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65
00564 싱크 홀(Sink Hole). =========================================================================
벤다.
촤악!
찌른다.
푸욱!
그리고, 터뜨린다.
꽈꽝!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피를 분수처럼 쏟으며 무너지는 괴물들. 자세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 내가 죽인 수만 해도 100마리는 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다.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놈들이 보이고, 검이 가는 곳마다 여지없이 걸려든다. 조금도 방심할 수는 없다. 아차 하는 순간 당하는 건 순식간일 테니.
– 키에에엑!
바로 지금처럼.
나는 차분히 호흡을 고른 후 무검을 역수로 잡았다. 그리고 괴물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달려드는 순간, 주먹 쥔 왼손으로 두개골을 강하게 후려갈겼다. 뭉툭한 손맛. 잠시 후, 입에 잔뜩 머금은 물을 뿜어내는 것처럼 놈의 아가리에서 핏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 키르르르르륵!
아직 죽지 않았다. 그래도 충격이 아주 없지는 않은 듯 움직임이 상당히 굼떠졌지만, 놈은 여전히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나를 씹으려 들었다. 나는 바로 오른손을 들어 역수로 쥔 무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비틀며 좌우로 세게 헤집자, 비로소 온몸을 부르르 떨며 하릴없이 무너진다.
“후…. 응?”
그렇게 한 놈을 추가로 처리했을 무렵, 돌연히 등에서 찌릿한 느낌이 전해졌다. 나는 얼른 몸을 돌려 시선을 들었다. 여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느껴졌다. 언덕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하면서도 익숙한 기운들을.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비비앙이 마수 군단을 소환했다. 그러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걸까.
“잘하고 있으려나.”
그래. 한소영의 능력이라면 분명 막고도 남을 터.
우선 골짜기부터 차근차근 정리할 생각에 나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당혹한 기분을 느꼈다.
“와하하하하하!”
한 사내가 우렁찬 웃음을 터뜨리며 거대한 대검을 내려찍자, 괴물이 그대로 두 동강이 나버린다.
“끼히히히히히!”
한 여인이 미친년처럼 웃어 젖히며 창을 올려 젖히자, 괴물은 사타구니에서 핏물을 뿜으며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이윽고 눈깔을 희번덕거리며 다음 먹잇감을 찾아 달려가는 사내와 여인. 비단 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어느덧 골짜기는 괴물이 내뿜은 피와 체액 냄새로 진동을 하고 있었다. 사용자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괴물들 사이를 누비며 악착같이 무기를 박아 넣는다.
일방적인 학살. 마치 누가 누가 많이 죽이나 내기라도 했는지, 앞다투어 괴물을 찾아 죽인다.
이제는 난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그저 무기를 꼬나 쥔 사용자들이 무작정 앞으로 돌격해 들어가는 것에 불과할 뿐.
아주 나쁘지는 않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 한정해 생각해보면, 저렇게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키킥, 키키킥, 키키키킥!”
사용자들의 상태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는 것. 말인즉, 정도가 지나쳤다고나 할까.
어느 여인은 쓰러뜨린 괴물의 촉수를 와짝 깨물어 물어뜯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눈물을 죽죽 흘리는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하다.
짚이는 바가 없는 건 아니다.
광화는 사용자 내면에 잠든 감정을 폭발시키는 능력. 근래에 느낀 감정일수록 더욱 커다란 효과를 볼 수 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 여인은 괴물에 무척 가까운 지인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혈육이나, 아니면 애인이라던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혀, 형님!”
어디선가 진수현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지체 않고 무검을 고쳐 잡은 후 어깨 뒤로 찔러 넣었다. 무언가 부드럽게 파고들어가는 감각이 전해진다. 하여 그대로 마력 폭발을 일으키자, 아니나다를까.
– 카하아아아악!
뻥 터지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후드득, 터져 나온 찌꺼기들이 등을 두드리는걸 느끼며 나는 바로 진수현을 응시했다.
“왜.”
조용히 입을 열자 진수현은 멍하니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주춤주춤 손을 들어 가리켰다.
“뒤, 뒤….”
흘긋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방금 쓰러트린 놈 바로 뒤쪽으로, 다른 괴물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시간차 공격을 하려 했던 모양이다.
“…….”
– …….
그렇게 지그시 보고만 있을 무렵, 문득 놈이 홱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주둥이를 쩍 벌리더니 그대로 나를 지나쳐 어딘가로 달려들었다. 이건 진수현이 있는 방향인데.
“이, 이 씨발놈이?”
흠.
“괴물 주제에 사람을 가려? 오~냐, 와라! 이 개새끼야!”
이윽고 진수현의 분노 어린 음성에 이어 복날 개 패듯 처맞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전장은 거의 정리돼가는 상황이었다. 어디를 봐도 빽빽하게 모여있던 놈들이 이제 드문드문 보이고 있다는 게 명백한 증거였다. 생각보다 전투가 빨리 끝날 것 같다. 이내 건너편의 언덕 쪽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괴물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사용자들에 둘러싸인 괴물들은 이미 거진 전멸한 상태였다. 그러나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던 괴물들은 반대로 몸을 돌려 언덕을 기어오르는 중이다. 하기야 상황 판단이 빠른 놈들의 습성상 오히려 늦은 퇴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어디를 도망가냐! 깡그리 잡아 족쳐주마!”
그때, 성난 목소리가 골짜기를 왕왕 울렸다. 고오환의 목소리였다.
고오환은 거의 몸만한 도로 언덕을 가리킨 채, 입에서 게거품까지 튀겨가며 외치고 있었다. 그러자 사용자들 또한 희번덕 언덕을 돌아보더니 포효를 내지르며 뒤쫓아 오르기 시작했다.
…추격이라.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는 이 기세를 몰고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보아하니 아직도 광화의 여파가 강하게 남아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다. 언덕을 넘으면 놈들의 근거지가 나온다. 이대로 계속해서 앞뒤를 가리지 않고 돌격한다면 수많은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는 노릇.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곧바로 안솔을 찾았다. 다행히 안솔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안솔!”
“네, 네!”
쉬지 않고 보호와 회복 주문을 외우던 안솔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돌아본다.
“지금 당장 각성, 아니면 진정 주문을 사용해라!”
“각성, 진정 주문이요?”
“지금 광화가 너무 강하게 걸렸어. 상태가 너무 지나치다.”
“그, 그렇기는 한데….”
안솔은 재빠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약간 곤란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수는 있는데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지금 너무 중구난방으로 분포돼있어서….”
“으음.”
“기적이라면 한 번에 해결이 가능한데. 사용할까요?”
“아니. 그건 안 돼.”
나는 조금도 고민 않고 머리를 저었다. 가장 강력한 무기나 다름없는 기적을 여기서 허비할 수는 없다.
“일단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 다른 사제들과 힘을 합쳐도 좋고.”
이윽고 알겠다고 회답하는 안솔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나는 즉시 언덕을 돌아보았다. 어느 성질 급한 사용자들은 이미 언덕을 반쯤 오르는 상황이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조금도 지체 않고 달렸다.
*
“라운드 하우스(Round House).”
한소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운드 하우스. ‘적이 집 근처를 어슬렁거린다.’라는 의미. 그러자 곧 신기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한소영이 내뻗은 손이 화려한 빛에 휩싸였다. 그 빛에 반응했는지 주변의 땅이 눈부신 보라 빛을 토해내더니, 이내 원형 모양의 무언가가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 무언가는, 다름 아닌 마법 진이었다. 온갖 형이상학적인 문양이 그려진 직경 1미터는 돼 보이는 보랏빛 마법 진. 그것은 하나가 아닌 수십, 아니 수백에 다다를 정도의 엄청난 수량을 뽐냈다. 그러더니 완전히 떠오른 마법 진들이 흡사 지면이 빙판이라도 된 듯, 사방팔방으로 휘돌며 사용자들의 시선을 어지럽히기 시작한다.
“노,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후미 부대가 주 목적인 것…. 아니 아니! 일부는 중앙 쪽으로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급한 보고가 이어졌다. 한소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엄청난 속도로 주변을 맴돌던 마법 진들이 돌연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전전긍긍한 빛으로 발만 동동 구르던 사내는 순간 망연한 얼굴로 지면을 돌아보았다. 어느덧 움직임을 멈춘 마법 진들이, 한소영을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진형을 형성한 것이다. 어떤 체계로 이루어졌는지 몰라도, 진형은 분명 나름의 질서를 갖추고 있었다.
“화스트 페이스(Fast Pace : 상황이 빠르게 전개된다.).”
그 순간 안 그래도 밝게 빛나던 마법 진들이, 더더욱, 엄청난 빛무리를 뿜어내었다. 이제는 이글이글 뜨겁게 타오른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작열하고 있다.
곧 어디서 들려오는지도 모를 찬란한 미성이, 허공을 아련하면서도 웅혼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한소영의 소환 능력, ‘여왕의 군대’ 출현이 임박했다는 증거였다.
한소영이 살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칵키드…!”
그리고 힘차게 입을 열려는 찰나.
“오라! 피에르! 제 4군단을 지배하는 미친 불꽃의 어릿광대여!”
돌연 한쪽에서 들려온 낭랑한 목소리가 소환 주문을 도중에 끊어버렸다.
흠칫한 한소영은 아미를 살짝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리저리 소용돌이치는 어두운 운무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두운 운무가 좌우로 쩍 갈라지더니 안에서 수많은 마수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그랬다. 적들의 습격을 예상한 김수현이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비비앙을 남겨둔 것이다.
이윽고 마수들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남기며 괴물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한소영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천천히 팔을 내렸다.
한편, 같은 시각.
“죽여라!”
“쫓아! 쫓아가서 조져버려!”
골짜기에서의 전투는 이미 거의 정리된 상태였고, 전장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동안 꾹꾹 쌓아둔 분노를 터뜨린 사용자들과 패배를 직감하고 도망치는 괴물들.
물론 속도는 괴물들이 훨씬 빠르다. 사용자들이 두 발로 달려 올라가는 것에 비해, 괴물들은 미끄러지듯이 쭉쭉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괴물들이 아예 도망치기로 작정한 만큼, 김수현 같은 민첩 능력치가 특화된 사용자가 아닌 이상 잡기란 요원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괴물들이 언덕너머로 모습을 감추었음에도 부단히 쫓아 올라가 기어코 언덕의 정상에 서고야 말았다. 그리고 벌겋기 그지없는 눈으로 괴물들의 자취를 확인하려는 순간.
“……?”
한없이 쫓고 쫓던 사용자들의 걸음이, 정상에 오른 찰나 갑자기 정지했다.
정확히는 언덕 너머의 광경을 확인한 순간부터.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필요 이상의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사용자들은 여전히 괴물을 쫓아 달렸지만, 성향이나 항마력으로 비교적 영향을 덜 받은 사용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확인하고 받은 충격이, 뇌리에 한 줄기 남은 이성을 간신히 일깨운 것이다.
이윽고 그런 사용자들의 머리에 하얀 빛 가루가 사르르 내려앉자, 살의가 가득하던 눈동자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떨떠름한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뒤늦게 언덕을 올라온 안솔이 숨을 헐떡이며 사용자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아무런 회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하여 의아한 기분에 겨우겨우 고개를 올린 순간, 안솔의 얼굴도 앞서 올라온 사용자들과 똑같이 변했다.
언덕에는, 언덕너머 아래쪽에는….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다.
숲도, 수림도 아니었다.
그저 보이는 거라고는 둥글게 둘러싸인 언덕들 아래, 깊게 파여진 시꺼멓기 짝이 없는 구덩이 하나. 직경이 100미터는 가볍게 넘어 보이는 구멍에는, 오직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만이 들어차 사용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을, 도대체 무어라 표현을 해야 할까?
커다란 마른 웅덩이?
아니면 거대한 구렁텅이?
아니.
흡사 지옥의 입구라도 된 듯 그 끝을 알 수 없는 그 구멍은, 꼭 초대형 싱크 홀(Sink Hole)을 보는듯했다.
============================ 작품 후기 ============================
아기 괴물 : 누나. 너무 무서워요. 아빠는 꼭 살아 돌아오시겠죠?
누나 괴물 : (아기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그럼. 걱정 마렴. 아빠는 부족 제일의 용사란다. 꼭 침입자들을 물리치고 안전하게 돌아오실 거야.
사용자 : (쓰러트린 괴물을 뜯고, 씹어먹으며.) 키킥, 키키킥, 키키키킥!
아빠 괴물 : 도, 도망가! 크아아악!
아기 괴물 : 아, 아빠? 아빠아아!
누나 괴물 : 아버지이이이!
한 번 괴물의 입장에서 서술해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