, 차희영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음료를 마시는 중이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해답은 곧 나왔다.
곧 몸을 일으킨 안현이 양손에 접시를 든 채 살금살금 다가간 것이다.
“거기 붉은 머리칼을 한 아름다운 숙녀 분?”
“그래서 내가 있지…. 응?”
유정이 고개를 돌리자 안현은 정중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테이블에 접시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유정이 채 입을 열기도 전, 점잖은 목소리로 진수현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가리킨다.
“저쪽 테이블의 신사 분께서 시키셨습니다. 아름다운 숙녀 분께 갖다 드리라고….”
유정이 멍하니 고개를 돌린다. 따라 시선을 돌리자 실실 웃는 얼굴로 입에 물고 있던 포크를 빼고는,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는 진수현을 볼 수 있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안현은 끝까지 정중한 태도를 보이며 몸을 돌렸다.
잠시,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물론, 정적은 아주 잠시였다.
우당탕탕!
유정이 예쁜 입술에서 온갖 욕설을 터뜨리며 분연히 몸을 일으킨 것이다. 저 둘을 당장에라도 찢어 죽일듯한 얼굴로. 그러자 안솔과 차희영은 덩달아 일어나 유정의 양팔을 휘감았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너희가 처먹은 접시를 왜! 밥맛 떨어지게 무슨 짓거리야!”
“언니! 참아요! 원래 바보들이잖아요! 오히려 이러는 게 지는 거라고요!”
“놔. 안 놔? 씨발 노라고! 저 쌍놈 새끼들이…!”
“어, 언니. 죄송해요. 제가 대신 사과 드릴게요. 진정하세요. 네?”
안 그래도 소란스럽던 식당이, 한순간 더욱 소란스럽게 변했다. 이내 왁자하게 웃으며 도망치는 둘을 보며, 유정은 비명을 질렀다.
“이 물 내리고 똥 싸는 새끼들아!”
그건 또 무슨 새끼일까.
나는 피식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그리고 혀에 부드럽게 녹아 드는 찻물을 느끼며 박상남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큰 사건이나 사고 없이 모두가 열심히 활동하는 평온한 일상. 그래. 어쩌면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절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두 번 다시 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그런 평온한 나날. 그러면 나도….
쾅!
그때였다. 막 찻잔을 놓으려는 찰나, 누군가 문을 거세게 열어젖히는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약간은 소란이 가라앉을 걸 느끼며 나는 입구 쪽을 응시했다.
입구에는 숨을 헐떡이는 선유운이 서 있었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허리를 반쯤 접은 채 얼굴만 간신히 들고 있었다. 매우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클랜 로드! 급보입니다!”
평소 덤덤한 성격의 선유운을 생각해보면, 괜한 말을 꺼내지는 않으리라. 정말로 급보인 모양이다.
“급보? 무슨 일이죠?”
“이스탄텔 로우에서 개별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냥 소집령이 아니라, 개별 소집령을요? 이스탄텔 로우에서?”
“예, 예! 그것도 모니카에 있는 전 클랜을 대상으로 한 소집령입니다.”
왜?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쳐다보자 선유운은 크게 숨을 흘렸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번쩍 몸을 일으켜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저녁 시간대를 기점으로 중앙 관리 기구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강철 산맥의 공략을 선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식당 내 소란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강철 산맥 공략에 대한 공식적인 선포라.
…그렇다면, 드디어 일이 벌어진 건가.
시선이 쏠린 가운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개별 소집령이라면…. 지금 바로 이스탄텔 로우에 전령을 보내세요. 머셔너리가 소집에 응하겠다고.”
아무래도 평온한 날은, 오늘이 끝인 것 같다.
============================ 작품 후기 ============================
이런. 죄송합니다. 오늘 1시간 업데이트가 늦어버렸네요. ;ㅅ; 요새 도로 자정을 지키는가 싶더니….(퍽퍽.)
아는 동생이 군생활 중입니다. 많이 친한 동생입니다. 작년에 학교에서 만났지만, 정말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에요. 사실 사람과의 관계는 오래 사귈수록 깊어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 공식을 깨뜨린 녀석이기도 하고요.
원래는 5월 초에 외박을 나오기로 했는데, 갑자기 오늘 나왔다고 연락이 오더라고요. 왜 이렇게 빨리 나왔냐고 물어봤더니 안산 고잔역으로 간다고 합니다. 피해 가족이라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더는 묻지 않았습니다. 프사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어서….
평소 지인에게 힘내라는 말은 잘 하지 않는 편이에요. 말로만 힘내라고 하는 것 보다는, 그냥 조용히 지켜봐 주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해서요. 그런데 지금 약간, 아니 많이 후회되는 게, 그때 통화할 때 무언가 위로를 할걸, 자꾸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가슴이 갑갑하다 보니 말이 길어졌네요.
월요일입니다. 독자 분들 모두 우울한 월요병을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