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84
00583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
신재룡이 고오환을 불렀다.
“앙?”
팔자 걸음으로 비틀비틀 걸어가던 고오환은 바로 몸을 돌리더니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만 짓고 있던 신재룡이 살짝 굳은 얼굴로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성큼성큼 다가가자 고오환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끔뻑끔뻑 눈을 움직였다. 고오환도 한 덩치 하는 사내였으나 신재룡도 그에 못지않다.
이윽고 신재룡이 바로 앞에서 멈추자 고오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마음씨 좋은 부드러운 사내인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마주보게 되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윽고 언뜻 눈을 내리깐 신재룡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 다치셨습니까?”
“무슨…! 어, 어?”
“아까 전투하시면서 부상을 당하셨냐는 말입니다.”
“…….”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일까? 일순 고오환의 얼굴이 멍하게 변했다.
신재룡은 참을성 있게 회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말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라 양해를 구하곤 천천히 팔을 뻗었다. 오른쪽 대퇴부 부근으로.
“왜, 왜 이래?”
고오환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물렸다. 아니 물리려고 했지만, 갑작스레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몸을 크게 비틀거렸다. 찌그러진 입 사이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신재룡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군요. 부상이 있으면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제가 사제인데요.”
“어이, 어이!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부상은 경미했어. 그리고 전투가 끝나고 사제한테 확실히 치료도 받았다고.”
고오환이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그러나 신재룡은 머리를 가로젓더니 차분히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 ───. ───. 치료(Cure).”
잠시 후, 지팡이에서 하얀 빛이 흘러나와 고오환의 대퇴부로 스며들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신재룡은 한 번 더 주문을 외웠다.
“───. ───. ───. 신념의 오러(Aura Of Faith).”
이번에는 찬연한 빛을 품은 기운이 고오환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그리곤 은은한 광채를 흘리며 둥글게 흐르기 시작했다.
“치료를 보강하고 버프 주문을 외웠습니다. 기본적으로 활동력을 높여주는 버프지만, 치료를 받았을 경우 재생력을 높여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두 개의 주문을 외운 신재룡은 그제야 얼굴을 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참. 고작 경미한 부상 가지고 법석 떨기는. 아무튼 알겠으니까, 어서 가기나 하자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으면 응당 감사할 법도 한데, 무에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고오환이 뚱한 얼굴로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러나 신재룡은 이번에도 머리를 가로저었다.
“안됩니다.”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 7명은 여기서 잠시 휴식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오래 쉴 수는 없으니 한 5분 정도만 쉬도록 하지요. 그 정도면 충분할….”
“잠깐 잠깐.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여기서 휴식을 하시겠다? 이봐, 당신 정신 나갔어?”
“신성 주문이 만능은 아닙니다. 정말 작은 부상이거나 대 치료 급의 주문이 아니라면 치료 후 휴식 시간을 갖는 게 정석이죠. 겉모습만이 아닌, 파손된 부분이 제 기능을 회복할 시간을 줘야 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말했잖아. 경미한 부상이었다고. …치료도 받았고.”
“치료를 받으신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정말 경미한 부상이었다면 아까처럼 비틀거리지 않으셨겠지요. 허벅지를 뚫고 나간 관통상, 아니면 이빨에 깊숙이 씹혀 지속적인 출혈. 최소한 이 정도로 생각되는데요?”
“…….”
신재룡이 설명이 이어지자 고오환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변했다. 크게 떠진 두 눈에는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경악이 서려 있다. 결국 고오환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으나 신재룡은 괜찮다는 듯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지금부터 딱 5분만 쉬도록 할까요? 나중에 괴물 놈을 한칼에 썰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그리고 한쪽 눈을 찡긋하며 먼저 바닥에 털썩 주저앉기까지.
고오환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으나 같이 있던 사용자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신재룡의 말 하나하나가 사리에 들어맞거니와, 애당초 사제는 일행의 건강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재룡은 굉장히 유능한 사제임을 입증한 셈이며, 고오환은 억지를 부린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젠장. 나도 몰라!”
그렇게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자 고오환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벌렁 드러누웠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신재룡을 흘끔거리며 더 이상 떠들지 않는걸 보니,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다.
“오.”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안현은 작게나마 감탄하고 말았다.
사실 안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유정이 그리워지던 찰나였다. 언제나 허허 웃는 신재룡 성격에 고오환에게 끌려 다닐까 봐 걱정도 들었다. 그러나 신재룡은 김수현이나 이유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오환을 잠재웠다. 저 나서기 좋아하는 고오환이 어느 순간 조용히 있는 걸 보니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튼.
걱정도 덜었겠다, 5분간 휴식한다는 말에 이곳저곳 둘러보던 안현이 문득 한 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자신과 약간 떨어진 지점에서 헬레나가 하염없이 천장을 쳐다보고 있다. 그것도 무척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안현의 다리가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헬레나. 뭘 보고 있는 거예요?”
슬쩍 말을 걸자 헬레나의 눈동자가 살그머니 내려와 안현을 흘겼다. 그러나 곧 도로 올라가더니 빙그레 웃으며 천장을 가리켰다.
“천장?”
안현이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하곤 천천히 머리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은 토굴답게 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딱히 별다른 게 보이진 않았다. 핏줄처럼 울룩불룩 튀어나온 부분들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구덩이로 들어왔을 때에도 본 것들이다. 도대체 뭘 보라는 걸까?
딱!
안현이 머리를 갸웃할 즈음, 별안간 헬레나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안현이 보고 있던 천장의 일부가 깊게 파이며 흙들이 조각나 떨어져 내렸다. 안현은 본능적으로 파인 부분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번듯하던 이마에 미미한 주름살들이 생겨났다.
“어…?”
텅, 비어있다. 파인 부분 너머로 흙이 들어차 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텅 비어있었다. 마치 안에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처럼. 여전히 부스스 떨어져 내리는 흙 가루들이 볼을 간질이자 안현은 잠깐 놓았던 정신 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헬레나. 지금 저게 왜….”
“자, 5분이 지났네요. 그럼 이제 출발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안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신재룡의 출발 지시가 떨어졌다. 거기다 헬레나도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그냥 걸어가버려, 안현은 궁금함을 해소하지 못한 채 마지못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통로로 들어가기 직전, 안현은 다시 한 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까 광장을 나오면서 느꼈던 오묘한 기분이 자꾸만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신재룡 일행은 중앙 통로로 들어간 후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아니, 걷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아무튼 중간중간 갈라지는 통로가 3개 정도 나오기는 했지만, 말한 대로 신재룡은 더 이상 인원을 나누진 않았다. 그저 꿋꿋하게 중앙 통로를 고수하며 행군했다.
통로는 조용했다. 사용자들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따금 지면에 설치된 광산 철도를 밟는 소리만이 귓전을 두드릴 뿐,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텅!
그러나 약 100미터를 추가로 이동했을 즈음 갑작스럽게 무언가 크게 부딪치는 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사용자들은 반사적으로 바짝 굳었다가 곧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신재룡의 왼쪽에서 이동하던 사내가 미안하다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뭡니까?”
신재룡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내는 머리를 갸웃하며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잠깐 무언가를 만지는가 싶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광산 열차인 것 같습니다.”
“광산 열차요?”
“예. 아마 이 철도에 쓰였던 것이라 생각되는데…. 크기는 서너 명이 들어갈 정도는 되는데, 모양새가 굉장히 조악합니다. 그냥 자전거 앞에 달린 바구니를 보는 기분이에요. 꽤나 낡아 보이기도 하고요.”
“별로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그렇다는 듯이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신재룡도 따라 머리를 끄덕이고는 행군의 재개를 알렸다.
이후로 한 5분 정도가 흐르자, 이번에는 어디선가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용자들은 또다시 행군을 정지했다. 자연스럽게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안현은 청각을 높여 소리의 근원을 파악하려 애쓰다가, 일행 중 날씬한 여인이 앞으로 나서는걸 보고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등에 맨 활을 보면 궁수가 분명했고, 그렇다면 자신보다는 훨씬 더 잘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그동안 신재룡은 통신용 수정구를 꺼내 각 조에 연락을 시도했고, 아직 아무 이상 없다는 보고들을 받을 수 있었다. 수정구를 도로 품 안으로 집어넣은 신재룡은 아직도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음…. 누가 고함을 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비명인가?”
“고함, 비명이요?”
“아. 방금 끊겼어요. 이제 조용해졌네요. …아무튼 여기서는 잘 들리지 않아요. 조금 더 가봐야 알 것 같아요.”
한동안 앞을 주시하던 여인이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신재룡은 잠깐 생각에 잠겼지만 별다른 도리는 없었다. 결국 추가로 전진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앞장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더 가보자는 말에 궁수 여인이 머리를 질끈 묶어 넘기며 요청했고, 신재룡은 흔쾌히 허락했다.
약 10분 동안 추가로 나아가자 앞쪽에서 서서히 어른거리는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통로는 여전히 고요했다. 중간에 한 번 더 갈라지는 통로가 나왔으나 사용자들의 신경은 온통 전방의 불빛에 쏠려있었다. 아까 광산 열차를 건드렸던 사내는 벌써부터 큼직한 방패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젠장! 이년아! 빨리, 빨리 형식이를 낳으란 말이야!”
“아악…!”
사용자들이 조심스럽게 불빛을 향해 다가가고 있자, 어느 순간 돌연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요한 통로를 크게 울렸다.
정적이 깨졌다. 사용자들의 걸음이 멈췄다. 가장 앞서있던 궁수 여인은 날쌘 몸놀림을 보이며 거의 자동적으로 벽에 붙었다.
“빌어먹을! 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암퇘지 같은 년이!”
“아, 아직은 안 돼요…. 아가가…. 아가가…!”
그러는 와중에도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하나는 사내가 거칠게 화내는 목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여인이 애처롭게 애원하는 목소리였다.
잠시 후, 다른 사용자들이 따라 벽에 몸을 붙이자 여인이 천천히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손가락 3개를 폈다가, 꽉 오므려 주먹을 쥐었다가, 전방을 가리키고, 오른쪽으로 꺾었다. 전방 30미터, 오른쪽에서 들려왔다는 소리였다.
이윽고 사용자들이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이동하려는 찰나.
“빌어먹을! 추적대가 코앞까지 다가왔단 말이다! 이 망할 년아!”
“하아…. 하아….”
“콜록, 콜록! …제기랄! 어쩔 수 없지. 조금 이르더라도…!”
“아, 아…?”
한순간, 궁수 여인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다른 말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도, 벌써 추적대가 왔다는 말이 나왔으면 이미 들켰다고 봐도 무방했다. 거기다 어쩔 수 없지 라는 말을 듣자 뜻 모를 불안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언제, 어떻게 들킨 거지라고 자책하기 전에 여인은 빠르게 신재룡을 돌아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얼른 돌입해 상황을 정리하자는 무언의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이내 신재룡이 지체 않고 머리를 끄덕이자, 사용자들은 각각 무기를 꺼내 들며 여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빠르게 달렸다.
그렇게 삽시간에 30미터를 달려가, 궁수 여인이 가장 먼저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느닷없이 여인의 기다란 비명과 동시에.
철푸덕!
무언가 흠뻑 젖은 것이 지면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가 들렸다.
한편, 같은 시각.
“아?”
후방으로 조용히 물러나 있던 안솔이 갑작스레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이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그런 안솔의 두 눈동자는 알 수 없는 불안과 걱정으로 젖어있다.
그러나 원하는 이를 찾지 못한 걸까?
“오빠…?”
안솔이 조용하면서도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안솔은 기본적으로 김수현을 오라버니라 부르지, 오빠라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오빠라 부르는 사용자는 많다. 그럼 과연 누구를 말하는 걸까?
“아저씨…?”
그때, 안솔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적어도 머셔너리 클랜 내에서, 안솔이 아저씨라 부르는 사용자는 딱 한 명이다.
신재룡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특히 이 시간까지 기다려주신 분들에게는 한없이 죄송하며, 또한 감사합니다.
그리고….
독자 분들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혹여 이번 회에서 Flag나 중요한 복선을 느끼신 분이 있으시다면, 이번 파트가 끝날 때까지는 추측 코멘트는 잠시 마음속에 담아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이번 회는 더더욱 이요. 혹시 아직 모르실 다른 독자 분들을 위한 배려를 바랍니다.
그럼 모두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