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09
00608 북부, 진군하다. =========================================================================
…그렇게 자신 있냐고?
이윽고 형을 바라본 찰나,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매섭기 그지없는 눈빛.
‘응. 있어.’라고 말하기에는 형의 기운이 심상찮다.
무엇보다 형은 지금 다른걸 말하고 싶어하고 있었다. 아직 내가 완전히 깨닫지 못한 어떠한 부분을.
견딜 수 없는 정적이 흐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형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도움을 받으면 확실히 편하기는 할 거야. 그걸 모르는 건 아니야.”
“…….”
“좋아. 네가 참가해서 이번 공략을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후에는 어떻게 할래?”
“이후?”
“네가 그랬잖아. 강철 산맥을 공략하고 아틀란타로 입성하게 되면, 분명히 그 악마라는 놈들이 움직일 거라고. 아니, 악마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륙의 사용자들도.”
“…응.”
틀린 말이 아니다. 강철 산맥이 공략되는 순간 악마들이 움직일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왜냐하면 아틀란타 다음 지역인 테라에는 제로 코드가 잠들어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지금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아틀란타에서도 네 생각대로만 된다면 모두가 행복해지겠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서 바로 테라까지 진군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럴 리는 없겠지.
‘악마’라는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한 놈들이 얼마나 제로 코드를 원하는지도 알고 있고.
더욱이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올 것이다.
언제나처럼, 상상 그 이상의 방법으로.
“여기가 그렇게 만만한 세상은 아니잖아. 이건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냐.”
형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놈들은 분명히 방해 공작을 시도해올 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한테 위기도 찾아오겠지. 네가 지금 그렇게나 걱정하는, 제 3지역 공략과는 비교도 안될 위기가.”
“그날이 오면, 그때도 네가 이렇게 일일이 나설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네 몸은 하나니까.”
그리고 나는, 이제야 형이 하고 싶은 말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만능 치트키가 아닌 이상, 너는 사람이 필요해. 네 사정을 알고 네 목적을 아는, 필요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은 너 혼자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다.
너 혼자서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
이게 바로 형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를 가장 가까이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또한 바로 형이었다.
“후유.”
잠시 후, 가벼운 한숨을 내쉰 형은 기록을 도로 품속에 집어넣고서 예의 따뜻한 낯으로 나를 응시했다.
“얘기는 여기까지 하마. 이 정도면 네가 못 알아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구김살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도 그런 얼굴이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형.”
“물론 능력 이상으로 무리하지는 않을 거야. 또 네가 건네준 이 상세한 정보도 십분 활용할 생각이고. 무조건 생존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어.”
“…….”
“그렇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뭐 그래도 안되면, 그때는 너한테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마. 최소한 이러는 게 맞는 것 같다.”
“…….”
그렇게 말하는 형 앞에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럼 간다.”
몸을 돌리고 망설임 없이 걸어가는 형의 등을 하염없이 응시할 뿐.
*
새 아침이 밝자마자, 형은 바로 북부 원정대를 이끌고 제 3지역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내가 어떻게 할 틈도 주지 않고.
물론 우리 또한 동부 요새에 도착한 다음날 바로 떠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를 않는다. 분명 공찬호보고 최소한 이틀은 시간을 끌어달라고 말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공찬호가 얼굴 마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딱히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면 형이 일부러 서둘렀을 가능성도 있을 테고.
개인이 아닌 클랜에, 원정대에 묶인 나로서는 한없이 갑갑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문득 머리를 젖혀 하늘로 시선을 올리자 쨍쨍한 햇빛이 시야를 눈부시게 물들여온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땅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상당히 화창하다.
“───. ───. ───. 안젤루스여! 그대의 미천한 종이 바라오니…!”
“안개화!”
펑!
돌연히 들려오는 폭음에 시선을 내리자,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는 안솔과 사샤가 눈에 들어왔다.
큰일은 아니다.
둘은 지금 대련을 하는 중이었다. 둘 사이서 어쩌다 시비가 붙은 것 같은데 1:1로 시시비비를 가릴 셈인 모양. 그리고 나는 심판을 봐달라는 부탁을 빙자한 억지에 끌려 나온 상태였고.
사제와 뱀파이어. 사실 클래스만 보면 이미 승자는 정해져 있는 셈이나, 장담할 수는 없다. 사샤도 그냥 뱀파이어가 아닌 피의 군주라는 무시 못할 클래스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상성상 안솔이 더 유리할 거라 생각하고 있지마는.
그렇게 두 명이 툭탁툭탁 싸우고 있는 동안, 사용자들은 삼삼오오 둥글게 모여 앉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사용자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화색이 돌고 있다. 조금의 걱정도 없어 보인다. 오늘 아침 제 3지역으로 떠난 사용자들과는 극명하게 갈리는 태도였다.
“…….”
저런 태도를 딱히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남부 원정대는 정당하다.
우리 또한 한창 공략을 하던 와중에는 하루하루 불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내고, 구덩이 공략으로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제 2공략을 매듭지었다.
물론 지금도 아주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젠 남은 거라고는 요새 건설을 기다리고 주변 경계만 철저히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남부 원정대가 이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건, 하등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면 나 또한 이 한가로움을 즐겨야 할 터인데,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왜 나 홀로 이렇게 좌불안석인 걸까?
사실 해답은 이미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북부 원정대는 떠났고, 남부 원정대는 남았다.
그리고 나는, 북부 원정대에 참가하지 못했다.
애당초 형이 거부한 이상, 한소영의 허락이나 클랜원들의 설득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실 나 스스로 북부와 접촉해 억지로라도 참가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형은 내가 참가하는 즉시 지휘권을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니, 엄포가 아니었다. 나 때문에 가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한이 있더라도, 형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잘 알고 있다.
물론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형한테 설득을 당했다고나 할까?
그만큼이나 형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고, 또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일전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구덩이 공략 초반, 한창 애를 먹고 있던 와중 한소영이 갑작스럽게 각성했다. 주현호의 도발에 열이 오를 대로 오른 한소영은 이후 권능 『파괴 • 돌격』을 이용, 삽시간에 나머지 통로를 통과해버렸다.
그 당시 한소영은, 악마들과 맞서 사용자들을 이끌던 1회 차 철혈의 여왕과 가장 근접한 모습을 보였다.
형 또한 그렇다.
뇌제(雷帝) 김유현.
1회 차 최고 전성기 시절의 형은 마족은 물론, 어지간한 악마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엄청난 명성을 떨친 사용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객관적으로, 또 냉정하게 말해보면, 그때의 형과 지금의 형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냥 사용자 정보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느 상황에 대처하는, 돌아가는 흐름을 읽는, 사용자들을 이끄는 능력 등등.
즉 일개 사용자로서의 형이 아닌, 사용자들에 군림하는 군주로서의 형의 능력.
1회 차의 형은 북 대륙에서 터진 여러 굵직한 사건들을 스스로 헤쳐 나온 역전의 사용자였다. 어떤 일이든 앞장서서 척척 해치우던 형의 등을 볼 때면 나 또한 항상 든든함을 느꼈으니까. 아마 나만 아니었다면 끝끝내 제로 코드를 쥔 건 형이 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형은….
그래. 아무리 좋게 봐도 나름 잘 나가는 클랜 로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공찬호 또한 비슷한 경우라 볼 수 있다.
공찬호는 스스로 싸우면서 강해지는걸 느낀다고 했다.
1회 차의 공찬호는 정말 부단히 싸움에 휘말린 사용자였다. 언제나 전투에 전투를 거듭했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는 천하무쌍은, 그냥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는 게 아닌, 바로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탄생한 게 아니었을까?
…말인즉, 형이 말한 성장은 개인의 욕심이나 영달을 바라는 성장이 아니었다.
‘그날이 오면, 그때도 네가 이렇게 일일이 나설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네 몸은 하나니까.’
‘너는 사람이 필요해. 네 사정을 알고 네 목적을 아는, 필요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말 그대로였다.
형은 아틀란타 이후 전개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차후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게 아닌, ‘필요하면 목숨을 걸고 나를 도와줄 수 있을 정도’가 되기를 원했다.
형이 말한 성장이란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악마들의 저력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으니까. 나만이 아닌, 다른 사용자들 또한.
쾅!
“꺄악!”
“크악!”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느닷없이 폭음이 들려왔고, 안솔과 사샤의 비명이 동시에 이어졌다. 상념에서 깨어 앞을 바라보니 서로 멀찍이 떨어진 채 바닥을 구르는 둘이 보였다. 서로 약한 신음을 흘리면서 바닥을 기는걸 보니 꽤 커다란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야야….”
“크으…! 과연 안젤루스의 사제인가….”
얼굴을 한껏 찌푸린 채 엉금엉금 몸을 일으키던 사샤는 문득 안솔을 쳐다보고는 크게 기함했다.
“앗! 그, 그 자세는?!”
“아파라….”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있던 안솔은, 양손에 쥔 지팡이를 지지대 삼아 막 몸을 일으키려는 중이었다.
그냥 그러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샤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서, 설마! 그럴 생각이었던 거냐!”
“……?”
“신성 주문 중 바인드 마법을 통해 내 몸을 묶고, 그 다음에는 네 권능인 천벌을 이용해 나를 공격하겠다는 속셈이군! 너와 나의 상성을 생각하면 내 안개화도 제한되거나, 아니면 아예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나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겠지!”
“…우웅?”
사샤의 외침을 들은 안솔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정수리에 물음표가 동동 떠오른다.
이윽고 안솔은 한참을 깊게 생각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느낌표를 띄우며 “앗!”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떨떠름해 보이는 얼굴로 사샤를 바라보기까지.
“그, 그래요! 네! 맞아요!”
“크윽…! 역시나!”
“그런 좋은 방법이…. 아, 아니! 이제 그러려고 했다고요!”
“제, 제길! 분하다!”
‘…….’
– …저거 병신들 아니야?
지금껏 가만히 있던 화정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이유정이 땅을 데굴데굴 구르며 참 잘들 논다고, 웃겨 죽겠다고 외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나는 가벼운 한숨을 흘리고서 차분히 이마를 짚었다.
“후유.”
…저것들은 곧 죽어도 내 마음은 모르겠지.
그때였다.
탁!
“날도 더운데…. 목마르지 않으세요?”
저것들을 데리고 어찌 악마들을 상대해야 하나 심도 깊은 고민에 빠져들려는 찰나, 돌연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흘긋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얼음을 동동 띄운 음료가 탁자에 놓인걸 볼 수 있었다.
이윽고 건너편 간이 의자에 차분히 엉덩이를 붙이는 여인이 보였다.
가늘고 길쭉하게 뻗은 가랑이와 아름다운 굴곡을 그리는 늘씬해 보이는 골반.
어깨 아래 살며시 흘러내린, 시원해 보이는 선명한 푸른색 머리칼.
그리고 나를 조심스럽게 쳐다보는 파란빛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나는 비로소 여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보석아?”
우당탕탕!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김한별이 갑작스럽게 나동그라졌다.
============================ 작품 후기 ============================
음. 거짓말은 아니에요. 정말 적고는 싶습니다. 다만 지금 그럴만한 상황이 되지 않으니 적지 못하는 것 뿐이지요. 하하. 그렇다고 억지로 상황을 만들어 넣는 건, 저나 독자 분들이나 서로 원하지 않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외전으로 적는 것도 좋기는 한데…. 그러면 아무래도 본편이 밀리게 되니까요. 이건 전적으로 제 책임이 크네요.(ㅜ.ㅠ)
후기에 적는 건 개인적으로 사양하고 싶습니다. 고연주나 남다은이나, 그냥 응응이 아닌 나름의 상황을 맞춘 응응을 구상해놔서요. 항상 수현을 애 취급하는 고연주가 각성한 수현한테 단단히 혼나는 과정이나, 아니면 남다은과의 상황극 등등이요. 후기로 날리기에는 꽤 아까운 소재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
아무튼 한 번 타이밍은 재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도 말씀 드렸죠? 연재 끝나기 전에 독자 분들에게 ‘씬 정말 잘 적으시네요.’ 이런 말 들어보는 게 소원이라고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