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04
00703 달라지는 현재, 그리고 미래. =========================================================================
시간은 화살같이 흘렀다.
그동안 너무 도시 복구 작업에만 열을 올렸던 걸까. 과장 약간 보태서, 눈 한 번 깜빡인 것 같은데 어느새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중앙 관리 기구에서 지정한 보장 기간이 어제 부로 끝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오늘 아침 도시는 유난히 시끄러웠다. 듣기로는 이른 새벽부터 활성화된 워프 게이트가 여태껏 한 번도 꺼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중이라고 한다. 사용자들이 아틀란타에 가지는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소리였다.
아무튼, 이제 보장 기간도 끝났으니 머셔너리도 새롭게 변화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근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도시는 정말 많은 게 변했지만, 여기서 그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나는 일부 클랜원을 1층 회의장으로 호출했다. 이제 곧 불어올 새로운 바람에, 새로운 변화를 꾀할 일환으로써.
*
“확실히 수현의 말대로예요. 이제 슬슬 우리 클랜원도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겠네요.”
나른한 어조의 고혹적인 음성이 조용한 회의장을 울렸다.
나는 다른 의자보다 조금 더 높은, 회의장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권좌에 앉은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명만 제외하고 모두 도시 복구 작업에서 빠지는 게 좋겠어요. 어차피 성이나 광장, 신전 등 필수적인 건물 요소는 이제 거의 완공에 가까워졌으니까요.”
선 채로 말을 잇는 고연주와 옆으로 주르르 앉은 남다은, 선유운, 차소림. 그 4명의 건너편에도 정하연, 신재룡, 임한나, 안현이 앉아 있다.
그리고 반들반들한 빛을 내는, 흡사 하얀 리무진을 연상케 할 정도의 길쭉한 테이블. 상석에 앉은 나를 중심으로 좌우 8명의 클랜원이 일렬횡대로 포진해 있었다.
바닥에는 금실로 수놓은 붉은 융단이 입구 끝까지 번듯하게 깔렸고, 조금 더 바깥쪽에는 바닥부터 드높은 천장까지 관통하는 흰 기둥이 탄탄하게 버티고 서 있다.
게다가 천장에 매달려 은은한 빛을 뿌리는 수정 샹들리에와, 대리석 벽을 치장하는 클랜 마크가 그려진 커다란 붉은 휘장까지. 일견 보기에도 화려함의 극치를 뽐내는 게, 마치 중세 시대 왕실의 회의장을 그대로 구현한 듯하다.
아니. 정말 그와 비슷한 콘셉트로 개축했다. 3개월 전 먼지만 켜켜이 쌓여 있던 공간이 이렇게 멋들어지게 변했을 줄, 과연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음~.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산하 클랜들의 몫도 남겨야겠죠? 사용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번화가나 거주민들을 들여놓을 주거 지역을…. 수현?”
잠시 딴 생각에 빠졌음을 알아챈 걸까. 마침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나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래요. 산하 클랜.”
듣고 있었다는 의미로 말했으나 고연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곱게 눈을 흘겼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하연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튼, 조만간 산하 클랜들과 한 번 얘기를 해보셔야 할 거예요. 구역 배분도 그렇고, 세금 같은 세세한 문제도 있으니까요.”
“구역 배분이야 이미 저번에 이야기를 마쳤고. 세금도 딱히 따로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어차피 북 대륙과 똑같은 세율을 적용할 생각인데. 30%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한 번은 공식적인 모임을 가지시는 게 좋아요. 그들도 확실한 절차를 밟아놔야 마음이 놓일 테니까요. 또 산하 클랜들이 그동안 많이 수고해준 것도 사실이니, 이제는 어느 정도 다독일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좋은 관계를 맺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음….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는 걸로.”
머리를 끄덕이자 정하연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을 짓고는, 깃펜을 들어 기록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다른 클랜원은, 그냥 조용하게 앉아만 있다. 특히 차소림과 선유운이 압권이다. 회의 내내 계속 부동 자세로만 앉아 있는데…. 저러면 안 힘드나.
“아차. 수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전령이 왔네요.”
그때 막 자리에 앉으려던 고연주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도로 몸을 일으켰다.
고연주는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 정하연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내가 앉은 권좌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내 정하연이 조용히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중앙 관리 기구의 전령이에요.”
우웅!
이윽고 고연주가 계단을 밟아 권좌로 올라오는 동시, 주변으로 블록 필드가 전개됐다. 아무래도 다른 사용자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 섞인 모양이다.
“중앙 관리 기구라면…. 이효을?”
“네.”
“흠. 그럼 딱히 비밀스럽게 말할 게 있나요? 해봤자 안쪽 중앙 도시에 관한 문제나 주요 건물 이전에 관한 이야기일 것 같은데.”
“맞아요. 그런데 또 하나, 아니 두 개가 있네요.”
고연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북 대륙 수호자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짧은 신음을 흘렸다.
“신분 노출이라도 됐답니까?”
“모르겠어요. 저도 더 자세히 캐물으려고 했는데, 거기까지는 저한테 공개할 수 없는 정보인가 봐요.”
“…또 다른 하나는요?”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아무튼, 곧 우리 쪽으로 방문할 테니 꼭 시간을 내달래요. 믿을 건 수현 씨밖에 없다고….”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무언가 좋지 못한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수호자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확실히 가벼이 넘길 게 아니었다.
맡은 대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효을만 봐도 알 수 있잖은가. 1회 차서 죽은 걸 살려놓으니 2회 차에서는 나름 괜찮게 해주고 있으니까. 물론 나도 적잖은 일을 해내기는 했지만.
‘아무튼…. 맹아라라고 했었나?’
현재 수호자의 이름을 떠올리며 나는 블록 필드를 툭툭 건드렸다. 이어서 마법이 해제되는 동시 꽤 재미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입을 가린 채 까르르 웃는 임한나와 한심하다는 듯 차갑게 눈을 빛내는 남다은. 그 앞에는 안현이 바보 같은 표정을 반복해서 지으며 두 여인을 웃기려 애쓰고 있었다.
고연주가 쯧쯧 혀를 차며 내려가고 나는 가만히 안현을 구경했다.
안현도 바보는 아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곧 표정을 딱딱히 굳히고는, 마치 로봇처럼 떨떠름히 머리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안현.”
“예!”
안현이 크게 외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나는 일어서라는 소리까지는 안 했는데.
나는 이마를 지긋이 누르며 입을 열었다.
“너는 말이다. 내가 왜 너를 굳이 이 회의장까지 끌고 들어와서 앉혔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니?”
“예, 예? 에….”
직설적으로 물어보자 안현이 말을 더듬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푹푹 나온다.
‘이놈을 정말 대 간부로 키워도 괜찮을까….’
안현은 정말 너무 아쉽다. 약간, 정말로 아주 약간 부족하다. 눈에 보이는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만 있다면 일 하나 정도는 능히 맡길 수 있겠는데, 아직은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다. 왜 굳이 이 8명을 따로 모았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해봤다면, 조금은 진중해졌을 텐데. 차라리 김한별을 데려올걸 그랬어.
가볍게 손짓하자 안현은 머쓱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럼….”
여하튼 나올 이야기는 대충 다 나왔다는 생각에 이만 회의를 파하려는 순간이었다.
“오라버니!”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와 동시에 누군가 입구로 불쑥 들어왔다. 양팔을 활짝 벌린 채 도도도도 달려오는 누군가는, 다름 아닌 안솔이었다.
이윽고 안솔은 달려오는 그대로 활짝 웃으며 외쳤다.
“북 대륙 식구들이 도착했어요!”
반가운 소식이었다.
*
머셔너리 클랜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북 대륙에 남았던 클랜원들이 거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마침내 아틀란타로 이사 온 것이다. 사실 조금 늦는다고 생각했는데, 조승우가 워프 게이트에 상상 이상으로 사용자가 몰렸다면서 넉살 좋게 양해를 구했다.
어차피 파할 생각이었던 회의를 끝내고 나는 바로 8층으로 올라갔다. 왜냐면 8층에 내 집무실 겸 숙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마르를 안은 채 계단을 올라 8층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깔끔하게 닦인 회랑을 지나 집무실 문을 열자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화려한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마르가 탄성을 질렀다.
바닥 전체에 깔린 푹신푹신한 붉은 털 카펫은 물론, 벽과 천장에 걸린 화려한 장식물들은 환하게 빛나며 곱고 아름다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크기도 엄청나게 크다. 아마 100평도 넘지 않을까.
“아빠아빠. 여기가 아빠 방이에요?”
마르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눈으로 뾰족이 돋은 귀를 정신 없이 팔락거리고 있었다. 얘는 기분이 좋으면 귀를 이렇게 움직이는 건가? 원래 요정들이 이러나?
나는 그렇다고 말해주며 꼼지락거리는 마르를 내려주었다. 마르는 한껏 들뜬 얼굴로 어딘가로 달려가더니 겹겹이 쳐진 하늘하늘한 커튼을 젖혔다. 그리고 건너편에 드러난, 너덧 명이 올라가도 남을 정도의 넓고 커다란 침대에 던지듯이 몸을 뉘었다. 까르르 웃으며 침대에 얼굴을 비비는 게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다.
“우와. 여기가 클랜 로드의 방입니까?”
그렇게 흐뭇한 마음으로 마르를 보고 있자, 돌연 누군가 조심스레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조승우가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내디디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편하게 들어와요.”
“예, 예. 이야…. 이건 그냥 방이 아니라, 집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인데요.”
조승우가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 방에는 집무실, 숙소, 욕실, 서재, 발코니 등 방만 5개였으니까. 사실 그냥 여러 생활을 방 하나에서 해결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주문했는데, 상당히 마음에 들게 만들어졌다. 돈이 많이 들어갔다는 사실은 마음이 아프지만.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듭니까?”
“아…. 저는…. 저기가 가장 마음에 드네요.”
차분히 시선을 돌리던 조승우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방 내부, 집무실을 연장해서 달아 만든 외부 발코니였다.
“저 발코니가 정말 대박이네요. 사실 방이 화려하면서도 조금 갑갑한 느낌이 있는데, 저 발코니 덕분에 숨이 확 트이는 기분입니다. 잠깐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같이 나가시죠.”
흔쾌히 머리를 끄덕이면서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사실 나는 발코니까지는 만들 생각이 없었다. 고연주를 비롯한 여러 여인의 강력한 요청에 억지로 만들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참 가관이었다. 뭐라고 했더라? 이제는 야외 플레이도 슬슬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었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성은 총 10개의 층과 옥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발코니에 서서 보면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바람을 느끼는 듯 먼 곳을 쳐다보던 조승우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정문부터 성의 입구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수로에는 가득히 흐르는 물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중간중간 솟은 연꽃 모양의 분수대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뿜어져 나오고, 좌우로는 밝게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진다.
도시 중앙에 우뚝 솟은 새하얀 성은 그야말로 아름답고 화려함의 극치를 보였다. 처음 봤을 때는 사실 요새에 가까운 느낌이 있었는데, 집중적인 개축 공사를 거치면서 궁전에 가까운 웅장함을 드러냈다.
“정말로 멋지군요. 꼭 인도의 타지마할에 온 기분이 듭니다.”
“아. 저도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와. 정말…. 어떻게 3개월만에 이렇게…. 이 성만 해도 돈 무지하게 들었을 것 같은데요?”
“1할이요. 총 예산의.”
그냥 솔직하게 이실직고했다.
잠시 후, 아래를 내려다보던 조승우가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나를 돌아보았다.
“뭐? 1할? 아니! 1할이나 쓰셨다고요?”
나는 살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에…. 무, 물론 도시의 중심 건물이 가지는 상징성은 중요합니다만….”
바로 말을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슬쩍 쳐다보자 조승우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받은 돈만 7천만 금화에…. 성과도 발견하셨고. 또 자재는 어지간하면 공짜 조달이라고 들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1할이나….”
마치 자신이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는 목소리. 그만 좀 쳐다봐. 이 사람아. 나도 믿고 맡겨놨는데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그게 작업 속도를 높이다 보니 인건비도 많이 들었고…. 그리고 말만 개축이지 사실 거의 새로 짓다시피 한 곳도 많거든요. 또 자재도 거의 최상급으로 도배하다시피 한 터라.”
“자재는 공짜 아니었습니까?”
“그랬는데, 양심에 걸립디다.”
“하, 하기야. 마력석 같은 자재를 무한정으로 달라는 건 확실히 도둑놈 심보겠죠. 아이고….”
조승우는 떠름한 음성으로 동의하고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화제를 돌리는 게 낫겠지.
“소식은 들었어요. 준비를 잘해오셨다고 들었는데.”
“시간이 많았으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머셔너리 아카데미와 모니카 클랜 하우스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재산을 처분했습니다.”
“거의?”
“예. 장비는 지정해주신 것들 빼고 모두 제값을 받고 팔았는데, 보석은 시간을 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수요가 높다고는 하지만, 한꺼번에 많이 풀리면 가격이 낮아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무튼, 이래저래 해서 약 5500만 금화 정도 확보해놨습니다.”
“흠. 그렇군요. 그럼 그 외에, 북 대륙에 별다른 일은 없나요?”
속으로 화제를 돌린 것을 자축하며 말을 이었다.
조승우는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턱을 긁으며 머리를 젖혔다.
“음. 별다른 일이요….”
사실 별다른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뮬에, 타 대륙 사용자들의 출현을 확인했다는 소문입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은, 예상외의 대답으로 되돌아왔다.
“타 대륙 사용자들이 출현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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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셔너리 클랜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인도의 타지마할을 생각하고 구상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