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86
00585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
거대한 용의 포효가 공간을 쩌렁쩌렁 이 울렸다. 비로소 해방된 종말의 용이 분노가 오롯이 주현호를 향해 쏟아져 들어간다.
주현호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마그나카르타(Mageunakareuta). 한때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의 정점에 군림했으며, 끝을 일컫는 ‘종말.’ 칭호를 부여 받은 최초이자 최후의 용.
그런 용의 분노를 일개 인간이, 아니 괴물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풀썩!
결국 견디지 못한 주현호가 입을 쩍 벌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신재룡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갑자기 헬레나가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지팡이를 높게 치켜든 찰나 돌연 헬레나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그만두어라.”
“…헤, 헬레나?”
신재룡이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으나 헬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재룡은 그래도 어떻게든 나서려고 했지만, 갑작스레 온몸을 짓눌러오는 무형의 기운에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었다. 아니, 입도 벙긋할 수 없다.
그건 비단 신재룡뿐이 아니라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로 헬레나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나의 힘이 해방된 이상 너희는, 아니 나를 제외한 모두가 끼어들 수 없다.”
“…….”
“이것은 나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며, 그녀와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러니 조용히 구경이나 하고 있거라.”
“…….”
과연 용의 자존심일까? 아니면 대 영웅 헬레나와의 모종의 약속, 아니 제약 때문일까?
아무래도 좋다.
잠시 후, 헬레나는 가증스럽다는 듯이 주현호를 바라보며 매섭게 눈을 치켜 떴다.
“Ecce, Deus. Stulte Seokin Monstrum.”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주현호를 곧바로 쳤다.
“히이이익!”
주현호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삽시간에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무너진 자세 그대로 다리를 미친 듯이 번갈아 움직였다. 헬레나가 차분히 손을 들어 겨냥하자, 아직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침 맞은 망아지처럼 후닥닥 머리를 수그린다.
헬레나가 한 걸음 내디뎠다.
“In Cunctis Capitibus Ejus! Et Noli Timere!”
그리고 또다시, 헬레나가 한 걸음 내디뎠다.
“Numquid Non Expectas? Ecce!”
그저 한 마디 말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헬레나가 입을 열 때마다 엄청난 마력의 파장이 주현호의 전신을 고스란히 덮쳤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명령이요, 권능.
즉 용언의 실체였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결국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주현호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빙글 돌렸다. 흙 바닥을 박박 긁으며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헬레나는 금세 따라잡았다. 이내 부들부들 떨리는 등에 발 하나를 살포시 올려놓자, 주현호의 움직임이 우뚝 정지했다.
고양이에게 잡힌 생쥐가 이러할까?
헬레나가 나서기 시작했을 때부터 주현호의 몸은 시종일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천식이라도 걸렸는지 호흡도 이상하다. 파르르, 가엾게도 떨리는 머리가 천천히 돌아가 헬레나를 응시한다.
“왜,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건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삐쭉 내민 주둥이에서 울먹이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자기가 정말로 뭘 잘못했냐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말투였다.
돌연 주현호의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지더니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느새 주현호는 흐느끼고 있었다.
흐느끼는 주현호를 보며 헬레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더냐?”
“그러니까 왜…. 컥!”
그러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헬레나가 등을 밟고 있던 발에 강한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주현호의 몸이 흡사 죽은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짓눌렸다.
그때였다.
“이….”
별안간 주현호가 입을 질끈 깨물었다. 양 주먹을 꽉 말아 쥔다. 무에 그리 분한지, 징징거리던 눈매가 와짝 일그러지고 두 눈동자가 불똥을 튀겼다.
“개 씨발 년이…!”
한순간 주현호의 태도가 변화했다. 번쩍 머리를 치켜들었다. 흡사 무언가를 떨쳐버리려는 것처럼, 사지를 마구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런 주현호를 내려다보는 헬레나의 두 눈에 반짝이는 이채가 스쳤다.
“호, 놀랍구나. 삼라만상의 현상 중 죽음을 명하였거늘…. 그게 아니라면, 혹시 죽음을 겪어본 적이 있느냐?”
기특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주현호의 움직임이 자동적으로 정지했다. 머릿속에 본능적으로 광장에서 겪었던 일이 떠오른다. 자신을 갖고 놀던 김수현, 내부를 싸늘하게 헤집던 칼날….
“크아아아아아아악!”
주현호가 울부짖었다. 온몸에 그려진 검은색 문신이 시뻘겋게 작열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양팔을 쫙 펼친 주현호는 괴성을 내지르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까지.
킥킥 웃은 헬레나가 가볍게 발을 치우자,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려 찢어 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본다.
“이제 상황 반전이다. 내 기필코 네 아가리를 찢어주마, 이 개 같은 년아!”
“재미있는 놈이로고. 그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보라는 양 헬레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주현호는 곧바로 걸음을 물렸다. 그리고 양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주문을 외운다.
“───. ───. ───.”
무에 그리 엄청난 주문을 외우는지, 이마의 혈관이 툭툭 불거지고 식은땀을 비오 듯이 흘린다.
하지만, 헬레나는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돌연 비웃는 듯한 미소를 머금더니 천장을 향해 오른손을 올렸다.
“하늘을 빛내는 해는, 꺼지지 않는 지혜의 근원이며.”
이번에는 지면을 향해 왼손을 내린다.
“대지를 굽어보는 그 눈은, 이 몸의 마음을 이룬다.”
그 순간이었다.
두 마디 말이 끝난 바로 그 순간, 헬레나의 전신이 어스름한 새벽빛으로 찬연히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것을 간파할 것처럼 빛나는 희미한 여명이, 왕의 굴이라 불리는 공간을 가득히 메운다.
“왜, 나를 껴안고 자폭이라도 할 속셈이었느냐?”
“───. ───. ───. 뭐, 뭣?!”
눈을 질끈 감은 채 주문을 웅얼거리던 주현호는 저도 모르게 기함했다. 그리고 반사 작용으로 눈을 부릅뜬 찰나,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는 헬레나의 시선과 마주해버리고 말았다.
그때, 세로로 찢어진 헬레나의 두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황금빛을 발했다.
이윽고 주현호는 사방을 덮치며 달려드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눈 깜짝할 새 에 알 수 없는, 무형화된 힘이 주현호의 전신을 사정없이 찌그러트린다.
“여담이지만, 미크라라는 미물도 굴복시켰던 봉인 권능이다. 어디 한 번 네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시험해보마.”
꽝!
“커헉!”
단 일격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현호의 입에서 왈칵 핏물이 토해졌다. 그와 동시에, 헬레나의 입에서도 한 줄기 핏방울이 살그머니 흘러내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헬레나가 하나하나 이루어내는 마법은 상대방의 확실한 죽음을 강요하는, 오직 용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다. 그 정도로 고수준의 권능이면 당연히 반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 일시적으로 힘이 해방됐다고는 하나 권능을 발현하는 근원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몸이다. 사실상 헬레나의 몸은 김수현에 의해 되살아났을 때부터, 죽음을 향해 고속으로 달려가는 기차였다.
말인즉, 영혼을 담는 그릇의 부조화로 인한 붕괴(崩壞). 가만히 있어도 몇 년 안에는 죽는다.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 속도는 가속화된다. 그것이 바로 반작용이라는 현상으로써, 헬레나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그러나 부활을 결정했을 때부터 각오한 굴레이기도 했다.
주현호는 전신을 강하게 압박 당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었다. 어떻게든 헬레나를 노려보며 애쓰며 전투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헬레나는 시야가 약간 뿌옇게 변한 것을 느꼈다. 몸은 계속해서 경종을 울리며 붕괴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다.
헬레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주현호를 가리켰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감각을 차단했다. 자꾸만 흐릿해지려는 정신을 바짝 다잡으며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타올라라.”
주현호를 압박하던 무형의 기운이 한순간 변화했다. 곧 환한 빛을 뿜어내는 유형화된 기운으로 일변해 굉음을 동반한 폭발을 일으켰다. 헬레나의 머릿결과 똑같은 황금빛 불꽃이, 주현호의 전신을 게걸스레 삼키듯이 감싸 안는다.
화르르르르르르륵!
“흐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주현호는 느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들끓으며 뭉그러지는 감각을. 허공에 매달린 여인들처럼 눈이 까뒤집히고 전신에서 피가 배어 나오다 못해 그대로 연소돼버린다.
화르르륵, 화르르륵!
결국 견디다 못한 주현호의 몸 자체가 시꺼멓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주현호는 용케 죽지 않고 있다. 끝끝내 비명을 지르며 생존을 갈망하는 절규를 외치고 있었다.
그걸 보는 헬레나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탄의 빛이 스쳤다.
사실상 헬레나가 일으킨 불꽃은 물리적인 피해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적인 부분, 즉 영혼의 완전한 연소를 목적으로 하는 상승의 염화였다. 보통 인간이라면 몸이 부서지기도 전에, 10초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 끊어진다.
그러할진대 주현호는 버티고 있었다. 아직도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주현호 특유의 생존에 대한 갈망이었다.
감각을 차단함으로써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어느덧 헬레나는 입뿐만이 아니라 코에서도, 귀에서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주현호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우렁차게 울어 젖히던 주현호의 절규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러면 저놈의 영혼은 완전히 소멸돼 다시는 이 세상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푹!
갑작스럽게, 헬레나의 몸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전신을 물들이던 여명의 빛이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주현호를 삼키고 있던 염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내 불꽃이 꺼진 주현호의 몸이 하릴없이 허물어지는 순간, 헬레나는 간신히 눈동자를 굴려 옆을 곁눈질했다.
“…….”
…도대체 언제 일어난 걸까.
오른쪽으로 어느덧 완전한 성장을 마친 괴인이 보였다. 무덤덤해 보이는 얼굴을 한 괴인은 헬레나의 옆구리로 오른쪽 주먹을 쑤셔 넣은 상태였다. 그리고 살그머니 비틀어 빼내자 진득한 핏물과 우그러진 장기들이 흘러내린다.
“…실수, 했구나.”
말 그대로 실수라면 실수였다. 감각을 차단한 건 둘째치고서 라도,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껏 죽은 듯이 누워있던 형식이 단숨에 튕기듯이 돌진해 헬레나를 공격한 것이다.
이윽고 헬레나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지는 것과 동시에, 사용자들을 압박하고 있던 제약의 기운도 풀렸다.
“헬레나!”
안현이 고함과 함께 흑색 창을 무섭게 휘두르며 달려나갔다.
*
쐑!
수십 가닥의 촉수가 사방을 점거하며 짓쳐 든다.
비록 파괴력이나 속도는 줄어들었다고 해도, 여전히 파더는 괴물이다. 1회 차 때 무수한 사용자들을 죽음에 빠트렸던 만큼, 그 어느 때라도 방심할 수는 없다.
촉수는 이번에야말로 나를 잡겠다는 듯이 세차게 꿈틀거렸지만, 가볍게 발을 놀리자 허공을 그대로 미끄러지듯이 스치고 지나가버렸다. 사실상 지루한 신경전이나 다름없는 전투였다. 내가 이렇게 방어에 치중하고 있는 한은.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파더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간간이 촉수를 처리하고, 어그로를 유지한다.
과연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되나 싶어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 예상으로는 33초.
그러나 되돌아온 화정의 회답은 나를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33초?
그러고 보니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기는 하다.
갑작스럽게 주변을 시꺼멓게 물들이는 어둠. 이건 고연주의 그림자일 것이다. 하지만 인근의 지면을 물들였을 뿐이지, 이후로 딱히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약간 소극적으로 변한 파더의 행동. 무언가 아까와는 달리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졌는데, 단순히 지쳤다고 생각하기에는 머리가 갸웃해진다. 마치 이것도 하지 못하고 저것도 하지 못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라고나 할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흘리며 옆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촉수를 간단히 쳐냈다.
– 마력 반응. 15초.
화정은 아까부터 딱딱 끊어 회답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까 놀렸을 때부터. 사실 일부러 그러는 의도가 다분히 보인다. 그러니까 삐쳤다는 소리다.
미안하다고 달래주고는 싶었으나 나는 그 대신 무검을 고쳐 잡았다. 빅토리아의 영광은 진작에 집어넣었다. 화정이 요구한 바를 시행하는 데는, 양 손 검보다는 한 손 검이 최적이다.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일깨우고 몸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처음 파더를 상대하던 그때처럼.
그때였다.
화아아악!
갑작스럽게, 근처를 물들이던 어두운 그림자가 새하얀 실 가락들을 토해내었다.
저건…. 바인드 마법인데?
– 2초. 기다려.
나는 그때가 지금을 말하는 것인 줄로만 알고 바로 움직이려 했으나, 그것조차도 예상했다는 듯 화정이 기다리라는 말로 나를 제지했다.
기다리는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그림자에서 토해진 기백 개의 바인드 마법이 파더의 촉수를 휘어 감는다. 그리고 마치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당기듯, 바인드 마법에 휘감긴 촉수가 어딘가로 끌려가며 강제적으로 팽팽하게 변했다.
그것은 하나의, 아니 여러 개의 지지대 역할이 되었다.
비로소 어두운 그림자가 파더를 집어삼킬 듯이 대규모로 몸을 일으켰다. 흡사 해일과도 같은 움직임.
그리고 바인드 마법이 이루어낸 팽팽해진 촉수를 지지대 삼아, 파더를 칭칭 둘러 감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림자는 원래 무엇이든 통과할 수 있는 것. 칭칭 감는 것도 모자라, 파더와 촉수 사이의 공간을 모조리 메우며 까맣게 물들였고, 그대로 아래로 덮어 내렸다.
그 광경은, 채 2초도 되지 못해 모조리 그리고 순차적으로 일어났다.
나는 이제야 겨우 사용자들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찰나일지도 모르는 시간에, 대다수의 촉수를 강제로 봉인한다. 나에게 하나의 새로운 공백을 만들어준다.
그 어느 때보다 제대로 된 일격을 날릴 수 있는, 그 한순간의 틈을!
– 지금!
화정이 외쳤다.
칼만 꽂아 넣으면 된다. 깊게 생각할 틈은 없다. 아니, 화정의 외침을 들은 순간 나는 이미 앞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휙, 휙, 휙, 휙!
그 와중에도 용케 빠져 나온 것들이 있는지, 서너 개의 촉수들이 또다시 나를 노리고 달려온다. 나는 아예 바로 접근할 생각에 이형환위를 위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때, 문득 한 줄기 서늘한 감각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아까 파더가 소극적으로 행동하던 움직임이 잠시 뇌리를 스쳤다.
파더 또한, 사용자들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했고, 아니 당해주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생각한 순간은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이미 이형환위가 발동됐다.
이내 시야가 변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연달아 일으켰고 몸을 한껏 웅크렸다. 그리고 온몸을 활짝 펼치며 곧장 궁신탄영을 사용했다.
그 순간. 승리를 확신한 건 과연 누구였을까.
꽝!
몸이 바로 튕겨나가는 것과 동시에, 등을 세차게 훑는 어마어마한 촉수의 감촉이 느껴졌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엄청난 기세였다. 파더 또한 사용자들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혼신의 힘을 다한 카운터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피했다.
오른발을 내뻗었다. 그리고 발에 흙 바닥 감촉이 느껴지는 찰나, 나는 있는 힘껏 땅을 박차 파더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이윽고, 한순간 여러 광경이 눈앞을 교차하며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파더의 몸체가 눈에 들어온 바로 그 순간, 나는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모든 힘을 집중시킨 일격을 일직선으로 내질렀다.
푸욱!
흡사 썩은 통나무를 뚫고 들어가는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나조차도 모르게 변한 무검의 형태를.
항상 보이지 않던 칼날의 부분이 갑작스레 휘황찬란이 빛나며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웅웅웅웅웅웅웅웅!
『차원을 뛰어넘는 힘이 무검의 실체를 강제로 소환합니다.』
『혼돈 왕의 상징, 절멸(絶滅)자의 검이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갑작스럽게, 시야가 어두운 빛으로 물들었다.
============================ 작품 후기 ============================
생각해보니 너무 창피해서 후기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