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47
00746 역사(歷史). =========================================================================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걸까. 실처럼 가늘어진 마녀의 눈이 아래를 응시한다. 중앙에 둥그렇게 모여 있는 15명. 그 중 4명 주변으로 마력이 파도치듯이 넘쳐 흐르고 있다. 심상찮은 마력의 흐름을 느낀 순간, 마녀는 곧장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먹어 치워! 플로라(Flora)!”
식물인 만큼 화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지면에서 일어난 식물 군단은 마녀의 지시에 충분히 호응하고 있었다.
스르르륵.
수풀을 스치는 소리에 이어, 사방의 식물들이 촉수를 꿈틀거리며 거리를 좁혀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암석으로 변한 영역을 침범한 순간, 가장 선두에 있던 식물들이 있는 힘껏 고개를 쳐들며 그대로 덮쳐 내려왔다. 스스로 세상을 무너뜨린 후, 시종일관 찌푸려져 있던 마녀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꽃이 피었다. 마녀는 자신이 소환한 식물 군단이, 이제 곧 저 인간 놈들을 내리눌러 집어삼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지스 시스템(Aegis System)!”
그 순간 백한결이 양손을 활짝 펼쳤다. 좌우로 뻗은 두 손에서 눈부신 빛무리가 터지듯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아래를 주시하던 마녀의 눈이 들썩였다.
“주문 지정, 되비침(Glance Back). 사용 보석, 애주라이트 화이트(Azurite White). 보석 증폭(Jewel Amplification)!”
그때 영창을 마친 김한별이 손에 쥔 보석을 하늘로 흩뿌리며 주문을 외친다. 점점이 반짝이는 가루들이 흘러나오는 빛무리에 스며들자, 빛은 삽시간에 정육각형의 필드를 겹겹이 형성하며 동료들을 감쌌다.
“저까짓 방어막…!”
‘따위.’ 라고 이으려던 마녀가 급히 말을 삼켰다. 사방을 둘러싸 공격하던 식물이, 돌연 퍽 소리와 함께 일거에 터져나간 것이다. 뒤에서 들어온 식물이 바로 자리를 메우기는 했으나, 방어막을 공격하는 족족 줄기가 폭발하며 힘없이 쓰러진다. 그러한 광경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마치 분쇄기에 잘게 잘리는 종잇조각을 보는 듯했다.
“반사 능력…?”
마녀는 뜻 모를 초조감에 입을 짓씹었다. 이윽고 여전히 아래를 향하는 손의 주변으로, 샛노란 전류를 튀기는 뇌전의 창이 서너 개 떠오른다. 그 순간이었다.
“거스트 필드(Gust Field)!”
하승우가 또 한 번 양손을 지상에 내리꽂자, 방어막을 중심으로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불어온 돌풍은 순식간에 멀리멀리 퍼져나가, 지면 전체를 아우른다. 펄럭이는 로브를 붙잡으며 마녀는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윈드 커터라면 그나마 이해라도 했을 텐데, 그냥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답은, 그 다음에 있었다.
“프로미넌스(Prominence)!”
사라의 육성에 이어 거대한 불길이 하늘로 솟구쳤다. 치솟은 불길은 태양처럼 둥글게 모이더니 짙은 적색을 띤 홍염을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사라의 특기는 화(火) 계열 마법과 특수 능력 ‘강화 메모라이즈’의 조화. 마법 연쇄를 통해 폭발력을 비약적으로 증강시킬 수 있다.
말인즉.
“익스플로전(Explosion)!”
쾅!
거센 폭음이 허공을 왕왕 울렸다. 그 소리에 잠깐 눈을 찌푸렸던 마녀가 반사적으로 아래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대로 낯빛이 딱딱히 굳어졌다. 폭발의 여파로 찢겨진 수십 아니 수백 개의 타오르는 조각이, 흡사 파이어 레인처럼 사방팔방으로 뿌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바람이 흐르는 지면에.
후르르르르르르르!
돌풍이 낙하하는 불의 조각을 힘차게 빨아들인 순간, 또 한 번의 거대한 굉음이 도처를 떠르르 울린다. 이내 바람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불길은 전 방향으로 길게 늘어붙기 시작하더니,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지상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마치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식물들 사이를 이곳저곳 옮겨 붙고 있다. 불의 파도에 휩쓸린 식물들은 미친 듯이 꿈틀거리며 아우성치다가, 종래에는 한 줌의 재로 변해 바스러진다. 마녀는 눈을 부릅떴다.
“하찮은 짓을…! 정말로 해보자는 거야?”
이를 악물며 불타오르는 대지를 내려다본다. 발그스름한 불길이 스며든 보랏빛 눈동자가 한층 짙어졌다. 아래를 향하던 손이 이번에는 사방을 휘저었다.
“물을 뿌려라! 플로라!”
식물 군단은 마녀의 지시를 즉시 이행했다. 넝쿨이 한 차례 거세게 요동치더니 줄기 전체에서 물을 뿌리기 시작한다. 불의 돌풍은 여전히 거셌으나,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개체가 한꺼번에 분사한 만큼, 불길은 곧 서서히 잦아들 기미를 보였다.
이윽고 약간의 시간이 흘러 불은 완전히 진화됐다. 남은 것은 무참히 타버린 식물의 잔해와 시꺼멓게 그을린 흙뿐.
물론 방금 연쇄 공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아직 많은 수의 식물이 남아 있기는 했다. 살아남은 식물은 꿈틀꿈틀 전진을 재개해, 물에 젖어 축축한 지면을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그러나 마녀는 과연 알고 있을까. 연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 차례 폭풍이 불어 닥친 후, 정적이 흐르는 공간.
“월령(月齡), 12월의 그믐달.”
문득, 정하연의 청아한 음성이 울렸다. 이어서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든 나무 지팡이가 가볍게 땅을 친다.
“프로즌 필드(Frozen Field)!”
우직, 우지지직!
쩌저저저저저저적!
둥글게, 또 둥글게.
지면이 딱딱히 얼어붙는다. 굳건히 서 있는 방어막을 중심으로, 얼음이 원반 형태로 번지듯이 넓적하게 벌어졌다. 흥건히 젖은 대지는 순식간에 엉겨 붙어 뭉쳤으며, 종래에는 딱딱한 고체로 응고화됐다. 물을 묻히고 있던 식물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을 맞이했다.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해짐은 물론, 지면에서 줄기를 타고 올라온 얼음에 의해 순식간에 얼어붙은 것이다.
그렇게 얼음으로 뒤덮인 세상을 확인한 순간, 공중에 떠오른 마녀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하…. 하하…. 감히…. 잘도….”
멍하니 주변을 둘러본 마녀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법을 걷어낼 때마다, 마치 자신이 어떻게 할지 알고 있다는 듯 새로운 대응이 나오는데, 여간 짜증 나지 않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현 상황이 믿어지지가 않기도 했다. 단순히 촉수 공격만 할 수 있는 식물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재배하느냐에 따라, 침으로 마비시키거나 가루로 환각을 보게 하는 등 하나하나가 병기 수준의 살상력을 갖추고 있다. 그런 만큼 정말 끔찍이도 아끼며 키워왔다. 그런데 몇 달을 거쳐 준비해온 식물 군단이, 이렇게나 허무하게….
“인정 못 해!”
마녀는 발악하듯이 외쳤다.
마력을 전문으로 다루는 존재는 총 2 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세상에 어긋나지 않는, 일정한 법칙을 따라 마력을 구사하는 마법사(魔法師).
설령 법칙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강력한 마도를 추구하는 마도사(魔度師).
그러나 마녀(魔女)는 이 두 종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존재다. 굳이 법칙을 따르려고 하지 않고, 그렇다고 자신만의 마도를 추구하는 입장도 아니다. 오롯이 마법의 근원을 파헤치고 탐구하는, 마법 그 자체의 존재. 마법사를 멍청이라 비웃고, 마도사를 한심하게 바라본다. 실제로 현재 아스트랄 차원을 관장하는 마녀의 실력은, 도시와 합일한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보다 한 수 더 앞서는 수준.
그렇기에,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 못 해!”
눈동자가 전의에 불타오른다. 이윽고 공중에 떠 있던 마녀가 서서히 지상으로 안착했다. 맨발이 지상에 닿자 시릴 듯한 한기가 발바닥을 투과한다.
“그래…. 누가 이기는지 한 번 해보자고.”
마녀는 몸을 떨면서도 빗자루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게나 마법 전투를 원한다면, 응해주겠어.”
으르렁거리듯 뱉은 마녀는 곧바로 주문을 외웠다.
“디프로스트(defrost)!”
부스스, 딱딱히 굳은 촉수 식물이 힘겹게 고개를 들더니 줄기에 붙은 얼음이 서서히 녹아 내린다.
“앱소브(absorb)! 다시 일어나라, 플로라!”
연달아 주문이 터져 나왔다. 해동된 얼음은 액체로 변해 흘렀고, 식물은 흡사 걸신들린 것처럼 흐르는 물을 빨아들였다. 잠깐 멈췄던 성장이 도로 재개된다. 이내 전보다 더 크게, 서서히 몸집을 불리는 식물들을 보며 마녀는 지그시 앞을 바라봤다. 그 순간이었다.
퍽.
찰나의 순간, 어디선가 날라온 진득한 액체가 뽀얀 뺨을 적셨다. 한순간 마녀의 표정이 망연해졌다. 1초 후, 마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내리자, 손바닥에 묻은 초록빛 체액이 보였다.
마녀는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내 본능에 따라 눈을 돌리니, 바로 옆 줄기 채로 터져 쓰러진 거대한 촉수 식물이 보인다.
쓰러진 건 이 하나만이 아니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어느 정도 성장을 마친 식물이 갑작스럽게 퍽퍽 터지고 있다. 절대로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들어오자, 마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입은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는 중이었다.
“이, 이게…. 어, 어떻게….”
잠시 후.
비로소 방어막이 해제되며 15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녀의 시선은 절로 정면을 향했다. 그곳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을 한 여인이 오연히 서 있었다. 제갈 해솔이었다.
그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마녀의 몸이 흠칫 움츠러들었다.
“너….”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에 제갈 해솔이 빙긋 웃었다.
“아. 기껏 모두가 노력했는데, 그대로 놔두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쪽이 구사하는 마법을 분석하고, 똑같이 따라 했죠. 그러니까~. 성분 변화라고나 할까?”
제갈 해솔의 말이 이어지자, 마녀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마, 말도 안 돼! 따라 했다고? 이 소산 마법을?”
“응? 소산 마법?”
“마법의 근원에서도 가장 나락에 있는…! 나도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을 얻고, 말년에서야 겨우 얻은 경지인데…!”
“에~. 뭐 확실히 쉽지는 않더라고요. 좀 힘들기는 했어요. 아무튼, 좋은 마법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어깨를 으쓱인 제갈 해솔은 한숨을 흘리며 김수현에게 몸을 기댔다. 마녀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떠보았으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야심 차게 소환한 식물 군단 플로라는, 하나도 남김없이 잔해만 남은 상태였다.
잠시 후.
마녀의 눈동자에서, 마침내 끊임없이 이어지던 투지의 불길이 꺼졌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을 맞이해, 정신이 텅 비어버린 것이다. 결국 마녀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김수현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천천히 거리를 좁히면서 설레설레 머리를 젓는다.
“정말이지…. 이러면 약간이나마 긴장한 게 우습게 느껴지잖아.”
“오, 오지 마!”
텅 빈 마녀의 눈동자에 공포가 찾아 들었다. 마치 아이처럼 울먹거리며 발을 구른다. 엉덩이를 질질 끌어 물러나며 어떻게든 빗자루를 들었지만, 기껏 발사한 마법은 김수현에게 닿지도 못하고 소멸해버렸다.
“확실히 의도는 좋았다고 생각해. 마녀와 악마의 조합. 그런데….”
“괴, 괴물! 오지 마!”
“그렇게나 서로 꿍짝이 안 맞아서야. 그럼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지. 안 그래? 플루톤?”
“프, 플루톤? 도와줘! 플루톤! 도와달라고! 플루토오오온!”
아까 계속 도망을 종용하던 플루톤을 무시한 건 생각도 안 나는지, 마녀는 울부짖듯이 플루톤을 불렀다. 그러나 내면의 울림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자, 그럼….”
“오지 마아아아!”
그 순간 김수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이죽거리는 얼굴로 차분히 손을 뻗었다.
“우선 받을 거는 받고.”
그때였다.
“아? 아!”
후방으로 쏠려 있던 마녀의 몸이 돌연히 앞으로 크게 쏠렸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으나, 손에 쥔 것을 놓음으로써 간신히 끌려가지는 않았다. 얼른 고개를 든 마녀는 빙그르르 날아간 자신의 빗자루가 김수현의 손에 잡히는 걸 볼 수 있었다. 허공섭물의 묘리로 빗자루를 강제로 빼앗은 것이다.
“그, 그건! 돌려줘!”
“싫어.”
가볍게 거절한 김수현이 또다시 손을 뻗자, 이번에는 머리에 쓰인 모자가 벗겨졌다. 마녀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짚었으나 어느새 모자는 휙 날아가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김수현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더 손을 놀리니, 약간 끼는 것 같던 로브마저도 강제로 벗겨지고 말았다.
“꺄아아악!”
강제로 머리를 통과해 허공으로 솟구친 로브가, 결국 김수현의 손에 안착했다. 완전한 무장 해제. 그 후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름다운 순백의 나신을 드러낸 마녀는, 가슴과 성기를 가리며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수치스러운 걸까. 진한 보랏빛을 띠던 눈동자가 이지를 상실한 듯 망연하게 변하고,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며 이마에는 띵한 현기증이 일었다. …아니. 이제는 그냥 어떻게 돼도 좋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그렇게 마녀는 전투 의지를 완전하게 상실하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힘내라! 마(법) (소)녀!
마녀 : 그래서, 정말로 이대로 끝나는 건 아니지?
로유진 : ㅇㅇ. 걱정 ㄴㄴ.
마녀 : 정말이지?
로유진 : 그럼. 한소영도 남고 이유정도 남았는데.
마녀 : 후유, 다행…. 뭐?
로유진 : ㅌ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