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49
00548 수상한 기운. =========================================================================
어젯밤 회의 이후 이효을은 밤새 계속해서 고민에 시달렸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새벽이 밝아올 즈음 말하는 게 좋겠다 생각, 결국 천막에서 나오기까지 했지만 이효을은 종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일단 자세한 일은 함구해달라는 조성호의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게 밤은 조용히 흘러갔고, 남부 원정대는 아침 일찍 출발했다.
비로소 강철 산맥 안으로 들어간 남부 원정대의 모습이 사라졌을 즈음, 이효을은 가느다란 한숨을 흘리며 천막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말간 빛이 흐르는 수정구를 꺼내 마력을 흘려 넣었다. 통신용 수정구였다.
잠시 후, 약간의 잡음이 흐르고 한 사내가 얼굴을 비췄다.
(이효을인가.)
“그래. 나야. 지금 상황은 어때?”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하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동요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떻게든 최대한 진정하며 요새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지.)
“사용자 주호는?”
(그 일이 있은 후로 심한 충격에 빠진 상태다. 아직 변한 건 없어.)
“변한 건 없다고….”
이효을이 살며시 말끝을 흐리며 이마를 쓸어 넘기자, 조성호는 살짝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왜 통신한 거지? 무슨 특이 사항이라도 있는 건가?)
이효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남부 원정대가 도착했고, 오늘 아침 일찍 떠났어.”
(호. 상황은 전달했고?)
“드러난 것만. 그런데 머셔너리 로드가 조금 의심스러워하는 거 같아. 어제 그러더라. 동부의 진군 거리가 짧은 것 같다고.”
(그렇군. 하기야 그 정도의 사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하지.)
“너희, 더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야?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건 무리다. 지금 우리 원정대는 처음과 같은 결속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 그러니 설령 더 들어가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남부 원정대가 도착한 이후에야 가능할 거다.)
조성호의 단호한 목소리에 이효을은 더는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금 수정구에 비치는 사내가 저렇게 말한 이상, 절대 결심을 바꾸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색을 느꼈는지 조성호가 약간 누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효을. 너무 걱정 마라. 남부 원정대와는 내가 잘 이야기해볼 테니까. 그나저나 총 사령관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라고 했었나?)
“그렇기는 한데 너희와는 조금, 아니 상당히 다른 구성이야. 선봉, 중앙, 후미 3개의 부대로 구분돼있는데, 각 부대가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
(머셔너리 로드는?)
“선봉. 그중에서도 최고 선봉.”
(더 잘됐군. 아무튼 알겠다.)
“조성호! 잠깐만!”
그때였다. 조성호가 통신을 끊으려는 듯 막 얼굴이 멀어진 찰나, 이효을이 다급히 조성호를 불렀다.
(응?)
“잊지마.”
그렇게 말한 이효을은 별안간 수정구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런 이효을의 얼굴은 어느새 한없이 진지해져 있었다.
“어디까지나, 공략이 우선이라는걸.”
소곤거리는듯한 목소리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도 좋을 만큼 나직했다.
잠시 이효을을 빤히 응시하던 조성호는, 이내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공략이 우선이지.”
*
약간의 구름은 꼈지만, 아름답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아니. 해가 서서히 중천으로 오르는걸 보면 정오 즈음이라 봐도 좋을까.
간간이 바람도 불어오는 게 상쾌하기 그지없는 날씨였으나, 산줄기를 걷는 남부 원정대 사용자들의 얼굴은 그다지 상쾌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강철 산맥 내부로 진입한 이상 하하 호호 웃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사용자들의 얼굴은 확실히 이상했다. 힘들어한다기보다는, 약간 어색해 보인다고나 할까?
그렇게 남부 원정대가 강철 산맥을 통과하는 가운데, 선두에서 물 흐르듯이 걷던 김수현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여인이 사용자들을 이리저리 헤치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얇은 가죽 갑옷을 걸친 여인의 가슴에는 이스탄텔 로우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윽고 여인이 다다르자, 김수현은 마치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양 바로 머리를 돌렸다.
“머셔너리 로드. 총 사령관님의 전언이에요.”
“예. 말씀하세요.”
“이 장소에서 휴식 대기했으면 한다고 하시네요. 후미 부대가 살짝 흐트러져서 추스를 시간이 필요해요.”
“어려울 것 없죠. 모두 정지! 여기서 잠시 휴식한다!”
김수현이 조금도 지체 않고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러자 사용자들은 거의 동시에 걸음을 정지하고 나서, 주저앉거나 연초를 꺼내는 등 각자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딱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각각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사 방향을 경계하는 것. 어디서 어떤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대기나 휴식 시간에도 경계의 끊을 놓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신속한 전환이 이루어짐이 가능한 것은, 도시를 떠난 후 3주간의 행군에서 있었던 훈련의 성과였다.
빠른 처리에 만족한 듯, 여인은 미미하게 웃으며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앞으로 이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휴식이나 출발은 알아서 가늠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알겠습니다.”
김수현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내 볼 일을 마친 여인이 돌아가는 동시, 언뜻 그 말을 들은 한 사내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연초를 힘껏 빨아들였다.
남부 원정대가 전초 기지를 떠난 지 어느새 이레라는 시간이 흘렀다.
7일.
짧다면 짧은 시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적어도 강철 산맥을 통과하는 사용자들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들어온 이후 매 순간을 잔뜩 긴장하며 보내야 했던 만큼, 짧다고 느껴졌다면 그게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공략에 참가한 이상 각오한 일이었고, 나름 베테랑들이니만큼 익숙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초를 태우는 사내를 비롯한 여러 사용자들의 얼굴이 이상한 것은, 기실 다른 문제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김수현이 행군하는 방식에 있었다.
첫 번째. 행군이 너무 빠르다.
물론 속행이라는 경우도 있지만, 그거야 주변이 안전의 확실하게 확보됐을 때의 이야기였다. 비록 동부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다고는 하나, 강철 산맥은 아직 안정화된 지역이라 보기는 어렵다. 즉 이러한 지역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행군 방식이었다.
두 번째. 궁수를 활용하지 않는다.
자고로 궁수란 무엇인가. 민첩 능력치가 특화된 빠른 발이 주특기인 이들이다. 능력 또한 그렇다. 천리안이나 추적에 관련된 능력을 생각해보면 위험 탐지에 최적화된 사용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행군 시 가장 앞에 서서 일행을 이끄는 게 정석인데, 김수현은 그러지 않는다. 그저 가끔 측면으로만 활용할 뿐, 단 한 번도 궁수를 선두에 내세우지 않았다.
즉 정석으로 알려진 기초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화계 공략의 여파가 닿은 지역이니까.
조금 시간이 흐르고는, 그래. 그래도 머셔너리 클랜이니까.
그렇게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면 갈수록 사용자들은 의구심을 품었다. 오히려 행군 속도가 떨어지기는커녕 더더욱 높아질 기미마저 보이고 있었으니까.
결국에는 후미 부대의 배열이 흐트러졌다는 보고까지 나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사용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총 사령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니 겉으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힐 뿐.
이러다 갑자기 괴물들이 떼거지로 출현하면 어떡하지.
그렇게 생각한 사내는 거의 다 태운 연초를 땅에 비비며 푹 한숨을 흘렸다.
그때였다.
“괜찮으세요? 얼굴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누군가 사내의 앞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일순 깜짝 놀란 사내는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로브와 어깨에 살짝 닿는 머리카락. 그리고 봉긋하게 솟은 가슴 아래 그려진 칼과 방패 문양을 보는 순간, 사내는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머셔너리 클랜원이구나.
“안색이 조금 편찮으신 것 같아요. 간단한 회복 주문이라도 걸어드릴까요?”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 괜찮으세요?”
“예 예. 어…. 잠시만요!”
“네?”
“혹시 머셔너리 클랜이십니까? 그러니까, 그…. 광휘의 사제라는….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요.”
자신을 알아봤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걸까. 실룩실룩. 여인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티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한쪽 입꼬리가 실룩 올라가는 건 막지 못했다.
“흐흠. 네! 맞아요! 제가 바로 광휘의 사제, 안솔이라고 하죠!”
“아. 그렇군요. 그럼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에~. 그러시군요? 어떤 게 궁금하세요?”
“으음. 저…. 실은 선봉 부대장님 말입니다.”
사내는 말을 하면서도 살그머니 여인, 아니 안솔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묘한 반항심에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사내 또한 선봉 부대에 포함된 사용자. 부대장에 대한 의문 제기는 어찌 보면 하극상으로 번질만한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기에 사내는 최대한 완곡하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게 아니라. 선봉 부대장님은 왜 궁수들을 선두에 활용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아. 그거야 당연하죠.”
안솔은 곧바로 회답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 사내도 한순간 전혀 이상한 바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행군이 너무 빠른 감도 없잖아…. 예?”
“활용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안솔 한 번 더 힘주어 말하고는, 왜 그런걸 물어보느냐는 듯 되레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다.
사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활용할 필요가 없다고?
어느새 주변의 시선은 안솔과 사내에게 쏠린 상태였다. 그리고 주변 사용자들의 얼굴도 사내의 얼굴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금 전 안솔의 말은, 각 클래스가 지닌 특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한 시선을 느꼈는지 안솔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는 천연덕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마력 감지 사용할 줄 아세요?”
“그,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한 번 사용해보시겠어요? 그럼 아실 수도.”
“……?”
한순간 ‘이게 지금 나를 놀리나?’라고 생각한 사내였지만, 곧 잠자코 마력 감지를 일으켰다. 일단 한 번 하라는 대로 해보자는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으응? 이상하다. 저는 확실하게 느껴지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이 주변에 마력 감지는 저 밖에….”
“아~. 지면에 마력을 흘리셨구나. 그럼 지면을 대상으로 말고, 조금 더 깊숙이 해보세요. 지면 속을 투과한다는 느낌으로요.”
안솔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땅을 탁탁 밟았다.
사내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안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다. 확실히 지면 아래로 마력을 투과해 감지를 돌리는 방법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방법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진동을 통해 전달받는 정보의 정확성이 조금 더 높아지는 효과는 있지만, 마력의 소모가 너무 심해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애당초 마력 감지 자체가 알게 모르게 마력의 소모를 요구하는 어빌리티라, 웬만한 사용자들은 그냥 필요할 때마다 능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내는 여전히 한숨을 푹푹 흘리면서도, 안솔이 말한 대로 지면 아래로 깊숙이 마력을 흘려 보냈다.
그 순간이었다.
“어헉?”
한순간 사내의 입에서 격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놀란 이유인즉슨, 흘려 보낸 마력에서 가히 수십 개에 이르는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장 앞의 안솔도 그렇고, 전방에서도 수십 개의 마력의 흐름이 각양각색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31명의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모조리 마력 감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내가 진정 놀란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서 느낀 흐름들을 모조리 덮어버리는 광대한 마력의 흐름.
그 흐름은 사내가 흘린 마력이 새 발의 피라고 생각될 만큼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또한 정교했다. 흡사 이 수천 명을 넘어서 일대를 모조리 아우르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이제 아시겠죠? 우리는 궁수가 필요 없어요.”
사내의 입이 쩍 벌려지는 것을 보았는지 안솔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사내는 황급히 입을 닫으면서 선두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두에는, 김수현이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지면에 대고 있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
차분히, 그러나 세심하게 주변을 둘러본다.
“으아. 지루해.”
그러던 도중 나날이 이어지는 행군이 지루했는지, 누군가 뒤에서 하품을 하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로 보아하니 유정이가 분명하다.
나는 살그머니 시선을 돌려 눈짓으로 경고를 보낸 후,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시커멓게 타오른, 이제는 거의 형체도 찾아볼 수 없는 강철 산맥의 풍경. 이효을의 말에 따르면 동부는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화계 계획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이래서야 행군이 늦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입맛을 다시면서도 나는 여전히 주변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흐레.
전초 기지를 떠난 지도 아흐레라는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그동안 그 어떤 습격도 받지 않으며 행군을 지속했다. 말 그대로 오직 행군, 행군, 행군의 지속이었다.
물론 습격을 받지 않은 건 고무적인 일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내 기억에 따르면 여기에 이르기까지 이미 수십 번은 괴물과 전투를 치렀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전투는커녕 괴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발견한 것이라고는, 이효을의 말대로 부락으로 추정되는 장소와 도망친 흔적뿐.
강철 산맥도 엄연히 여러 생물이 거주하는 지역인만큼, 그러한 분포가 흐트러졌다는 건 딱히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사기의 문제도 있다. 행군이 계속해서 지속되면 사용자들은 지루함에 지쳐버린다. 중간중간 적당히 괴물들이 나와야 처음의 날카로운 기세를 버무릴 수 있는데, 항상 똑같은 패턴의 날을 보내면서 점점 무뎌져 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결국 들어온 이상 후퇴는 없으니까. 일단은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주변에 뿌려놓은 마력 감지의 밀도를 한층 높이며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그렇게 9일차 해 질 녘이 될 즈음.
우리는 비로소 동부 원정대가 멈춘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느덧 눈앞으로 차마 요새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캠프가 서서히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마침내 2주일 전 출발한 동부 원정대와 합류한 것이다.
“남부 원정대가 도착했습니다!”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이미 도착하기 전 연락은 넣어놓았다. 이내 나무로 급조한 듯한 문이 불쾌한 소음을 울리며 활짝 개방됐고, 그 안으로 수백의 사용자들이 좌우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정 중앙에는, 한 사내가 홀로 우뚝 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 클랜 로드. 조성호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무사 합류를 환영합니다.”
“별말씀을. 성공적으로 첫 공략을 마친 점 축하 드립니다.”
문안으로 들어간 후.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자 조성호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머셔너리 로드에게 들으니 오히려 부끄럽군요. 흐흠. 그나저나 남부 총 사령관은….”
“아마 중앙 쪽에 계실 겁니다.”
조성호의 시선이 언뜻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내 한두 번 입을 열었다 닫은 조성호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군요. 아무튼, 여기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실 테니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죠. 아직 요새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그래도 일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부지는 넓게 잡았습니다. 하하.”
조성호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 억지가 가미됐다고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아니. 비단 조성호만 그런 게 아니었다.
좌우로 보이는 동부 사용자들의 사이로도 알 수 없는 미묘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겉으로는 환영한다는 기색이나, 뭔가 모르게 불안해하는 것처럼. 흡사 요새 전체가 착 가라앉은 느낌이랄까.
아마 한소영도 필시 이 기운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침착히 속을 추슬렀다. 우선은 이야기를 들어보자.
“알겠습니다. 그럼….”
“아차. 머셔너리 로드.”
그때였다. 막 회의에 대해 물어보려는 찰나, 조성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이윽고 조성호는 저기 멀리 떨어져있는,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머셔너리 로드의 천막은 따로 잡아두었습니다. 비록 별것은 없지만, 그래도 다른 천막보다는 사용하시기 나을 겁니다.”
가리킨 천막은 중앙에 하얀색으로 쳐진, 눈에 잘 띄는 천막이었다.
“그럼, 저는 잠시 이스탄텔 로우 로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오지요.”
그리 말한 조성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야기를 나누고 오지요 라.
그냥 흘려 넘기기에는 의미심장한 말투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조성호가 가리킨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
깊은 밤.
나는 삐걱대는 허름한 침대에 누워 어둠이 스며든 천막을 바라보았다.
동부와 합류하고 나서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기껏 기대했던 지휘관 회의도 동부의 요청으로 내일 아침으로 미뤄졌다.
그저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지루하다, 기대하던 강철 산맥이 아니다 등의 투정을 부리는 애들을 혼낸 후, 각자 천막 안으로 들어가 내일을 대비할 잠을 잘 뿐. 물론 경계를 서야 하는 사용자들도 있겠지만, 나는 오늘 순번에 포함돼있지 않다.
지그시 눈을 감는다.
단조롭다. 단조로워도 너무나 단조롭다.
공략이 이렇게나 순조로이 진행되는 게 매우 의심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착착 들어맞아 순조로운 게 아니다. 무언가 얽히고 설킨듯한…. 아니. 모르겠다. 그냥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한 단조로움이랄까. 마치 조만간 쾅 터질듯한 그런 느낌 말이다.
문득, 갑갑한 기분이 한 가득 차오른다.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까닭 없이 갑갑한데, 아는 게 없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결국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장막을 내려 입구를 가리고 나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대로 계속 고민하는 것 보다는 그냥 잠이나 자는 게 더 나을 것 같았기에.
그렇게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려 할 무렵.
부스럭.
돌연, 입구를 가린 장막이 조심스럽게 걷히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이어서 검은 인영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그러한 모습을 확인하자 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암살자라면 저렇게 당당히 들어오지는 않을 테니까.
검은 인영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과 동시에, 나는 차분히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내가 일어난 것을 확인했음에도 인영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윽고 약간 피로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사용자는, 다름 아닌 조성호였다.
“깨어있으셨군요. 다행입니다.”
조성호는 평소의 깔끔한 목소리가 아닌 약간 허스키한 음색으로 말했다.
“예. 그런데 이 시간에 어쩐 일로…? 회의는 내일이라고 들었습니다만.”
“회의는 확실히 내일로 미뤘지요. 아무튼, 우선 이런 시간에 찾아와 미안합니다. 머셔너리 로드.”
“…….”
“회의 때문에 찾아온 건 아닙니다. …머셔너리 로드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이야기가 아니라?
“물론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머셔너리 로드와 단 둘이 말입니다.”
의아한 기색을 읽었는지 조성호는 바로 입을 열었다.
나는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잠자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나왔다.
느닷없다는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에는, 조성호의 얼굴이 너무나 절박해 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지금 느끼는 갑갑함을 풀어줄 돌파구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한 몫 했다.
침대에서 나온 것을 허락이라 여겼는지 조성호는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장막을 빠져나갔다.
밖은 여전히 조용했다. 경계를 서는 사용자들을 제외하면 누구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지휘관용 천막은 따로 모여있는 만큼, 그리 긴 시간 동안 걷지는 않았다. 바로 옆에 동부 지휘관들이 천막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큼지막한 천막으로 들어간 조성호는, 갑작스럽게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라이트 스톤을 키기 않은 탓에 내부는 시커먼 어둠이 들어차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천막 내부에 또 하나의 천막이 있었다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여러 겹의 장막으로 가려진 비밀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안력을 높이자 두 손으로 휘장을 잡고 서 있는 조성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조성호의 바로 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머셔너리 로드….”
그러자 조성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머셔너리 클랜은, 용병 클랜이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하지만 일단 틀린 말은 아니기에, 나는 긍정하기로 했다.
“그렇습니다만.”
“그러면 말입니다. 제가 알기로 용병은 돈을 받고 의뢰를 수행하며, 의뢰 내용을 철저히 엄수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용병으로 참여했지만, 현재 원정 대원이라는 신분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조성호가 의뢰라는 말을 꺼냈다. 수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혹시나 싶어 원정을 우선한다는 의미로 못을 박아두자, 조성호는 약간 힘이 빠진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잠시 후.
“하지만, 지금 제가 기댈 곳이라고는 머셔너리 로드밖에 없습니다.”
“…고려 로드? 도대체.”
“예. 아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시겠지요. 실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지금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머셔너리 로드에 의뢰를, 아니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구하고 싶습니다.”
“……?”
그리고 그 순간.
“일단…. 후. 거두절미하고, 일단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조성호는,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 두 손을 좌우로 한껏 젖혔다.
사륵, 사르륵!
이윽고 장막이 걷히며 조성호의 몸이 가리는 부분을 제외한, 일부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뭔가, 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 많이 늦게 올렸죠? 그만큼 내용을 길게 적느라 상당히 늦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연참이라고 생각해주시고 부디 용서해주세요. 하하하.
아. 그리고 어제 적어주신 코멘트들은 잘 보았습니다. 확실히 제가 조금 성급하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전자 담배는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실은 오늘 금연을 해보려고 했는데, 점심 먹고 바로 실패했습니다. 욕구를 참을 수가 없더군요. 코멘트에 금연에 성공하셨다는 분들도 많으신데, 정말 대단하시다고 느꼈습니다.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