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39
00538 평온한 날은 끝나고. =========================================================================
다음 날.
아침이 밝음과 동시에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하우스는 북새통을 이뤘다. 전날 저녁에 떨어진 개별 소집령 때문이다. 물론 모니카뿐만이 아닌 모든 도시에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 근원에는 중앙 관리 기구에서 발표한 강철 산맥 공략 선포가 있었다.
그렇게 각 도시 대표 클랜에는 많은 사용자가 모여 야단스럽게 부산을 떨고 법석였지만, 북 대륙 전역으로 보면 딱히 시끄럽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어? 강철 산맥을 공략한다고?’라는 반응보다는, ‘드디어 공식적으로 선포했군.’ 정도?
그 이면에는 중앙 관리 기구, 정확히는 이효을의 전략이 있었다.
두 달 전, 이효을은 각 도시의 명성 높은 클랜들에 비밀리에 전령을 보냈다. 내용 자체는 별것 없었다. 이제 강철 산맥을 공략할 생각이니 서서히 준비하고 있으라는, 저번 헤일로 선발 때 한 발표와 별다를 것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효을이 진정으로 노린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확실히 비밀리에 전령을 보내기는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비밀이 유지되는 법은 극히 드물다. 전령을 한두 군데 보낸 것도 아니었거니와, 소문은 어떻게든 흘러나가기 마련이니까.
이효을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클랜 로드는 간부에게, 간부는 클랜원에게, 클랜원은 지인에게.
강철 산맥 공략에 관한 소문은 위에서 아래로 차츰차츰 퍼지기 시작했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웬만한 사용자들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그 결과 강철 산맥의 공략 준비는 자연스레 자발적으로 이루어져, 공식 발표 때도 충격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기실 지금 대표 클랜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것도, 갑작스러운 선포 때문이 아닌 그동안의 준비에 기인한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소영씨도 올해 나이가 서른이라고 들었는데요.”
이스탄텔 로우 클랜 하우스 집무실.
한소영은 아침부터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어젯밤 강철 산맥 공략의 공식 발표가 떨어진 바람에, 아침이 되자마자 모니카에 자리 잡은 온갖 클랜 로드들이 우르르 들이닥친 탓이다.
물론 단순히 이야기만 나눈다면 크게 힘들 것은 없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초감각이 전해주는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한소영은 필요 이상의 체력이 소진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 정보가 혐오감과 불쾌감을 일으키는 정보라면 더더욱.
더욱이 개별 소집령을 내린 사정상 한 명 한 명 따로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라, 한소영은 아침부터 심신이 지치는 경험을 맛봐야만 했다.
지금 집무실에 들어앉은 중년 사내만 봐도 그렇다.
“이야.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까 도저히 서른 살로 보이지가 않아요. 꼭 미모의 커리어 우먼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으허허허!”
할 이야기만 딱딱 끝내고 가면 되는데,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와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다. 아마 무사(武士)라는 나름 이름 있는 무력 클랜만 아니었다면, 진즉 내쫓았을지도 모른다.
비록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이제 곧 한계인 듯 무표정한 얼굴에도 서서히 싸늘함이 그늘지고 있었다.
“실은 저도 나이가 마흔이 넘기는 했지만.”
“네. 그래서 무사 클랜에서는 이번에 남부 원정대로 참여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아. 뭐 그렇죠. 소영씨는 걱정을 하지 말아요. 우리 진정한 사내들만 모인 무사 클랜이 강철 산맥 공략의 선봉에 앞장설 테니까.”
“그럼 그런 걸로 알고 있겠어요. 무사 클랜의 참가에 감사 드려요.”
“으허허. 별말씀을. 오! 그런데 해가 벌써 중천이네요. 그러고 보니 배가 약간 고픈 것 같기도 한데…. 어떻게, 같이 식사라도.”
“1층에 식당 있어요. 혜림아? 무사 로드 나가신다. 식당으로 모셔다 드리렴.”
딱 잘라 거절한 한소영은 곧바로 연혜림을 호출했다.
결국 사내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지만, 문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음험한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한소영은 수십 마리의 송충이가 온몸에 우수수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러나 조금 쉴 틈도 없이 누군가 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박다연이었다.
“응? 언니 왜 그러고 있어요?”
“…힘들어서.”
“흐응? 하기야 아침부터 지금까지 거의 20명은 찾아왔으니까요. 그런데 어떡하죠? 마침 한 분이 더 찾아오셨는데.”
“하~아.”
한소영은 끈적한 한숨을 흘렸다. 정말, 진심으로 힘들다는 듯이.
박다연은 두 눈을 끔뻑끔뻑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떡해…. 그럼 잠시 쉬고 계실래요? 마침 점심 시간이기도 하니까, 제가 그분과 식사라도 하면서 시간을 끌어드릴 수는 있는데.”
그 말에 한소영은 살며시 눈을 떴다. 말투는 한소영을 위하는 듯했으나, 초감각이 전해주는 정보는 그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마치 꼭 허락해주었으면 하는 것처럼.
“누군데?”
“…머, 머셔너리 로드님이요.”
“들어오시라고 하렴.”
“…….”
한소영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자 박다연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언니. 혹시 정말로 머셔너리 로드랑 사귀는 거 아니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그렇잖아요. 머셔너리 로드라고 하니까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서는.”
“왜 너마저 헛소리니. 그냥 한 명 남았다니까 얼른 끝내고 쉬려고 그러지. 그리고 머셔너리 로드 같은 거물급은 기다리게 하는 것 자체가 실례니까.”
“거짓말! 그럼 왜 갑자기 머리는 묶는 건데요?!”
“……!”
박다연의 외침에 한소영은 흠칫 행동을 멈췄다. 동시에 가슴이 뜨끔해짐을 느꼈다. 정말로 뒷머리를 그러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한소영은 아무 말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빨리 모셔 오기나 해.”라는 말과 함께, 박다연의 앙증맞은 정수리에 꿀밤을 콩 쥐어박았다.
결국 박다연은 어엉 울음을 터뜨리며 집무실을 나섰고, 그 사이 한소영은 재빠르게 머리와 옷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문이 달칵 열리며 한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머셔너리 로드 김수현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어젯밤 소집령을 받아 바로 응했습니다.”
“네.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이쪽에 앉으세요.”
무사 로드를 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내 한소영이 설레는 마음으로 초감각을 느끼려 할 무렵, 자리에 앉은 김수현이 곧장 입을 열었다.
“오늘 몸이 별로 안 좋으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얘기를 빨리 끝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요.”
“네…. 네?”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면, 머셔너리 클랜은 남부 원정대로 참가할 생각입니다. 이번 강철 산맥 공략에 한해서, 우리 머셔너리는 이스탄텔 로우에 전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아…. 네…. 협력에 감사 드려요….”
간신히 회답한 한소영은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조금 전,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는 듯 입술을 꼭 깨물며 나간 박다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소영 또한 만만치 않은 여인이라, 곧바로 화젯거리를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이네요. 그런데 헤일로의 대표 클랜인 해밀 로드의 의중이 조금.”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부는 이번에 4번째 전력을 판정을 받은 터라, 선발대가 아닌 후발대에 포함 된다 들었거든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확실히 얘기해뒀으니, 혹시라도 제가 중간에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순간, 한소영은 말문이 막히는걸 느꼈다. 서부의 4번째 전력 판정.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모든 사정을 알고 왔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거의 끝났다고 봐도 좋다. 아까 수십 분을 허비한 무사 로드와는 달리, 단 6마디 만에 이야기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아까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지만, 한소영은 돌연 뜻 모를 서운함을 느꼈다.
그때였다.
“…그런데, 오늘 정말 몸이 안 좋으신 것 같군요. 힘이 없어 보이십니다.”
문득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소영의 귓전을 울렸다.
“흐흠. 그냥 조금. 그렇게는 나쁘지는 않아요. 다연이가 엄살을 부렸나 봐요.”
“그래도요. 건강은 항상 관리하시는 게 좋습니다.”
김수현이 따뜻한 미소로 화답하며 품을 뒤적였다. 그러더니 곧 탁자에 무언가를 살그머니 올려놓았다. 그 무언가는, 바다 빛으로 반짝이는 예쁜 보석이었다.
한소영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한두 번 헛기침을 한 김수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얻은 성과 중 하나인데…. 코델리아라는 보석입니다. 체내를 깨끗하게 만들어주고, 마력의 흐름을 한층 빠르게 만들어주죠. 복용하시면 적잖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마침 몸이 안 좋으시다고 하니 더 잘됐네요.”
김수현의 설명에 한소영이 두 눈이 살짝 치켜 떠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보석은 누구나 열망하는 천고의 영약이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특히 마법사는 더더욱. 마력의 흐름이 빨라지면, 더 빠른 속도로 마법을 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승의 주문을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귀한 영약을 준다고?
이윽고 한소영이 김수현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문득, 한소영은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사르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서 예의 애틋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른 사내들의 음험한 감정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오로지 김수현이라는 사용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감정.
그런 순수한 걱정으로 이루어진 그런 정다운 감정은, 오늘 아침 내내 시달린 한소영의 육체에 끝없는 감미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오죽하면 이게 힐링이구나라고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한 번 복용을.”
“아니요. 죄송하지만…. 이런 선물은 너무 부담스러워요. 그냥 마음만 받을게요.”
“예?”
“이런 귀한 영약은 제가 받을 선물이 아닌 것 같아서요.”
왜냐하면 이걸 받는 건 잘못된 일이었으니까. 자신에게도, 그리고 머셔너리 로드에게도.
그렇게 생각한 한소영은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이 선물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제가 아닌 머셔너리 로드, 혹은 머셔너리 클랜원들에 돌아가는 게 맞는 일 같아요.”
“아, 아니요. 제가 먹어봤자 큰 효과는 없어서요. 그리고 괜찮습니다. 이건 어차피 개인 성과라.”
“그렇다고 해도. 이건 제가 받을 수 없는 선물이에요. 클랜원들 중에서도 분명히 이 성과를 원하는 분들이 있을 거고요. 그런 만큼, 그분들께 선물로 주시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비록 개인 성과라고는 하지만, 클랜 로드의 입장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어요.”
“…….”
어떻게 보면 일종의 가르침이 깃든,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가 깃든 말이었다. 그리고 그걸 알아듣지 못할 김수현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잠시 고민하기는 했지만, 김수현은 담담히 수긍했다. 그와 동시에 한소영은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이내 주섬주섬 보석을 챙기는 김수현의 모습에서, 시무룩해하는 감정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마치 칭찬을 받으려 꼬리를 흔들고 있던 강아지가 삽시간에 풀이 죽은 모습이랄까.
차라리 아까 무사 로드가 선물을 주었다면 받았을지도 모른다. 받고 입만 싹 닦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한소영은 김수현을 진심으로 생각해서 한 말이었고, 그래서 더욱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바꾸어 말하면, 김수현의 감정 또한 진심이었으니까.
결국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한소영이 탁자를 짚으며 살짝 상체를 기울였다.
“미안해요. 마음은 정말 기쁜데…. 혹시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
“하하. 아닙니다. 설마 요…? 어헉.”
그 순간, 김수현의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소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김수현의 시선이 상체에 꽂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 탓에, 헐렁한 옷이 아래로 내려가 가슴골을 드러낸 것이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한소영은 어색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 음.”
김수현의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한소영의 두 눈에 밟혔다.
항상 한결같던 태도가 처음으로 변했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초감각이 전해주는 정보 등등. 그러한 모든 것들이 한소영에게는 무척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아니. 정확히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초감각을 얻은 이후 잊고 있던 감정들이었다.
잠시 후.
이 신선한 기분을 조금 더 느껴보고 싶다는 욕심에, 침을 꼴깍 삼킨 한소영이 차분히 단추 하나를 풀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헐겁던 상의가 스르륵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조금 덥네요. 머셔너리 로드는 괜찮으신가요?”
“예에…. 저는…. 괜찮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단추를 풀었다. 이제는 가슴 가리개가 보일락말락 했다.
“아차. 저번에 주신 빗은 정말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어요. 머리칼이 길어 아침마다 정리하는데 곤욕을 치렀거든요.”
“그거…. 참…. 다행이군요…. 하하….”
다음으로는, 두 팔을 한껏 걷어붙여 새하얀 팔을 드러내며, 보란 듯이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이번에 남부 원정대에 참가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머셔너리 클랜이 참가해준다니, 이보다 좋은 소식은 없을 거예요.”
“그거야…. 당연한 일….”
이제는 아예 시선을 돌린 채, 얼굴까지 덜덜 떨고 있는 김수현.
그런 김수현을, 한소영은 담담히 응시했다.
아니. 실은 담담한 척이었다.
‘…큰일이야.’
느닷없이 속으로 애가 타는 기분이 엄습했다.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머리로는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거…. 너무 재미있어….’
묘한데 재미를 붙인 한소영이었다.
============================ 작품 후기 ============================
『쟁반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손을 올리지 않았다.
제발 이 버릇 좀 고쳤으면 좋겠는데. 일전에 한번 말한 적은 있었는데, 다들 미묘히 웃기만 하고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몰래 말해준 신상용의 귀띔에 따르면, 클랜 내 여성 사용자들이 식사를 시작할 때마다 묘하게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나.』
클랜원들이 괜히 예전에 김수현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 게 아니죠. 반전 매력이라고나 할까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