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51
00750 핏물 속에서 피어나는 꽃(2). =========================================================================
“어….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느냐고요! 누가 말 좀 해봐요! 네?”
불쑥 치솟은 뜻 모를 두려움에 선율이 소리를 질렀으나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임의로 만들어진 마력의 공간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아스트랄 차원 아래 하나의 세상이다. 김수현을 포함한 15명이 제 아무리 대단한 사용자라도, 결국에는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 세상이 멸망하는 앞에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설령 방법이 있을지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멸망은 꾸준하고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근원이 발사한 빛무리는 마치 거미줄을 치듯이 사방팔방 활보하고 있었고, 빛의 선이 그어지는 곳마다 허공이 갈라지며 균열이 일어난다. 그리고 종래에는 공간이 조각조각 분해돼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이제는 숫제 하늘도, 허공도, 서 있는 지면조차도 떨어 울릴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균열의 범위는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지고, 반대로 온전한 공간은 점차 좁아진다. 어디서 울리는지도 모를 웅웅거리는 진동음과 사방을 가득히 메워오는 어마어마한 압박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이 현상의 종착역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모두가 암암리에 느끼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물리던 김수현은, 문득 누군가와 등을 맞부딪친 것을 깨닫고는 입을 깨물었다. ‘당했다.’ 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답이라고는 털끝만치도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서 갑갑한 건 누구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의 모든 공간을 무너뜨린 빛의 선과 균열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공간으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위기감이 치솟은 걸까. 서로 등을 맞댄 상황에서 누군가 발악하듯이 주문을 외쳤다. 이윽고 정하연이 외운 황금빛 방어막이 빠르게 주변을 감쌌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법사와 사제들도 서둘러 방어 주문을 펼쳤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주 잠깐 막아내는가 싶었으나, 어느 것 하나 긴 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도 겹겹이 쳐진 방어막은 우그러지듯이 뭉개졌고, 순식간에 쩍쩍 갈라지며 사그라졌다.
“이지스 시스템(Aegis System), 디펜시브 매트릭스(Defensive Matrix)!”
그러한 찰나 백한결이 황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적 같은 힘이 발휘됐는지,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내던 두 보호막을 한꺼번에 생성한다. 이윽고 해일처럼 치고 들어온 빛의 선은 반투명한 장막에 아슬아슬하게 부딪쳐 꺾여 날아가고, 김한별과 선율이 곧바로 주문을 외워 각각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확실히 방어 전문 사용자는 무언가 다른 걸까. 두 여인이 보석과 카드를 통해 마력을 증강하자 불안스럽게 흔들리던 방어막이 눈에 띄게 안정된다. 그렇게 겨우 막아내기는 했지만, 아주 잠깐의 여유에 불과했다. 김한별과 선율은 물론, 백한결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필사적으로 방어막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군가 덜덜 떠는 음성으로 말을 더듬었다. 어지간한 신재룡도 작금의 현상에 할 말을 잃었는지, 공포가 서린 낯빛을 보이고 있었다. 비단 신재룡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비슷한 반응이었다. 하기야 세상이 멸망하는데, 그리고 직접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과연 누가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흡사 세기말 직전의 상황이 이랬을까?
누구도 모를 것이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한 세상이 파멸하는 과정은, 차마 말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고 참혹하기까지 했다.
“유, 유정아!”
그때 임한나가 갑작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유정이가 보이지 않아요! 들어오지 못했나 봐요!”
곧바로 이어진 비명과도 같은 음성에 모두가 아차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랬다. 보호막 안에 있는 인원은 15명이 아니라 14명이었고, 이유정이 보이지 않는다. 애초 어느 정도 거리가 있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매우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챙길 생각을 못 한 것이다. 허나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모두가 이를 악문 채 발만 동동 구를 뿐.
“혀, 형님…! 제…. 바…. 알…!”
그런 와중, 백한결이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애타는 음성으로 김수현을 불렀다. 전신에서 비 오듯이 땀을 쏟아내고 있다. 그야말로 깨지기 일보 직전인, 정말로 간신히 버티는 모습. 김한별과 선율이 사력을 다해 보호막을 강화하고 있었으나,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다.
우지지직!
아니. 한계에 다다른 게 아니라,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한 번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자 보호막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백한결이 허물어지듯이 쓰러지고, 빛의 선과 균열이 와르르 덮쳐오기 시작하자, 대부분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직은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우웅!
그때, 김수현의 품에서 붉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게헨나의 보호 요새가 전개된 것이다.
*
약간 시간을 돌려, 때는 약 5분 전.
넋을 놓고 있던 건 아니었다. 이상 현상,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근원의 최종 계획 ‘멸망의 거울’이 발생한 직후, 이유정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허나 그 순간, 공교롭게도 강렬한 통증이 또 한 번 복부를 엄습했고, 저도 모르게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현재.
땡그랑!
넘어진 여파로 은빛 머리띠가 벗겨져 떨어지고,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주변 허공에는 쉴 틈 없이 빛이 지그재그를 그어대고, 지상은 조각나는 것도 모자라 가루로 분해돼 사라진다. 심장이 떨릴 정도의 격렬한 공명 속에서, 이유정은 몸을 일으킬 생각도 못 한 채 웅크리듯이 나동그라졌다.
‘죽었다.’ 고 직감하는 동시에 오만 생각과 후회가 뇌리를 스쳤다. 괜히 따라왔다는 생각보다는, 한심함을 넘어 끝없는 자기 혐오를 느끼며 이유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아무리 기다려도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욱신거리는 복부의 통증을 제외하면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러자 이상하다 여긴 이유정이 스리슬쩍 고개를 들었다. 살그머니 눈을 떠 시선을 내리니, 돌연 황금빛 기운이 어른거리는 자신의 몸이 보인다. 크게 놀라 주변을 둘러본 이유정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하늘은 더 이상 보이지도 않고, 지상은 거의 가루로 변해 흡사 구덩이처럼 시커멓게만 보일 뿐이다. 그냥 아예 성한 공간을 찾기가 어려웠다. 한데 이런 와중에도 이유정의 주변은 그나마 제대로 된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기껏해야 2 미터 남짓한 공간이었지만, 이유정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멸망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된 거지?’
그렇게 매우 현실적인 의문이 솟은 찰나,
– 이런 이런…. 결국 이렇게 된 건가.
문득 낯선 음성이 이유정의 귓전을 울렸다. 약간 거치면서도 중후한 목소리는 흡사 바로 옆에서 말한 것처럼 또렷했다. 바로 시선을 돌린 이유정은 세 번째로 놀라며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왜냐면 자신보다 머리 두 개, 아니 적어도 네 개는 커 보이는 거한의 사내가 팔짱을 낀 채 혀를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온몸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황금빛 기운을 두른 채로.
– 폐 태자 녀석도 할 말은 없지만, 필리아도 만만치가 않군. 설마 이 정도로…. 응?
이유정의 시선을 느낀 걸까. 머리를 절레절레 젓던 거한이 흘끗 시선을 내렸다.
– 뭘 봐.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 평소의 이유정이라면 발끈해서 받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계속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봤을 때는 웬 사람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엄청난 체구와 탄탄한 근육은 그렇다 치더라도, 양 팔뚝 부분에 짐승의 털처럼 보이는 것이 수북하게 덮여 있다. 거기다 얼굴 선이나 목덜미에는 흡사 사자의 갈기 같은 털이 길게 자라나 있고, 심지어 엉덩이 뒤로 꼬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꼭 사자와 인간을 절반씩 섞어놓은 형상이랄까?
– 뭘 그렇게 보느냐고. 아니 설마, 수인은 처음 보는 거냐? 반(半) 묘?
하찮게 여기는 듯한 말투에 이유정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누, 누구….”
– 누구냐고? 지금 내 무덤에 들어온 주제에 누구냐고 묻는 건가?
“아, 아니. 어떻게….”
– 어떻게? 아니 그럼 이 정도로 난리를 쳐대는데, 내가 안 깨어나고 배겨? …아. 뭐, 네 존재가 나를 자극한 것도 없잖아 있지만.
아마 역사를 알고 있는 김수현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정은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거한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푹 한숨을 쉬었다.
– 어이, 잠깐 가만히 있어봐라. 나도 네가 누군지 궁금하거든.
그렇게 말한 거한은 성큼 다가와 이유정의 옷을 젖혔고, 미끈한 복부에 코를 들이밀어 킁킁거렸다. 기함한 이유정이 손사래를 치며 걸음을 물렸으나, 거한은 이미 허리를 펴고 신기하다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 헤, 이건 베가스 녀석의 낙인이잖아. 그리고 그 달빛 꼬맹이…. 누구였지? 아, 오브아나 알카트라츠의 섬백까지…. 그런데 너, 낭(狼) 족이냐 아니면 달 묘(猫) 족이냐?
“…….”
– …어이?
“…….”
나름 기대를 품은 듯한 말투였으나, 이유정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 있기만 했다. 평소 자신의 사용자 정보나 무기에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윽고 지그시 응시하던 거한은 또 한 번 한숨을 흘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 어휴, 말년에 겨우 후인을 만났나 싶었는데, 웬 수인 같지도 않은 계집이…. 이건 반인반수도 아니잖아. 나도 참 운 없는 놈이군.
자꾸만 툴툴대며 무시하듯이 말하자 비로소 이유정의 낯에 발끈하는 기색이 서렸다. 영문은 모르겠으나 갑자기 화가 나는 기분이었다.
“아까부터 자꾸 무슨 헛소리를…!”
벌컥 화를 냈으나, 이유정은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거한이 솥뚜껑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으으으읍!”
– 됐고, 너 저거는 어떻게 할 거냐?
“으읍?”
– 저거 말이다, 저거. 저 멍청한 마녀 있잖아.
거한이 저 멀리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유정은 그제야 아까의 의문을 도로 떠올릴 수 있었다. 확실히 거한과 이유정이 서 있는 공간은 아직까지는 온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 미리 말해두지만, 나도 계속해서 보호해줄 수는 없다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거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재촉하듯이 말했다.
“어, 어떻게 할 거냐니?”
– 아니 그럼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을 거야? 아, 방법을 몰라서 그래? 그건 간단해. 저거 저거 보이지?
그 순간 이유정의 시야가 강제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마치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허공에 떠 있는 마녀의 모습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다. 그런 마녀의 가슴 앞으로 가운데가 잘록한 호리병 같은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처음 둥근 방에서 조우했을 때 마녀가 손에 쥐고 있던 모래시계였다. 이윽고 놀랄 새도 없이, 시야는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 저걸 파괴하면 돼.
마치 어린 아이 손목을 비틀면 된다는 듯, 거한은 태연하게 말했다.
– 참고로 말하자면, 모래가 모조리 떨어지는 순간 이 세상도 끝나는 거야.
여하튼 이번에는 거한이 말하는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오빠나 다른 강력한 사용자들도 맥을 못 추고 있을 텐데, 자신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잖은가. 이유정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뭐, 뭘….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데…. 나, 나는 못해.”
억지로 눈을 돌리며 살그머니 말을 흐리자, 거한의 낯이 약간 찌푸려졌다.
– 뭐야. 그럼 설마 이대로 도망치겠다는 거야?
그 순간 이유정은 퍼뜩 어깨를 떨었다.
‘…그러면 너는, 결국 부담이 되기 싫어서 도망치는 건가?’
돌연히 허준영의 음성이 귓전을 스치는 듯했다.
– 나 참. 기껏 만난 동족이 고작 이런 계집이었다니…. 베가스나 오브아나가 땅을 치고 울고 있겠군. 이거 괜한 기대를 했어.
거한은 설마 이럴 줄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마치 시간 낭비를 했다는 말투에 이유정은 억울함을 느꼈다. 갑자기 튀어나온 주제에 어떻게 할 거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는 건데!”
시종일관 힘없던 음성이 처음으로 뾰족하게 높아졌다.
–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거한은 흐음, 입맛을 다시고는 팔짱을 꼈다.
– 너는 네 친구를, 네 동료를 구하고 싶지 않은 거냐?
“…구하고 싶어.”
– 그럼 왜?
“나는….”
이유정은 살짝 숨을 들이켜고,
“약하니까.”
솔직하게 말했다.
“해봤자일 테니까.”
한 번 더 덧붙이자 거한의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 약하고, 해봤자라….
–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확실히 너는 약해. 수인, 특히 달의 일족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야.
뜻밖에도 거한은 순순히 인정했다. 이유정은 나는 수인이 아니라고 외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부정해봐야 자신만 꼴사나울 테니까.
–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
그때 갑자기 말을 반전한 거한이 가까이 다가섰다.
– 내가 네 진정한 힘을 끌어내 주마.
이유정의 낯에 떠름한 빛이 스쳤다.
“끌어내준다고? 네가 누군데?”
– 나? 하이고, 정말로 모르는 거냐? 야만 부족을 이끌고 모든 수인을 다스렸던 나를?
거한이 갑갑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자, 이유정의 뇌리로 제갈 해솔이 기록을 소리 내 읽던 기억이 스쳤다. 아주 단편적은 기억일 뿐이나 이름 정도는 확실하게 떠올랐다.
“맞아. 확실히 들었어. 야만 왕…. 아니 수인의 왕?”
– 그래.
드디어 정체가 밝혀졌다. 묵직하게 머리를 끄덕인 거한, 아니 야만 왕은 갑자기 손을 들어 팔뚝을 할퀸 후, 왼팔을 불쑥 내밀었다. 이유정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내밀어진 왼팔에는 피는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황금의 기운이 마치 역류하듯이 꿀렁꿀렁 흘러나오고 있었다.
– 마셔라.
명령하는 어조에 이유정이 의아한 눈동자를 들었다.
“마시…. 라고?”
– 너는 지금 네 안에 잠재된 힘을 반의반도 끌어내지 못하고 있어. 왜 그런지 아나?
“…몰라.”
– 그건 네가 완전한 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한은 단언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이유정은 계속 흘러나오는 황금의 기운을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 그래. 이 기운을 받아들인 순간, 네 안에 잠재된 기운이 반응해 각성이 시작될 거다. 말인즉 완전한 수인으로 재탄생 하는 거야.
“수인으로….”
– 무릇 수인이란, 인간처럼 이성적이지 못해. 오히려 본능에 이끌리고 감정에 충실하지. 우리는 원래 그래. 싸우고, 전투하고, 침략하고, 짓밟고, 약탈하고, 살육에 환호한다. 그게 바로 수인이라는 종족이다.
“…….”
– 흐흐, 아직도 망설이는 것 같은데….
돌연 야만 왕의 음성이 이상하게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팔을 더욱 들이미는 동시, 이유정의 복부에 지금까지와는 색다른 고통이 엄습했다.
“윽…?”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인 이유정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거한의 팔을 보며 눈을 크게 치떴다. 갑자기 향기로운 냄새가 콧속으로 물씬 풍겨오고, 입안에 군침이 마구 돌기 시작했다. 이마에 띵한 현기증이 느껴지고 시야가 흐물흐물하게 변한다. 왜 이러는지는 이유정도 모른다. 그저 불현듯 찾아온 변화에 몸을 맡길 뿐.
– 약한 게 싫잖아? 강해지고 싶잖아?
야만 왕의 음성은 확실하게 변했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부드러우면서 달콤하기 그지없다.
“나는….”
–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너는 확실하게 강해질 수 있다.
간신히 입을 열자 야만 왕의 은근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것은 절대로, 진정으로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나는…!”
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토록 원하고 갈구하던 힘이 눈앞에 있다. 그래, 정말로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 뜻 모를 기대감과 설렘으로 호흡이 멈추고, 복부에 찍힌 낙인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불타오른다. 침은 자꾸만 꼴깍거리며 넘어간다. 혈관에 흐르는 핏물이 두근두근 요동치며 질주하는 게, 흡사 얼른 저 기운을 받아들이라고 날뛰는 듯하다.
– 마셔라! 그리고 끓어오르는 힘에 미쳐봐라!
이어지는 외침에, 이유정은 있는 힘껏 눈을 뜨며 앞을 노려봤다.
‘그래, 어차피 이판사판이잖아…?’
설령 이게 함정이라도 좋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정은 결국 참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빼었다. 이어서 서서히 입술이 벌어지며 분홍빛 혀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과연 무슨 탓이었을까. 이유정을 바라보는 야만 왕의 표정을 썩 좋지 않았다. 씁쓸해하는 것 같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언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잠시 후, 마치 강아지처럼 혀를 내민 이유정이 살짝 고개를 숙인 찰나였다.
============================ 작품 후기 ============================
아마 모든 것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도…?(의미심장.)
후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