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28
00627 ShowDown. =========================================================================
어느덧 해는 완전히 서쪽으로 넘어가고 산맥에도 완연한 어둠이 찾아왔다.
무언가 묘한 밤이다.
적어도 쿠샨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자꾸만 전신을 엄습하고 있었다. 단순히 신체 능력의 저하 때문만은 아니었다. 쫓아가던 사용자가 갑자기 없어져서도 아니었다. 그냥 정말로 무언가가 묘했다. 지면을 밟는 쿵쿵거리는 소리도, 턱 끝까지 차오른 숨소리도, 이따금 넘어가는 침 소리도.
결국 쿠샨이 처음으로 묘한 기분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은 초원을 바로 앞두고 괴조의 비명을 들었을 때였다.
– 끼루루루루루루룩!
“응? 이 소리는?”
쿠샨은 처음에는 소리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초원에는 당연히 인간들과 동족만 있을 거라 생각한 탓이다. 설마 괴조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펄럭, 펄럭, 펄럭, 펄럭!
그러나 곧 하늘 높이 떠오른 괴조 무리를 확인했을 때. 그리고 그 무리의 발톱에 잡힌 채 축 늘어져 있는 동족을 확인했을 때. 쿠샨은 비로소 현실과 마주하게 됐다.
“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비현실이라는 생각만 강하게 들었다. 쿠샨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괴조 무리에 붙잡힌 건 동족이 분명했다.
쿵!
이윽고 하늘 높이 떠오른 괴조 무리가 발톱을 놓자 거인이 하릴없이 추락해 지상과 부딪쳤다. 이어서 쏜살같이 하강하는 괴조 무리를 확인한 순간, 그제야 멈췄던 쿠샨의 다리가 움직였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얼른 동족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쿠샨이 초원으로 들어간 찰나였다.
“…….”
마침내 초원의 광경…. 아니 참상을 목격한 쿠샨은 또 한 번 얼어붙고 말았다.
머리에 얼음이 박힌 시체, 온몸이 난자 당한 시체, 다리가 터진 시체, 전신이 그을린 시체.
그랬다. 온 사방이 시체 천지였다. 그것도 그냥 시체가 아닌, 쿠샨의 동족인 거인이 시체가.
한참 동안 망부석처럼 서 있던 쿠샨의 머릿속에 드디어 한 생각이 서서히 떠오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제야 초원의 상황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원은 아직도 곳곳에서 격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인간들은 조직적으로 거인을 전방에서 몰아치고, 괴조들 또한 떼로 모여 거인의 후방을 공략한다. 그리고 거인은 최선을 다해 응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쿠샨의 눈에 들어오는 상황은 단 3가지 뿐.
거인을 공격하는 인간과, 거인을 공격하는 괴조. 그리고 그 두 공격에 하나하나 쓰러져가는 동족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800명에 달하던 동족들이, 이제는 절반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절반의 절반도 보이지 않는다.
쿠샨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조금도 모른다. 그러나 이쯤 되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추측은 할 수 있었다. 가령, 예를 들면….
톡….
문득, 그리도 소중하게 여기던 신물이 절로 쿠샨의 손에서 빠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
그리고 그 순간, 쿠샨은 저도 모르게 초원의 중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동안 여러 소리들이 들려왔다. 동족이 외치는 비명은 물론, 엄청난 폭음 소리, 괴조들이 날갯짓하는 소리 등이 중구난방으로 쿠샨의 귓전을 울렸다. 쿠샨은 아예 귀를 막아버렸다. 심정 같아서는 눈도 감아버리고 싶었다. 왜냐하면….
‘쿠샨, 도망쳐라!’
혹시라도.
‘우리, 친구지?’
정말 혹시라도 보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니야아아아!”
자신의 동족과 싸우는 친구의 모습을.
이윽고 쿠샨이 초원의 중앙에 도착했을 때, 정면에서 동족들 수십 명이 모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둥글게 모인 거인들은 수백의 괴조 떼에 맞서 있는 힘껏 항전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지키려는 듯이.
“쿠챠르! 쿠챠르 대부!”
쿠샨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자 목소리가 들렸는지, 둥글게 모여 있던 거인들 중 몇 명이 머리를 돌리고 반응했다.
“작은 주인! 도대체…!”
“작은 주인! 위험…!”
여러 소리들이 들려왔으나, 쿠샨의 귀에는 쿠챠르가 여기 있다는 말 한 마디만이 들려왔다. 쿠샨은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그곳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쿠챠르의 키는 일족 중에서도 가장 크다. 그럼 지금쯤 당연히 보여야 정상인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서 있지 못하는 상태라는 소리였다.
이윽고 동족들이 만든 원 안으로 파고들어간 쿠샨은 드디어 확인할 수 있었다. 지면에 누워 있는 쿠챠르의 처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몸의 절반 이상이 장기가 드러날 정도로 파헤쳐졌다. 흘러내린 피가 고여 웅덩이를 이룬다. 예리한 창에 난자 당했는지, 목 부분은 물론 가슴부터 복부까지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쿠챠르! 쿠챠르!”
하지만 놀랍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챠르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쿠샨이 거의 무너지듯이 주저앉아 몸을 흔들자 힘겹게나마 눈을 뜬 것이다. 쿠샨을 확인하고 억지로 웃어 보이기까지 한다.
“쿠샨…. 이냐….”
“쿠챠르! 쿠챠르 대부! 괜찮죠? 아직 죽은 건 아니죠? 아니, 안 죽을 거죠?”
“그거…. 봐라…. 인간은…. 믿으면…. 안 된다고….”
“마, 맞아요. 쿠챠르 말이 무조건 맞아요. 앞으로 다시는 생떼 안 부릴게요. 아니, 이상한 소리도 하지 않을게요. 네? 그러니까 괜찮은 거죠?”
그 순간 쿠챠르가 거센 기침을 하더니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걸 보는 쿠샨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괜찮으냐고 묻는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더없이 찡그려져 가고 있었다. 쿠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젖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사실 쿠샨도 이미 알고는 있었다. 쿠챠르가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그저 받아들일 수가 없을 뿐.
“허억…. 허억….”
그때 힘겹게 숨을 뱉던 쿠챠르의 눈동자가 느닷없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자 쿠샨이 얼른 내밀어 잡았다. 쿠챠르는 그대로 쿠샨의 손을 인도했다.
잠시 후, 쿠샨이 손이 무언가에 닿았다. 그걸 쥐라는 듯이 쿠챠르가 온몸의 힘을 손 하나에 집중한다.
“쿠챠르…?”
손이 파르르 떨리는걸 느꼈는지 쿠샨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지면에 반듯하게 놓인 묠니르를 확인한 순간, 쿠샨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묠니르를 움켜잡았다. 그제야 쿠챠르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 진짜 주인…. 쿠샨 토르….”
쿠챠르의 몸은 물론 목소리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잠깐 형형하던 눈동자가 다시금 빛이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언제라도…. 옆에서…. 보필하고 싶었는데….”
“쿠챠르 대부! 정신차려요! 네?”
“우리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쿠, 쿠….”
쿠챠르의 진심을 들은 순간 쿠샨은 가슴속으로 무언가 왈칵 솟아오르는걸 느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헉, 허억….”
떨리는 숨을 길게 흘려내는걸 마지막으로, 가늘게 이어지던 쿠챠르의 떨림이 사라졌다. 한 줄기 핏물을 뱉어낸 입이 힘없이 달싹인다.
“끝까지…. 못해서…. 죄송….”
그 순간, 두 눈의 빛이 완전히 꺼져버렸다.
쿠챠르는 끝내 말을 매듭짓지 못한 채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묠니르까지 간신히 인도했던 손이 툭, 하릴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쿠챠르…?”
언제는 형처럼, 언제는 삼촌처럼, 또 언제는 아버지처럼 지켜주고 조언해주던 존재였다.
“쿠챠르…!”
그런데, 이제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쿠챠르….”
그렇게 쿠챠르가 정말로 숨을 거뒀다는 걸 인지한 순간.
“…….”
쿠샨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고요히 흘러나왔다. 투명한 눈물이 아닌 진한 핏빛을 띤 눈물이 흘러나온다. 마치 피눈물처럼.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 바로 이 순간 시작되었다.
‘거인들이여, 슬퍼하라. 어디 한 번 슬퍼해보라. 절절하고 슬픈 감정을 느껴보라.’
슬픔을 느낀 거인이.
‘슬픔을 되찾음은 물론, 저주로 속박된 힘까지 풀려날 것이며, 과거의 영광 또한 자연스레 되찾을 것이다.’
모든 것을 되찾기 시작했다.
‘용맹함은 남겨두나, 전략을 앗아갈 것이며.’
전략적인 사고가 가능해지고.
‘사랑은 남겨두나, 평화는 없을 것이며.’
평화를 구축할 수 있게 됐고.
‘지성은 남겨두나, 진화할 지혜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지혜가 허락되고.
‘천성은 남겨두나, 기이한 신력을 빼앗아갈 것이며.’
타고난 신력이 돌아오며.
‘살아갈 터전은 남겨두나, 괴물들의 경외를 거두어갈 것이며.’
다시금 괴물들의 복종을 받고.
‘주체할 수 없는 광기를 부여할 것이며.’
주체할 수 없던 광기가 사라지고.
‘너희가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게 할 것이다.’
비로소, 마음의 자유를 되찾았다.
이윽고, 초원의 전역에 갑작스럽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정적.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폭음이 끊이지 않던 초원이, 한순간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하고 괴괴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사용자든 괴조든,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초원의 중앙에서 갑작스레 피어오른 전신을 전율케 할 정도의 기운을.
초원을 잠식하는 것도 모자라, 온 산맥으로 범람해가는 광포하기 그지없는 기운을.
그렇기에,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스산한 바람이 초원을 스치고 지나갔다.
번쩍!
그 순간, 초원의 중앙에서 어둠을 밝히는 몇 개의 눈동자가 비춰졌다.
눈동자들은 더 이상 광기를 뜻하는 붉은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뜨겁게 작열하는 듯한 새하얀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칠흑 같은 어둠 속 새하얗게 작열하는 눈동자들의 수가 점차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잠시 후.
종내 끊임없이 피눈물을 흘리는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킨 찰나.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증오와 슬픔이 담긴 엄청난 절규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퍼져 나가 온 산맥을 떠르르 떨쳐 울렸다.
지상의 모든 괴물의 경외를 명하는 토르의 함성.
아득한 신화 시절.
지상의 지배자로서 거신 전쟁을 이끌었던 거인들의 전설이, 강철 산맥의 초원에서 되살아난다.
그리고.
“전원 전투 준비.”
초원의 한쪽.
화륵, 화르륵!
반신의 함성마저 불태워버리는 태고의 불꽃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 작품 후기 ============================
7월 25일(금요일) 하루 휴재합니다. 독자 분들의 양해를 부탁 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