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24
00723 마력(魔力) 숙녀 Vs 행운(幸運) 소녀. =========================================================================
두 여인은 한참 동안 서로 말없이 응시했다. 날은 어두웠으나 정원에는 환한 월광이 부드러이 굽이치며 움직였고, 희뿌연 안개가 조용히 흐르고 있다. 게다가 새하얗게 작열하는 안솔의 지팡이와 황금빛을 뿌리는 제갈 해솔의 눈동자는,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렇게 시간만 하염없이 흐르는 와중, 먼저 말문을 연 건 제갈 해솔이었다.
“우선 설명부터 들어볼까? 왜 막은 거야?”
“……?”
“웬 물음표? 설마, 그냥 구한 거니? 너 그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
“몰라요.”
모른다는, 간단하기 짝이 없는 말이 돌아왔다. 제갈 해솔의 눈 하나가 살그머니 거들뜨며 상대를 응시한다. 농담이라고 말하기에는 안솔의 표정은 한치 흔들림도 없었다. 제갈 해솔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입가에 머금어진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아하~. 알겠다. 또 그거구나? 그러니까 감이라던가, 아니면 행운이라던가.”
흡사 조롱하는 어조로 말하면서 제갈 해솔은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느긋이 거리를 줄인다.
이윽고 두 명은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거 어쩌지?”
도로 걸음을 멈춘 제갈 해솔은 약간 허리를 굽혀 눈을 맞췄다.
“있잖아. 언니는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이거든.”
한껏 낮아진 음성이 안솔의 귓가를 간질인다.
“그래서 감이나 운이 좋다는 말을 믿지 않아요. 차라리 재능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너는…. 재능이라고 보기는 어렵잖니?”
“…….”
“아. 물론 인정해. 세상은 아주 넓고 아무리 나라도 모든 사람을 아는 건 아니지. 하기야 머리도 엄청 좋으면서 죽여주는 각선미를 겸비한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아무튼, 다양하겠지. 조롱하는 게 아니야. 너는 그동안 많은 일을 해왔고 그건 나도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런 만큼 무조건 내 기준을,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을 거야.”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비로소 안솔이 입을 열었다. 그러는 동시, 제갈 해솔의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스리슬쩍 걸음을 물렸다. 어느새 두 여인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였다. 제갈 해솔은 킥킥 웃고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냥 궁금할 뿐이야. 자신 있니?”
양팔을 꼬면서 묻자 안솔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자신 있어. 그 사내가 누구인지도 알겠고, 또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는지 감을 잡았으니까. 그러니까 너도 자신 있느냐고. 나를 막은 행동을, 그 사내를 구한 행동을 자신할 수 있느냐는 소리야.”
말이 어려운 걸까. 안솔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면서 고개만 갸웃갸웃 기울였다. 그러다 천천히 지팡이를 내리면서 가벼운 한숨을 흘렸다.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태도였다.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말이 어려웠니?”
“아니요. 제가 자신이 있든 없든 결과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죠. 왜냐면 선택은 어디까지나 오라버니 몫이니까.”
“…….”
이번에는 제갈 해솔이 침묵했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제갈 해솔도 김수현이 하승우의 정체를 모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자신도 경고하는 것 이상으로는 나서지 않았다.
“맞아. 선택은 확실히 클랜 로드의 몫이야. 그건 동의해. 그런데, 너는?”
“저는 오라버니를 최대한 막을 뿐이에요. 애초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그 순간 눈동자에서 뿌려지던 황금빛이 툭 꺼졌다.
“…막는다?”
말을 따라 한 제갈 해솔의 낯에 모호한 기색이 서렸다. 막는다는 말이 상당히 이상하게 들린 탓이다. 그러니까 마치 김수현이 하승우의 살해를 이미 확정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이윽고 정상으로 돌아온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럼 네 예언 능력은 어떤데?”
완곡히 돌려 말한 척했으나 사실상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안솔은 눈 한 번 깜짝 않고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는 그 사내를 살해하면 안 돼요.”
정말 꼭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또렷하고 분명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살해하면, 안 된다?”
“그래요. 사용자 하승우는 살아야 해요.”
두 번이나 강조했다. 점점 더 재미있어진다.
제갈 해솔은 흥미로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왜?”
“왜냐면….”
끊임없이 이어지던 말소리가 돌연 약하게 흐려졌다.
이윽고 고개 돌린 안솔은 하승우가 들어간 성의 입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아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래야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안솔이 실처럼 가늘게 눈을 떴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도 살 수 있으니까요.”
*
(아무래도 그 사내 말이 맞는 것 같다. 하승우라고 했던가?)
“그래?”
(어. 첫 행선지를 뮬로 잡았거든. 한데 이미 소문이 어느 정도 돌고 있더군. 푸른 산맥에서 꽤 처참하게 살해된 사용자가 발견된 모양이야.)
“으음.”
(아무튼, 현재 가는 중이기도 하지만 우선 들어가 볼 생각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푸른 산맥에서 출몰하는 괴물은 사람을 뼈까지 씹어먹는 놈들이야. 그런데 시체가 나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하지. 한 번 조사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된다.)
“확실히 그렇겠네.”
(알았다. 그럼 푸른 산맥에 도착하면 또 보고하도록 하지.)
“우정민. 잠깐만.”
우정민이 통신을 끊으려는 기색이 보여 나는 급히 붙잡았다.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우정민이 낯에 의아한 빛이 떠오른다.
(왜?)
“혹시 푸른 산맥 조사를 조금 천천히 할 수 있을까?”
(천천히? 걱정은 괜찮은데.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추적은 충분히 조심하면서 진행할 테니까.)
“그게 아니라….”
나는 깍지 낀 손으로 괜스레 엄지를 비볐다.
부랑자 척살 조가 푸른 산맥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한다. 그 신속한 진행 속도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급한 기분이 들었다.
하승우는 왜 정확한 정보를 말한 걸까.
무언가 사정이 있어서? 아니면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려고?
사실 아직까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승우가 들어온 이후, 그동안 계속해서 기회를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정확히 말해서 하승우가 틈을 보이지 않았다. 고연주에게 밀착 감시를 지시했는데도 돌아오는 보고는 ‘이상 무.’ 라는 말뿐.
결국 하승우는 철저히 보통 사용자를 연기하면서 머셔너리 클랜으로 빠르게 녹아 들었다. 이제는 왜 정식 클랜원으로 승격하지 않느냐는 말도 나올 정도였다. 원래는 부랑자 척살 조가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상황을 만들어볼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이대로 무작정 지켜보기에는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크다. 현 상황에 한정해서 시간은 하승우의 편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선택은 두 가지뿐. 거기서 내가 선택할 길은 하나였다.
(김수현?)
“아. 조만간 부랑자 근거지에 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이미 속으로는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실은 부랑자에 관해서 중앙 관리 기구와 꾸준히 논의를 해오고 있었거든. 자세한 사정을 말하기는 좀 그렇고, 아직 확정된 것도 없기는 하지만.”
(그게 정말인가?)
“그래.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면 연락할 테니까 한 번 천천히 해보라는 거야. 서포터 해준다고 생각해.”
(그럼 나야 고맙지. 여하튼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수고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통신을 끊었다. 이내 구슬의 빛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백서연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누구나 백서연이 부랑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거리낌 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승우는 아니잖은가.
아니. 아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 반대의 상황이다. 물론 제 3의 눈이 틀릴 리는 없으나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과정을 만들어내는 것도 나한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어차피 이제 남은 방법은 정면 돌파밖에 없지만 서도.
잠시 후.
나는 차분히 가슴을 추스른 후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가지런히 나열된 호출석 중 하나를 지그시 눌렀다.
*
어두운 방 안.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오후가 지나가고 밤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결정을 내린 이상 행동은 언제나 신속하게.
1회 차 이스탄텔 로우 클랜원이었던 시절 한소영에게 배운 행동이다.
사실상 정면 승부인 이상 준비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만일을 대비한 준비는 마쳤다.
책상 서랍에는 사용자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물약이 한 세트 들어있다. 오염된 위그드라실의 열매로 만든 물약으로 백서연을 심문할 때 많은 도움을 얻었다. 요정 여왕의 정신을 타락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니 이번에도 톡톡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고연주는 밖에서 몸을 숨긴 채로 기다리고 있다. 물론 나 혼자서도 하승우를 놓치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그래도 변수가 생길 수도 있으니. 나와 고연주 두 명이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하승우가 의심할만한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닌 밤중에 갑자기 부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부랑자는 원래 그런 족속이니까.
그래서 나는 새로 들어온 네 명을 차례대로 한 명씩 호출했다. 마침 정식 클랜원으로 승격해야 한다는 말도 솔솔 나오고 있으니 이보다 좋은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이미 사라, 엘리자베스, 하승윤과의 면담은 끝났다. 하승윤과의 면담은 특히 신경 써서, 이제 정식으로 가입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말을 해놓은 상태였다. 말을 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써는 하승우가 의심할만한 거리가 티끌만치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괜스레 책상을 두드리며 문을 응시했다.
똑똑.
“머셔너리 로드 님. 사용자 하승우입니다.”
이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던가?
“예. 들어오시죠.”
이윽고 문이 조심스레 열리면서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내가 눈에 들어온다. 공손하게 들어온 하승우는 방안을 둘러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뭘 그리 놀랍니까?”
“예? 아….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방이 너무 좋아서요.”
“그런가요? 아무튼, 우선 이쪽에 앉으시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승우는 연신 감탄하면서 깍듯한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이로써 거리는 약 5미터 내외. 우선은 절반의 성공이다.
“이렇게 늦은 밤에 불러서 미안합니다. 원래는 조금 더 일찍 끝내려고 했는데 면담하는데 의외로 시간이 걸리네요.”
“아니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러고 보니 승윤이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오더라고요. 아마 방에서 몸을 뒹굴 뒹굴 구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하하.”
하승윤이? 그러면 이야기를 들었다는 소리군.
“사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요. 원래 머셔너리 클랜이 폐쇄성이 짙습니다. 아무튼, 편하게 앉으세요. 최종 면담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니까요.”
“형식적인 절차…. 에. 그, 그럼.”
조용히 말을 따라 한 하승우가 돌연 멍한 표정을 짓는다. 눈까지 두어 번 깜빡이면서. 혹시 현대에서 연기자가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훌륭한 표현력이다. 아마 제 3의 눈이 없었다면 나조차도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근래 여기저기서 들어보니 사용자 하승우에 관한 말이 아주 좋습니다. 모두 하나같이 칭찬을 하더라고요.”
“하하, 하하. 쑥스럽습니다. 비행기 타는 건 익숙지가 않아서.”
“그래요. 그럼 정식 승인 전에 질문 좀 해도 될까요? 많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하승우는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는 책상에 얹은 오른손을 살금살금 오른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사용자 하승우가 머셔너리 클랜으로 들어온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예?”
이건 약간 예상외의 질문이었을까. 찰나의 순간, 하승우의 낯에 오묘한 기색이 스쳤다. 삽시간에 사라지기는 했으나 나는 확실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그거야 머셔너리 클랜이 최고이니까요. 사용자라면 누구나 가입하고 싶어하는 클랜이 아니겠습니까?”
“음. 조금 더 자세히요.”
“어…. 실은 제 동생이 머셔너리 클랜에 무척 가입하고.”
“그건 이미 들었습니다. 저는 누구나 생각하는 게 아닌, 여동생의 입장이 아닌, 사용자 하승우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일부러 말을 끊어버리자 하승우의 표정이 약간 가라앉는다.
여기서 나는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클랜이 마음에 든다. 물론 크게 보면 사용자 하승우의 말도 틀리지는 않아요. 그러나 제가 듣고 싶은 말은 조금 더 상세한 부분입니다.”
“상세한 부분이요?”
“예. 그러니까 목적을 듣고 싶다는 말이죠. 가령 예를 들어 보호받으려는 도피 목적. 무언가 정보를 빼내려는 잠입 목적. 아니면 이용해 먹으려는 모종의 목적. …등등이라고나 할까요?”
“목적이라면….”
하승우는 천연덕스러웠다. 아직도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수룩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목울대는 아주 미약한 고저를 그리는 중이었다.
이윽고 느릿하게 마력을 끌어올리는 동시.
“그래서 듣고 싶은 겁니다. 머셔너리 클랜에 가입하려는 목적을.”
책상 한 쪽에 놓아둔 무검의 칼자루에 스리슬쩍 손을 얹은 후.
“그것도….”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부랑자의 총 대장이나 되는 사용자가 말이지.”
============================ 작품 후기 ============================
예고 시간보다 조금 늦었네요. 퇴고에 예상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집필 방식에 약간의 변화를 줬는데 괜찮은 것 같으면서도 익숙지는 않네요. 하하.
아무튼, 오늘도 떡밥 하나 던졌습니다. 이번 떡밥은 단시간 내에 회수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메모라이즈는 처음부터 결말을 구성하고 들어간 작품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결말로 가는 하이라이트 부분이라고나 할까요. 그 부분에 관한 복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예전 선율의 타로 카드 점을 떠올리시면 조금은 감을 잡으실 수 있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