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47
00546 강철 산맥으로! =========================================================================
시간은 화살과 같이 흘러, 어느덧 출발 전날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클랜 하우스는 조용했다. 엊그제만 해도 장비를 교체해야 할 것 같다, 준비한걸 재확인한다 등으로 떠들썩했는데, 오늘은 정말로 조용하다. 아마 출발 전날인 만큼, 각자의 방식으로 마지막 밤을 보내는 거라 생각된다.
바로 나처럼.
“마르야. 아.”
“아~.”
책상 위에 앉은 마르가 또랑또랑한 눈을 깜빡이며 자그맣게 입을 벌렸다. 창고에서 가져온 정수 중 하나를 그 안으로 쏙 집어넣어주자, 마르는 통통한 볼 살을 불룩 이며 천천히 정수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우물우물. 잘도 먹는군.
이윽고 목울대를 꼴깍 움직인 마르가 눈을 반짝이며 남은 정수들을 가리킨다.
“와아…. 아빠아빠. 이게 뭐예요?”
“왜? 맛있니?”
“응! 되게 신기한 맛이에요. 꼭 밤하늘에 떠 있는 별님을 맛보는 것 같아요.”
“하하. 별님이라.”
마르의 말에 가볍게 웃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마르의 표현은 상당히 정확하다. 아니. 상당한 정도가 아니라 무서울 정도로.
방금 마르에게 먹인 정수는 비아트리스 스텔라라는 이름으로, 용이 잠든 산맥의 성과 중 하나였다. 별의 축복이 스며든 대지에서 100년이라는 숙성 기간을 거치면 7개의 꽃이 개화하는데, 그 꽃들의 암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주 귀한 정수였다.
효능은 복용 시 잠재성을 소폭 높일 수 있으나, 아직 개발할 여지가 있는 잠재성만이라는 제한이 있다. 즉 모든 잠재성을 개발한 상태라면 효능을 볼 수 없다는 소리.
그래서 마르에게 먹인 것이다. 마르는 현재 무시무시하다 생각될 정도로 폭풍처럼 성장하고 있었으니까.
잠시 후, 마르는 입맛을 다시며 정수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나는 기함했다. 비아트리스 스텔라의 효능은 중복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급히 제지하려는 찰나, 나는 갑작스럽게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 정수를 집은 마르가 내 앞으로 팔을 쑥 내밀었기 때문이다. 작은 달걀처럼 오므려진 손 틈으로, 별빛처럼 밝은 기운들이 줄기줄기 흘러나온다.
…지금 나보고 먹으라는 건가?
“아빠도. 아앙~.”
“마르야. 아빠는 이걸 먹을 수 없어요. 먹어봤자 별로 효과를 누릴 수 없단다.”
“효오과? 으응~. 그래도 아아앙~.”
“…….”
눈을 동그랗게 뜨는 마르. 하지만 곧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작고 뾰족한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며 한껏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한순간 고민이 들었다.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책상 한쪽을 흘끗 바라보니 남은 정수 5개가 보인다.
– 그냥 먹어. 딸이 주는데 거절할 셈이야?
그때였다. 속으로 심한 갈등이 일 무렵, 심장의 화정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반색하며 속으로 외쳤다.
‘부….’
– 죽인다!
‘…….’
– 기필코 죽인다!
화정의 목소리에는 말 그대로 기필코 죽이겠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자 예전 얼굴이 타버릴 뻔한 기억이 떠올라, 나는 차분히 속을 가다듬었다. 강철 산맥 출발 바로 전날인데, 어이없게 죽을 수는 없으니까.
– …그렇다고 진짜 말 안 하네. 사내가 좀스럽기는.
‘응? 뭐? 방금 뭐라고 했어?’
– 아 됐어! 이 쫀쫀한 자식아. 됐으니까 빨리 먹기나 해. 요정 여왕의 행동에는 하나하나 이유가 있는 법이니. 그리고 지금 당장 1, 2 포인트가 아쉬운 지경인데, 네가 이것저것 가릴 처지야?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행동에 이유가 있다?’
화정이 화를 내며 말했다. 왜 화를 내는지, 또 무슨 말은 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가기는 했지만, 아무튼 곧 결심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 어차피 개인 성과 아닌가. 아니면 그냥 개인 욕심이라고 봐도 좋다. 화정의 말마따나 내가 이것저것 따지며 가릴 처지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제야 마르가 내민 정수를 받아먹었다.
『비아트리스 스텔라를 복용합니다.』
“오.”
나는 살짝 입을 매만졌다. 정수를 머금은 순간, 돌연 뭔가 환하게 느껴지는 식감이 입안을 가득히 메워왔기 때문이다. 동시에 톡톡 튀는 감촉도 느껴지기까지. 과연. 이래서 마르가 별 같다고 표현한 건가?
“와아. 와아.”
내가 정수를 먹은 게 그렇게나 좋은 걸까. 까르르 웃어 젖힌 마르는 방실방실 웃으며 양팔을 내밀었다. 안아달라는 뜻.
이내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들어보니, 전보다 확연히 무거워진 무게를 느꼈다. 어이쿠. 그새 또 성장한 건가?
잠시 후.
품에 안은 채 한동안 등을 토닥여주니,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흐아암.” 하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내리자 살짝 졸린 얼굴로 눈을 비비는 마르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잠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상태였다.
“마르야. 이만 잘까?”
“으으응. 아직 코 안 할래요.”
“하지만 졸려 보이는데? 그러지 말고 이만 아빠 침대에서 자자. 봐. 저기 유미랑 도도도 자고 있잖아?”
“싫어어. 오늘은 아빠 옆에 계속 있을 거야아.”
나는 침대에서 고롱고롱 자고 있는 두 영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마르는 연신 하품을 하는 와중에도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더욱 내 품으로 파고들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옷깃을 꾹 움키기까지 했다. 마치, 이대로 절대 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조금이지만 미묘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르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내 말을 거스른 적이 없다. 정확히는 싫다라는 표현을 한 적이 없다고나 할까.
그런데 방금,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확실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이내 마르가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맞췄다. 역시 밀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겠는지 어느새 눈꺼풀이 반쯤 덮인 상태였다. 하지만 그래도 두 눈은 여전히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이윽고 앙증맞은 두 귀가 축 늘어짐과 동시에 마르가 시무룩이 입을 열었다.
“아빠아.”
“응?”
“내일이면…. 또 가는 거예요?”
“…….”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마르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모를 리가 없다. 모니카로 돌아온 이후 거의 모든 클랜원들이 준비다 뭐다 부산을 떨었으니. 그래도 그동안 티를 내지 않아 모르고 있었는데, 전날 어떻게 말을 꺼낸 모양이다.
사실 이렇게 길게 떠나는 게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또 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나는 아빠 안 갔으면 좋겠는데….”
마르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투정 부려서 죄송해요. 아빠.”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마르도 곧바로 사과했다.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마르의 등을 계속해서 쓸어 내렸다. 이내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르의 고개가 꾸벅 꺼트려지며 고른 숨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렇게 마르가 잠든걸 확인한 후,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날은 한없이 어두워져 있었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 남부 원정대가 강철 산맥으로 떠나는걸 축하라도 하듯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모니카의 남문은 이미 각지에서 모인 사용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오늘 공략에 참가하는 사용자들. 참가하지는 못하지만 같은 클랜원을 응원하러 온 사용자들. 아니면 단순히 출발을 구경하러 온 사용자들 등등.
“머셔너리 클랜이다! 머셔너리 클랜이 도착했다!”
“오? 어디어디?”
그것은 이제 막 남문을 나서는 머셔너리 클랜 또한 마찬가지였다.
“배웅은 여기까지만 해주시면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참가 클랜들만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예. 그럼 클랜 로드. 우리는 여기서 떠나시는걸 지켜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없는 동안 클랜을 잘 부탁합니다. 사용자 조승우.”
“하하하. 그건 걱정 마시고 클랜 로드는 그저 생환만 해주시면 됩니다. 모두와 함께요. 뭐, 그래도 강철 산맥이니까. 어디 한두 군데 가볍게 다치는 건 이해해드리겠습니다.”
조승우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농을 건네자 김수현이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런 조승우의 뒤에는 거의 서른 명 남짓한 클랜원들이 각양각색의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은 차희영이었다. 벌개진 눈으로 자꾸만 안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차희영의 시선을 느꼈는지 안현은 볼을 긁으며 헛기침을 했다. 과연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몸 성히 다녀오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언제나 이것밖에 없구먼.”
이만성도 미약한 기침을 뱉으며 조승우의 말을 받았다. 잠시 몸을 돌아본 김수현은 덤덤히 머리를 끄덕였다.
“따로 작별 인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충분히 나눴고, 또 어차피 모두 돌아올 테니까요. 그저 언제나와 같은 일입니다.”
“부디 그러기를 바라네.”
“그럼 거의 모인 것 같으니 우리도 서두르겠습니다. 최고 선봉 부대가 집결에 늦으면 그만한 망신도 없을 테니까요.”
“…….”
이만성은 아무 말도 않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걸 마지막으로 김수현은 바로 몸을 돌려 남부 원정대 집결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30명의 클랜원들이 조용히 뒤쫓기 시작했다.
그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떠날 이들은 떠나고, 남는 이들은 바라볼 뿐.
남부 원정대의 집결지는 바로 성문 앞. 참가하지 못한 사용자들은 성문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워낙 참가자들이 많아 혹시 모를 끼어듦을 대비하고, 정확한 인원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머셔너리가 약간 늦은 편인지, 집결지에는 이미 수천 명의 사용자들이 모여있었다.
하지만 집결지는 생각보다 혼잡한 상황이 아니었다. 예전 소집령 때 기록에 적혀있던 대로, 참가 클랜들은 각각 자리를 찾아 모여있다. 한소영의 지휘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윽고 김수현을 선두로 한 머셔너리 클랜이 집결지에 들어서자 한 여인이 금세 나와 맞이해주었다. 가슴에 그려진 문양으로 보아 이스탄텔 로우 클랜원이었다.
“머셔너리 클랜 참가합니다. 총원 31명입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배치 부대는 알고 계시죠?”
여인이 전원을 훑으며 빠르게 입을 열자 김수현은 가볍게 머리를 까닥였다.
“중앙 부대에서 쭉 앞으로 가시면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한 여인은 이내 집결지를 돌아보며 음성 증폭 주문을 외웠다.
– 머셔너리 클랜 31명. 참가 확인했습니다. 지금 들어갑니다.
그 순간 중앙에 모여있던 사용자들이, 흡사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지며 머셔너리가 지나갈 길을 터주었다.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 김수현은 곧 중앙에서 오연히 서 있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칠흑 빛 갑주에 붉은 망토를 두른 여인은 다름 아닌 ‘전장의 지휘자’ 한소영이었다.
한소영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김수현을 마주보고 서 있었다. 김수현은 잠시 걸음을 정지했다.
“약간 늦었습니다. 같은 도시인데, 면목이 없군요.”
“아니.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10분 일찍 오셨지요. 다른 클랜들이 매우 일찍 모인 거예요.”
“벌써 다 모인 겁니까? 그럼 출발은….”
“이제 한 클랜만 더 오면 되요. 오자마자 바로 출발할 생각이에요.”
그때였다.
– 코란 연합 215명. 참가 확인했습니다. 지금 들어갑니다.
아까 여인의 음성이 울리고 후방에서 약간의 어수선함이 일었다. 후방을 담당하는 코란 연합이 참가함으로써 재배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로써 남부 원정대에 참가하는 모든 클랜이 모였다.
이윽고 서로를 바라보던 김수현과 한소영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소영은 주문을 외운 후 곧바로 입을 열었다.
– 출발 10분 전. 모두 빠른 시간 내에 배치를 끝내도록.
한소영의 음성이 울리자 사용자들이 모두 배치를 재확인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중앙에 계속 서 있는 건 민폐라고 생각한 김수현은 클랜원들 이끌고 가장 선두로 이동해 진을 형성했다. 근접, 궁수, 마법사, 사제 순으로 이루어진 층진(層陣)이었다.
그렇게 배치가 끝나고 모든 사용자들이 자리를 잡았을 즈음.
– 총 36개 클랜. 전투 사용자 3847명. 거주민, 비 전투 사용자 454명. 제 2차 강철 산맥 남부 원정대. 총원 4301명 전원 참가 확인했습니다.
– 남부 원정대. 강철 산맥을 향해 출발한다.
참가 완료 보고가 끝나고, 한소영이 손을 들며 출발 지시를 내렸다. 그윽한 목소리가 허공에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이어서 구경하던 사용자들이 하나가 되어 커다란 환호를 질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강철 산맥의 공략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런 응원과 환호와 기도 속에서, 가장 선두에선 머셔너리 클랜이, 그 중에서도 김수현이 첫 걸음을 떼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남부 원정대에 참가한 사용자들은 묵묵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로소 북 대륙의 제 2차 강철 산맥 공략이….
아니. 김수현의 2회 차 첫 강철 산맥 공략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3주 후.
최고 속도로 행군한 남부 원정대는, 탈없이 강철 산맥 전초 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강철 산맥의 진정한 시작이네요. 개인적으로 두근두근합니다.
저번에 사탄의 대화에서 밝혔지만, 강철 산맥은 크게 4개의 지역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 중 1지역은 이미 거의 돌파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만. 나머지 3개의 지역에서는 하나하나 큼지막한 이벤트가 잡혀있고, 그와 연관된 여러 사건들도 얼기설기 얽혀있지요.
강철 산맥을 구상할 때 처음 떠올렸던 소재는, E-SPORTS였습니다. 제가 스타 크래프트1을 정말로 좋아했거든요. 응원하던 프로게이머도 있었고요.(여담이지만 테란이 주종인 프로게이머였습니다. 하하하.)
아주 예전에. 그러니까 제가 어렸을 때 스타 결승전인가? 아니면 4강전인가. 아무튼 경기를 보는데 아마 5판 3선 승제였을 겁니다. 두 프로게이머 중 한 명이 박정석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판부터 정말로 치열하게 경기를 하는 겁니다. 거의 1시간 가깝게 하거나, 넘을 정도로요.(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딱 하나 기억하는 게 해설자의 말인데, 해설자가 그러더군요.
“아니 이제 첫 경기잖아요. 제 1경기요. 이제 겨우 첫 경기에 불과한데 이렇게 치열할 수가 있나요? 남은 경기는 어떻게 하려고, 또 어떤 경기를 보여주려고 두 선수가 시작부터 이러는 걸까요?”
대충 이랬던 걸로 기억합니다.
거기서 강철 산맥의 구상을 떠올렸습니다. 개인적으로 강철 산맥 파트에서 바라는 게 있다면, 그와 비슷한 느낌을 드리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