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60
00659 1. 김칫국과 설레발의 차이점. =========================================================================
고연주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돼있는 상태였다. 고연주 스스로도 인근에 다다랐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전장을 이탈할 때 들리던 요란한 소음들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헐레벌떡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눈물 바다가 된 일대를 바라보며 고연주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양손으로 창대를 부서져라 쥔 채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안현.
멍하니 선 채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안솔.
엎드린 자세로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이유정.
망연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은 정하연.
‘설마….’
그러고 보니 김수현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외에도 보이지 않는 클랜원은 많았으나 유독 김수현이 없다는 사실이 고연주에게 크게 다가왔다. 혹시나 하면서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 고연주는 클랜원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막지 못했어…. 막지 못했어….”
안솔은 흡사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안솔이 깨어났다는 사실에 놀란 고연주는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였다.
“놔, 놓으라고! 수현이가, 수현이가!”
갑자기 절절한 외침이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곧 시선을 돌린 고연주는 두 가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클랜 로드, 제발…! 이미 늦었어요, 늦었잖아요!”
너덧 명의 사용자들이 애원하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힘껏 제지하는 모습이 보였고.
“구멍이, 구멍이 작아져 가잖아! 놓으란 말이다아아아!”
사용자들에 둘러싸인 채 양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어딘가로 달려가려는 김유현도 보였다. 예전의 차갑고도 차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광인과도 같은 절박한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안솔은 여전히 혼잣말을 되뇌는 중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고개를 돌린 고연주는 돌연 한쪽에 홀로 서 있는 제갈 해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자 고연주의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저 아이가 왜?’
제갈 해솔은 어느새 표혜미의 모습에서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헬레나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짐으로써 폴리모프 효과도 같이 사라진 것이다. 다만 이제 막 전투가 끝났고 받은 충격이 큰 탓에 알아챈 이가 없을 뿐.
왜 제갈 해솔이 여기 있는지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그러나 모로 봐도 누가 알게 되면 좋지 않을 거라 판단한 고연주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림자를 일으켰다.
“앗?”
그림자가 자신을 감싸 안자 제갈 해솔이 미약한 침음을 흘렸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니?”
“이, 이거요?”
고연주가 물어보자 제갈 해솔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그러자 고연주는 우선 다른 건 됐으니 전장에 관한 설명을 해달라 요구했고, 그제야 진정한 제갈 해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거의 초주검 상태까지 몰렸던 김수현의 회광반조(回光返照). 그리고 헬레나의 희생과 김수현, 김한별이 공간 안으로 끌려들어갔다는 것까지.
“아….”
제갈 해솔의 설명을 들은 고연주는 가장 처음 암담한 기분을 느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쿡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수현은 첫 만남 때부터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여주던 사용자였다. 때로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상대를 박살냈고, 때로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적을 무력화시켰다. 누구나 해결하기 힘들 거라 생각한 위기도 보기 좋게 타개해왔다.
물론 그 과정에는 클랜원들의 도움도 적잖이 들어갔으나 중심은 언제나 김수현이었다.
그래. 그랬는데….
그때였다.
“모두…. 전장을…. 정리합니다….”
홀연히 들려오는 고요한 음성. 몸을 돌아본 고연주의 눈에 한소영이 전장 정리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언제나 무표정하던 얼굴이 오늘따라 더더욱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있다. 지독할 정도로 냉정한 명령이었으나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이미 실종되거나 죽은 사람보다는, 부상당한 사람을 구조하고 산 사람을 우선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움직이지 않는 건…. 아니 못하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 김수현이 없다는 사실을.
이러한 상황에서 고연주는 간신히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현재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머셔너리는 지금껏 김수현을 구심점으로 활동해온 중앙 집권 형 클랜이다. 그런데 김수현이 사라졌으니 차후 행보에 어떤 식으로든 좋지 못한 영향이 미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말인즉 이제는 머셔너리의 미래마저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렇게 생각한 고연주는 제갈 해솔에게 이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 신신당부한 후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이유정! 그만 질질 짜고 일어나!”
이유정은 아기처럼 서럽게 울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너희도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거야? 빨리 안 일어나?”
고연주로서는 드물게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 탓인지 망연하게만 있던 클랜원들이 하나하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고연주는 짧은 한숨을 흘리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느덧 저 멀리서부터 은근슬쩍 물러났던 사용자들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
덜컹덜컹…! 덜컹덜컹…!
– 승객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승객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안내 방송에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가 보였다. 반사적으로 서너 번 눈을 감았다 뜨자 가물가물하던 세상이 천천히 잡히기 시작했다. 전역 신고를 하고 룰루랄라 기차를 탄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아무래도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흐아아암~. 어제 전역 축하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부대를 나올 때는 드디어 전역한다는 기쁨에 몰랐는데,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몰랐던 숙취가 갑자기 느껴졌다. 원래는 골이 깨질 듯한 숙취는 전혀 좋아하지 않으나, 오늘만큼은 이 숙취가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아니, 오늘은 어떤 일을 당해도 헤헤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왜냐하면 오늘은 내가 전역한 날이니까!
– 이번 역은 서울역, 서울역입니다. 이제 곧….
그렇게 한껏 들뜨려는 찰나, 아까부터 이어진 안내 방송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서울역에 거의 도착했다. 오늘 전역했다고 되도 않은 사치를 부려 KTX 특실을 끊었는데, 생각보다 자리가 편안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잤다.
‘이래서 돈이 좋은 거야.’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창문을 한 번 바라본 후 나는 당당하게 몸을 일으켰다. 하차할 때는 기차 입구에 사람들이 몰리니 미리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복도로 나가려는 찰나.
“응?”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왜냐하면 바로 옆자리에 한 묘령의 여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탈 때부터 출발할 때까지 옆자리에 누가 앉은 기억은 없는데…. 그러고 보니 이 기차, 무 정차가 아니었던가? 아니었나? 급 헷갈리네.
나는 최대한 앞으로 붙어나갈 생각이었으나 곧 나도 모르게 여인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옆자리 여인은 어디 가서도 흔하게 보지 못할 미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한 갈색 빛이 흐르는 결 좋은 머리칼, 길고 가느다란 속눈썹, 복숭아 빛으로 물든 뺨, 도톰하게 돋은 입술…. 그리고 무척이나 선해 보이는 인상은 꼭 껴안아 보듬고픈 충동을 일게 만들 정도였다. 흡사 가녀리고 청초한 한 떨기 꽃을 보는 모습이랄까? 그리고 무엇보다, 옷을 불룩해질 정도의 두드러진 미사일 형 가슴은 정말이지!
“에구구구….”
그 순간 건너편 좌석에서 무언가 힘들어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들자 왠 할머니가 까치발을 들고 힘겹게 짐을 꺼내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여인을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조심 나간 후, 얼른 할머니의 짐을 대신 꺼내 들었다.
“할머니. 이 짐 맞으시죠?”
그러자 할머니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려 그려. 그거 맞아. 정말 고마우이….”
“아니에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요.”
“아이고, 건장한 청년이 심성도 곱고만. 우리 손녀라는 것은 저기서 잠이나 자빠져 자고 있는데….”
“예?”
머리를 긁적이며 웃고 있자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짐을 챙기셨다. 의아한 기분에 여쭈자 할머니는 “저년 말이여, 저년.” 이라 말씀하시며 건너편을 향해 눈짓했다. 아까 내가 앉아 있던 자리였다.
…잠깐. 그렇다는 소리는?
“현아야, 다 왔다! 일어나 이것아! …유현아!”
“에…. 에, 에?”
할머니가 연거푸 외치자 유현아라 불린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리고 반쯤 감은 졸음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나와 눈을 마주친 찰나 갑작스레 시선을 고정했다. 좋아. 이대로 눈싸움…. 은 아니고.
‘…뭐지?’
한없이 선량해 보이는 눈동자가 나를 물끄럼말끄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전역의 효과로 들떠있던 기분이 돌연 가라앉는걸 느꼈다. 이어서 뜻 모를 어색하고도 불안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 아까 가슴을 보고 불경한 생각을 해서 죄책감을 가진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자꾸만 온몸을 엄습한다.
결국 나는 그 기분을 견디지 못해 먼저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대로 복도를 달려 입구를 벗어났다. 잠시 등 뒤로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재빠르게 문을 닫고 다음 칸 객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이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
이윽고 한 칸 건너 입구에 다다르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마침 기차도 정차 구역에 들어선 터라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입구에서 하차할 수 있었다.
‘정말 이상한 여인이었어.’
아니, 사실 정작 이상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여인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이고 나 혼자 멋대로 반응한 것뿐이니까. 아무튼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해, 나는 기분도 환기할 겸 있는 힘껏 숨을 들이키며 머리를 젖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나는 입에 부딪치는 서너 개의 빗방울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하늘도 먹구름으로 가득하게 들어차 있었다. 부대를 나올 때만 해도 화창한 날씨였는데 어느새 날이 흐려진 모양이다. 이런, 안 그래도 겨울 바람이 싸늘한데 비까지 내리다니. 최악이다.
후드득, 후드득!
잠시 후 먹구름 낀 하늘에서 빗방울이 세차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역은 곧바로 분주하게 변했다. 나도 일부 사람들처럼 편의점으로 들어가 우산을 살까 했으나, 엄청나게 몰린 인파를 보고 포기하고 말았다. 비를 맞는걸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니 그런데 왜 자꾸 아까부터 빗방울이 입에만 잔뜩 떨어지는 거야?
나는 투덜거리며 입을 연신 닦아냈지만, 곧 하늘이 내 전역을 축하하려는 의미에서 키스를 보내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좋아. 이런 실없는 생각이 드는걸 보니 확실히 아까의 기분에서는 벗어난 것 같다.
나는 속으로 킥킥 웃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영화의 한 장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똑같이 해볼 요량으로 양팔을 활짝 벌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남들은 꼴값 떤다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상관없다. 지금은 어떤 창피한 상황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니까.
할짝…! 할짝…!
비는 계속해서 규칙적으로 떨어졌다. 역시나 입에만 떨어지는걸 보니 어쩌면 내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바로 지금도, 빗방울은 내 입을 나긋이 핥고 있었으니….
‘응? 빗방울이 나를 핥아?’
핥핥…. 핥핥….
…확실하다. 비가 나를 핥고 있다. 그런데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빗방울이 나를 어떻게 핥지? 아니 흐르는 건가? 가만히 느껴보니 입에 흐르는 빗방울도 차가운 게 아니라 뜨거운 것 같은데…. 그럼 뜨거운 빗방울?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 기차에서 느꼈던 잠에서 깰 때와 비슷한 기분. 그리고 잊고 있던 기억들이 느닷없이 잠을 깨고 천천히 일어나는 기분.
‘그, 그래. 이제 기억났어. 아까 여인은….’
그러는 와중에도 비는 계속 입을 맛보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뒷목이 상당히 편안해진걸 느꼈다. 굉장히 감미롭고 포근한 감촉이었다. 이대로 눈을 감은 채 있으면 잠이 올 것 같지만, 아까부터 입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결국 나는 살그머니 눈을 뜨고 말았다.
“…….”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역에서 본 하늘이 아니었다. 오히려 용암이 콸콸 흘러내리는 것 같은 풍성하기 그지없는 누군가의 머리칼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찾아오는 극심한 현기증.
“큭!”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자 입에서 느껴지던 감촉이 잠깐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한순간 머릿속에 어마어마한 격통이 찾아와 고통에 몸부림쳐야만 했으니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현기증도 느릿하게 사그라질 즈음.
“이제 일어났느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가 귓전을 조용히 울렸다. 이내 한껏 찌푸렸던 눈을 도로 뜬 순간, 나는 멍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까만 해도 보이던 풍성한 머리칼은 보이지 않고, 갑자기 붉은 혀 같은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붉은 혀는 점차 가까워지며 시야에서 크기를 키워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후후.”
어여쁜 입술 사이로 살짝 배어 나온 혀는.
할짝!
그대로 내 입을 부드러이 핥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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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대공이 김수현을 선명하게 핥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독자 분들, 저 이렇게 오자마자 결말 떡밥 던지고 말았어요! 하하하.
아무튼 각설하고, 그럼 시즌 3 외전 시작합니다.
전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