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50
00549 3년 전의 흔적. =========================================================================
8년 전, 홀 플레인에 한 여인이 있었다.
한없이 자애로운 얼굴에 포근한 미소가 어울리는, 마치 천사와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느 사용자와 같이 갑작스럽게 소환된 입장이었지만 여인은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다.
또한, 여인은 강자였다.
강자지존으로 돌아가는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 여인은 홀로 그 법칙을 거부했다.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아름다운 여인은 항상 남을 도와주고 싶어했다. 자애를 베푸는 사랑과 정이 깊어, 항상 누군가를 돕고 싶어 했다.
어느 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내는 엄마처럼, 또 어느 때는 따뜻하게 보듬고 보살피는 누나처럼.
여인은 진정으로 강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약자를 존중할 줄 아는 사용자였다.
그래서 여러 사용자들은 그 여인을 좋아했다. 비록 사용자인 이상 한 클랜에 적을 둘 수밖에 없는 입장이나, 여인이 베푸는 사랑은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사용자 거주민도 가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한 결과, 적대 클랜의 사용자들도 그 여인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여인은 평소 자신이 보살피던 사용자들을 모아놓고 입을 열었다.
– 이번에 강철 산맥 공략에 참가하게 됐어요.
여인의 보살핌을 받던 사용자들을 극구 만류했다. 예나 지금이나 강철 산맥의 악명은 여전했으니까.
하지만 여인은 상냥히 웃으며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미안해요. 여러분들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이건 제가 참여해야 하는 일이에요.
– 너무 걱정 말아요. 꼭 돌아올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여인은 결국 강철 산맥 공략에 참가하고 말았다.
그리고 채 이레도 지나지 않아, 원정대의 패퇴 소식이 북 대륙 전역에 퍼졌다. 5000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했으나, 돌아온 인원은 500명밖에 되지 않았다. 생환 명단에 여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여인을 알고 있는 사용자들은, 거주민들은 여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빙긋 웃으며 나타나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날이 지나고 달이 지났음에도, 여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꼭 돌아오겠다는 말을 믿고 희망을 갖고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여인의 돌아오는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여인은 서서히 잊혀져 가는듯했다.
*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불에 시커멓게 타오른 삐쩍 마른 나무였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순간, 무언가 이상한 점들이 느껴졌다.
새까맣게 타서 굳어버린 두 개의 가지. 가지 못지않은 길이를 보이는 두 개의 뿌리. 그리고 가지와 뿌리를 잇는 몸통.
마지막으로 몸통에 돋은 둥그런 형체를 확인한 순간,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나무를 살며시 만져보았다. 가칠가칠한 게, 흡사 연탄을 만지는듯한 감촉이다.
…나무가 아니었다.
“시체입니까?”
“…정확히는 불에 탄 시체요.”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조성호를 돌아보았다. 착잡해 보이는 얼굴이다.
“듣기로는, 동부 원정대에 사망자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사망은커녕, 습격도 안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사실입니다.”
“그럼 이 시체는 무엇입니까?”
“…일단 잠시 나와주시겠습니까.”
나직이 말한 조성호는 몸을 돌려 탁자로 걸어갔다. 탁탁, 무언가를 건드리는 소리와 함께 어둡던 천막에 미약한 빛이 생겼다. 라이트 스톤으로 불을 밝힌 것이다.
이내 장막 밖으로 나온 찰나, 나는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언제 들어온 걸까. 한 사내가 입구에 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당신은….”
사내는 아무 말도 않고 꾸벅 머리를 숙였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다.
“미안합니다. 이야기에 필요하다고 생각해 제가 불렀습니다. 사용자 주호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사내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바바라 소집령에서 화계 공략 계획을 건의했던 바로 그 사용자였다. 중앙 관리 기구 소속 사용자가 지금 여기 있음은, 아마 연락책으로 참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잠시 후, 우리 세 명은 아무 말없이 조성호가 이끄는 대로 탁자에 둘러앉았다.
주변은 여전히 어둑했다. 오직 라이트 스톤에서 흘러나오는 탁한 불빛만이 근처를 미약하게나마 밝혀줄 뿐.
곧 무거운 침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려 로드. 제가,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조성호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을 무렵, 주호가 침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양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리던 조성호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주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머셔너리 로드. 우선 이렇게 와주신 점 정말로 감사 드립니다.”
“아니요.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온 것은 고려 로드와의 안면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 그렇습니까.”
“사실 두 분께서 저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상황을 모르니까요. 허나 그런 만큼,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할 생각입니다.”
“…….”
“그걸 인정할 수 없다면 저는 지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듣고 튀었다는 말은 듣기 싫으니까요.”
스스로 생각해도 냉정하다 생각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꼭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저들이 도대체 어떤 걸 기대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현재 남부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한 상태였다.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주는 한소영을 생각해서라도 다른데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잠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주호는 잠시 조성호와 시선을 교환하는 듯싶더니 살짝 고개를 떨궜다.
“예. 좋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씀이지요.”
그렇게 말한 주호는 입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아, 우선은 경청해보기로 했다.
“머셔너리 로드. 혹시 고은솔이라는 사용자를 알고 있습니까?”
“고은솔?”
“예. 구 황금 사자 클랜 소속 사용자이며, 10강 중 한 명이었습니다.”
“구 황금 사자 클랜에, 10강이라.”
나는 지그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흐릿하다. 구 10강이라면 사실상 거의가 강철 산맥 이후로 사망했기에 딱히 기억할만한 접점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도 기억날 듯 말듯 하는걸 보면 나름 이름있는 사용자인 것 같은데.
그 순간, 아주 예전에 고연주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강철 산맥을 공략하는데 황금 사자의 10강 중 세 명이 참가했어요. 그 중 한 명. 그러니까 황금 사자 로드의 생존은 확보한 상태고, 두 명 중 한 명은 사망 확인.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실종됐다고 하네요.’
아. 그 사용자를 말하는 건가?
고은솔…. 그러고 보니 황금 사자 로드와 묶어서 나름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사용자 고은솔. 다소나마 들어본 기억은 있는 것 같습니다.”
“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알고 계셨군요. 머셔너리 로드가 알 정도라니, 역시 그분은….”
주호는 흠칫 놀라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다 감동한 것처럼 가늘게 몸을 떨기까지. 고작 기억한다는 것에 어떤 감동을 받아서 저러는 걸까.
당최 사정을 몰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장막을 돌아보며 툭 던지듯 내뱉었다.
“혹시, 저기 놓인 불탄 시체가 그 고은솔이라는 사용자입니까?”
“아닙니다!”
회답은, 즉각 들을 수 있었다. 지금껏 골골거리며 죽기 일보 직전처럼 보이던 주호가 벌떡 몸을 일으킨 것이다. 이내 물끄러미 쳐다보자 주호는 실수했다는 얼굴로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아, 아니. 그러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후. 머셔너리 로드. 아까 보셨다시피 시체는 불로 인하여 심하게 훼손된 상태입니다. 아직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주호가 어버버 말을 잘못하자 조성호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그러더니 주호를 살짝 노려보았다. 입을 다물라는 신호 같은데, 아마 조성호가 다시 말을 이어갈 모양이다. 나로서도 좋은 일이었다. 조성호는 적어도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였으니까.
주호가 도로 자리에 앉는 사이 조성호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무언가 심한 갈등이 이는 듯 목울대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머셔너리 로드. 일단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바라던 바입니다.”
이윽고 조성호는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강철 산맥에 생존자가 있다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예?”
“그러니까 3년 전, 강철 산맥으로 들어간 사용자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믿으시겠냐는 말입니다.”
“푸.”
그 순간, 나는 바람 섞인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터뜨린 웃음이었다. 꽤나 심각해 보인 터라 나도 약간 진지해진 상태였는데, 갑작스럽게 뜬금없는 말을 내뱉지 않는가. 설마 웃으라고 말한 건가?
“하, 하하. 아. 정말 미안합니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말이라서요.”
나는 결국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아니.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생존자? 그럼 3년이 넘는 동안 강철 산맥에서 살아남았다고?
그건 정말로,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조성호와 주호가 지금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불탄 시체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은데. 그러면 뭐, 나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강철 산맥에 어떤 괴물들이 존재하는지 아는 만큼, 왜 저런 시체가 나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강철 산맥도 9일차. 조금 이른 감은 없잖아 있지만, 슬슬 그놈들이 나올 만도 하다.
잠시 후 멍한 눈초리를 보내는 조성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거짓말이라기보다는, 그냥 믿을 수가 없네요. 세상에. 강철 산맥에 생존자라니요.”
“머셔너리 로드.”
“고려 로드? 잠시만요. 저 시체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봅시다.”
결국 나는 그만 자리를 파하기로 마음먹었다. 기대와는 달리 그다지 영양가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 두 사내의 발상을 조금만 바꾸어주면 된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시체가 사용자가 아니라 괴물의 시체라는 생각이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역이니만큼, 우리와 비슷한 괴물이 출현할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게 더 설득력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게 아닙니다.”
“설령 사용자의 시체가 맞는다고 해도, 생존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차라리 이번 공략에 몰래 따라오다가 화계에 휘말린 사용자일 수도 있겠지요. 그쪽일 경우에는 자업자득이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조성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세차게 머리를 저으며 힘주어 말하기까지 했다.
나는 뚱한 기분으로 조성호를 응시했다. 적어도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는 생각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고집을 부리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조성호는 한두 번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갑자기 품으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 쪽으로 쭉 밀어주었다. 그 무언가는, 다름 아닌 기록이었다.
“일단 한 번 보시죠. 머셔너리 로드와는 아마 그 이후에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살짝 시선을 내렸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일단은 속는 셈치고 읽어볼 생각이었다.
『계약서(Contract).』
1. 사용자 고은솔과 거주민 줄리앙 피트 쿠란은 이하 아래 내용에 따라 상호 계약을 맺는다.
2. 사용자 고은솔은 거주민 줄리앙 피트 쿠란을 보호하며, 힘이 닿는 한 성심껏 돕는다.
3. 거주민 줄리앙 피트 쿠란은 사용자 고은솔을 친엄마, 혹은 친언니처럼 믿고 따르며, 함부로 죽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4. 1, 2, 3의 계약은 이후 4년간 유효하며, 거주민 줄리앙 피트 쿠란이 성년이 되었을 시 계약을 해지한다. 다만 해지 시 보호자로써 사용자 고은솔의 동의가 필요하다.
사용자와 거주민간의 계약서. 내용 자체는 꽤나 재미있었다. 나와 비비앙이 맺은 계약과는 정반대의 내용이 적혀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걸로 어쩌라는 걸까? 조성호는 또 왜 갑작스럽게 이 계약서를 내민 걸까?
“아까 말했듯이 고은솔은 3년 전 강철 산맥에 참가한 사용자중 한 명입니다. 머셔너리 로드. 어떻습니까.”
어떻습니까?
조성호는 마치 잘 생각해보라는 듯 조곤조곤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확신에 찬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아.”
그 순간, 나는 짧게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사용자. 거주민. 계약서.
이 세 관계를 떠올린 순간, 계약서에 자동적으로 실행되는 하나의 계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도, 예전에 겪은 적이 있다. 뮬에 부랑자들이 쳐들어왔을 때, 클랜원들은 나의 생존을 확신했다. 비비앙 덕분에.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4달 전. 그러니까 강철 산맥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화됐을 때, 한 거주민이 중앙 관리 기구를 찾아왔습니다. 정확히는 저를 말이지요.”
돌연 아까 이후로 가만히 있던 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올해로 성년이 된 그 거주민은 계약서를 들고 신전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찾아간 신전에서, 무척 놀라운 답변을 들었습니다.”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이어지는 말이 내 예상과 맞는다면, 설마 했던,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조건의 불만족…. 이라고 하더군요. 머셔너리 로드. 4번째 조건을 다시 한 번 봐주십시오.”
4번째 조건. 해지 시 보호자로써 사용자 고은솔의 동의가 필요하다.
“설마….”
주호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 사용자 고은솔의 생존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아직은 계약의 해지가 불가능하다…. 이게 바로 신전의 답변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무언가 쿵 내려앉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첫 사건의 시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 파트를 구상할 때 가장 고민이 들었습니다. 단순한 생존에 관한 개연성뿐만이 아니라, 계약서 설정, 클랜간의 관계, 원정대 등등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거든요. 하하하.
아 여러분. 죄송한데, 내일도 또 늦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내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나가야 하는데, 오후 늦게 돌아옵니다. 아마 다음 주 월요일까지는 계속해서 바쁠 것 같네요.
그래도 최소한 일일 연재는 펑크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바쁜 날이 지나면 다시 자정 연재가 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PS. 쪽지는 주말 중으로 전부 답변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