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53
00652 마성(魔性) Vs 겁화(劫火). =========================================================================
허공에 출력된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한 생각이 뇌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보상 포인트.’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외쳤다.
“고연주…!”
생각보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쥐어짜내듯이 말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고연주는 얼른 달려와주었다.
“수현…!”
고연주는 나를 보고는 서글픈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짓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 가능한 행동이었으나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나는 억지로 손을 들어올린 후 검지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도시가 있는 방향이었다.
“언니! 오빠가…!”
줄곧 고개를 돌리고 있으면 어쩌나 싶은 와중, 익숙한 목소리가 고연주를 불러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목이 편하고 누군가 계속 물약을 부어준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김한별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후, 부름에 눈을 뜬 고연주는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의아한 낯빛을 비췄다.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쪽…. 아틀란타….”
“수현?”
“전장…. 이탈….”
“…지금 저보고 전장을 이탈하라고요?”
간단한 단어만 말했음에도 고연주는 바로 알아들어주었다.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 떴다.
“수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러자 고연주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아마 도망치라는 의미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조금은 갑갑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느릿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도망이 아니라…. 고연주가 아틀란타로….”
“그럴 수 없어요. 아니, 그러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같이…!”
“업적…. 보상….”
“…네?”
가까스로 업적 보상이라는 말을 꺼내자 그제야 고연주의 말이 흐려졌다.
내가 고연주에게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아틀란타로 달려가서 업적 보상을 받아달라는 말이었다.
아까 탑의 이정표를 발견한 이상 아틀란타는 정말로 목전이다. 고연주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를 생각해보면 금방 다녀올 수 있을 터.
이정필처럼 ‘탈영’ 이 아닌 ‘탐색’ 을 목적으로 행동하다 아틀란타를 발견하는 경우, 설령 고연주 혼자서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원정대 사용자 전원에게 업적 보상이 부여된다. 그러면 다른 건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능력치 포인트가 보상으로 굴러들어온다. 즉 그 포인트로 체력을 올림으로서 화정의 3차 각성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고연주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러니까…. 지금 아틀란타로 가서 업적 보상을 받으라는 말인가요?”
고연주는 바바라 공략 전에 소환된 사용자인 만큼, 이제는 내가 원하는 바를 알아챘을 것이다. 또한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사용자에 한해, 1 능력치 포인트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도.
“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하는 기색이 보이는 고연주.
“제발…!”
그래서 나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재촉했다.
그 마음은 정말로 고마우나, 지금 그나마 생각나는 방법이 이것밖에는 없었다. 아까의 전투로 완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 현재 내 사용자 정보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지옥 대공을 이기지 못한다. 이대로라면, 설령 기적적으로 몸을 회복해 2차전을 벌인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그런 만큼,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표정에 깃든 진심을 읽은 걸까?
“…알았어요.”
아랫입술을 깨문 고연주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녀올게요. 다녀올 테니까, 절대로 죽지 말아요.”
그리고 나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절대로 죽지 말아요.’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고연주는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점이 되었고 그대로 사라졌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멀어져 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지금쯤 이를 악물고 달리고 있겠지.
이렇게 고연주를 보내기는 했으나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네 개의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그리고 냉엄한 현실을 직시한 순간 깊은 수렁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능력치 포인트로 잠깐 희망을 가졌다고는 해도, 상황은 야속하리만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물론 객관적으로 상황은 나아졌고, 또 나아질 것이다.
제갈 해솔의 마력 능력치가 101포인트를 달성했고, ‘쓰러질 수 없는.’ 의 랭크가 상승했다. 거기다 고연주가 도시를 발견하는 즉시 체력을 101포인트까지 찍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래서?’ 라는 생각이 가시지를 않는다. 어떻게 반격의 수단을 마련하려는 시도는 했으나, 지금 이 상황이 절대로 녹록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차라리 상대가 쿠샨 토르였다면 이길 수 있겠다며 주먹이라도 불끈 쥐었겠지.
그러나 현재의 상대는 지옥 대공. 사실대로 말하면, 내가 화정의 3차 각성을 이뤄도 이길 수 있는 상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까 잠깐 붙어본 결과 본능적으로 느낀 직감이었다. 나와 동격의 힘을 지닌 지옥 대공은, 이미 3차 각성을 벗어나 더 높은 경지를 이루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말인즉,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발버둥쳐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어중간한 각성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아까 절박하게 도망치라고 외치던 화정의 목소리가 이제야 뼈저리게 느껴진다.
“…….”
돌연 전방에서 번쩍이는 섬광과 살 떨릴 정도의 폭음이 들려온다.
아니, 실은 아까부터 들려오던 굉음들이었다. 비록 눕혀진 상태라 보이지는 않으나 어떤 상황인지는 느낄 수 있다.
공찬호가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도 들려왔고, 번개가 번쩍이는 소리, 무언가 크게 터지는 소리, 액체가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 지옥 겁화가 타오르는 소리 등…. 비명은 물론, 무지막지한 마력의 흐름들이 1초가 멀다 하고 전해져 오고 있었으니까.
그 소리들이 듣기 싫어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귀도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도망치라고 했는데도….’
아니, 어쩌면 도망가도 소용없는 일이었을지도.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작스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문득, 회한이라는 감정이 찾아 들었다.
이제 다 왔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아틀란타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지금껏 무엇을 위해서….’
아직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어떻게든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은데, 상황은 이미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그 간극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괴리감.
설마 그때 느꼈던 감정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여기서 또 느끼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이 보이지가 않는다….’
그때.
똑!
느닷없이 이마에 빗방울이 하나가 떨어졌다. 갑자기 무슨 비가 내리나 싶어 살그머니 눈을 뜬 순간, 나는 절로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물방울이 흘러내려 내 이마를 맞춘다.
…아니. 빗방울도, 물방울도 아니었다.
그것은, 눈물이었다.
김한별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나지 않는다. 억지로 참고 있는지 목울대가 계속해서 고저를 그리고 있다. 소리 죽여 오열하고 있었지만,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턱을 지나 자꾸만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런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슬픔과 공포심이 서려 있었다.
김한별은 왜 울고 있는 걸까.
도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저렇게 우는 걸까.
“…아.”
내 시선을 느꼈는지, 불현듯 김한별이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었다. 엉겁결에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눈에 밟힌다.
“오, 오빠….”
김한별은 흔들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오빠…. 오빠….”
다시 한 번 나를 부른 김한별은 코가 맞닿을 정도로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친 채, 속살거리듯이 말을 잇는다.
“얼마 전에 물어보신…. Amor Nuntios…. 그 단어….”
응?
‘Amor Nuntios?’
사실상 상당히 뜬금없는 말이라 나는 머리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다가 잔뜩 눈 흘김만 받은 단어이지 않은가.
그러나 김한별은 조금도 아랑곳 않았다. 그저 아주 잠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사랑 메시지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요.”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망연히 시선을 들어올리자 결연한 눈빛을 빛내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말을 차마 이해하기도 전, 김한별의 입술이 떼어졌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것 같아요.”
…사랑?
그러자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도 모자라, 온 정신이 멍해지는걸 느꼈다.
하지만 김한별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사랑해요.”
“…….”
“네. 저는 오빠를 사랑해요.”
“…….”
“사랑해요. 통과의례에서 첫 눈에 반했을 때부터, 쭉 좋아해왔어요.”
“…….”
김한별은 똑같은 말을 세 번이나 되뇌었다. 한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변했다. 혹시 잘못들은 게 아닐까 싶었으나, 아니었다. 중간중간 흐느낌으로 인해 목이 메었어도, 사랑한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이것만큼은 제대로 말하겠다는 듯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저번처럼 경계를 서는 도중이면 몰라도,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의 고백은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그 순간 김한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던 얼굴이 서서히 멀어졌다.
김한별이 입을 열었다.
“궁금하시죠?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했는지….”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여전히 눈물이 맺힌 낯으로 서글프게 웃어 보였다.
“왜냐하면….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제야.
“오빠. 죄송해요.”
나는, 그때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만 해도 고막을 시끄럽게 울리던 소음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앞쪽에서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기척도 느껴졌다.
‘왔구나.’
상황은 굳이 보지 않아도 뻔하다. 지금 들려오는 걸음 소리는, 지옥 대공이 자신에게 덤벼든 사용자들은 모조리 침묵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뒤통수에 땅이 조심스레 닿는 감촉이 전해졌다. 김한별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러면서 덜덜 떨고 있는 손을 품 안으로 집어넣더니 보석을 한 움큼 끄집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 한별아.”
몸은 여전했다. 똑바로 일어서기는커녕 제대로 가누는 것조차 힘겨운 상태였다. 그런 만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무하다.
그래, 나는….
‘…….’
…젠장.
“씨발….”
또다시 찾아온 무력감에 절로 욕설이 나오고 말았다.
그 순간이었다.
– …살리고 싶어?
까닭 없이 혐오감이 치솟아 애꿎은 땅만 긁을 즈음, 갑작스레 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정?’
– 길게 이야기할 시간 없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살고 싶어, 살리고 싶어?
언뜻 듣기로는 화정의 어조는 명령조에 가까웠다. 어찌 보면 화가 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살고 싶으냐, 살리고 싶으냐?’
일견 들으면 비슷한 말이다. 그러나 두 말은 커다란 차이점을 갖고 있다.
‘그거야….’
아무튼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나,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뻔하지 않겠는가.
‘살리고 싶다.’
그렇게 속으로 대답한 순간이었다.
띠링!
『사용자 고연주가 아틀란타 대륙의 도시를 발견했습니다!』
『축하합니다….』
『고대 아틀란타는….』
『아틀란타 내 도시 발견 보상으로, 원정에 참가한 사용자 전원에게 GP를….』
홀연히 허공에 여러 개의 메시지가 삽시간에 출력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 개의 메시지 중에서도 내 눈에 들어오는 건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아틀란타 내 도시 발견 보상으로, 원정에 참가한 사용자 전원에게 능력치 포인트를 1(Free Point)만큼 지급합니다!』
마침내, 지푸라기 하나가 눈앞에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어제 04시 06분쯤에 집필을 완료했는데, 업데이트를 하려고 보니 조아라가 점검 중에 있더군요. 제가 점검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지 못한 상태라 굉장히 당황하고 말았습니다.(점검은 04시 00분을 시작으로, 08시 00분을 기점으로 풀린 것으로 압니다.)
이 점 독자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 드리며,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_(__)_
PS. 다음 회는 BGM 하나를 추천 드리겠습니다. 업데이트 전에 이번 회 코멘트란 에 올려놓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