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86
00785 황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다. =========================================================================
“세이크리드 해안.”
무뚝뚝한 음성이 들렸다. 근원이 공허한 눈으로 바다를 보고 있었다.
살금살금 옆으로 다가가자 힐끗 나를 쳐다본다. 근원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를 곁눈질하더니 눈을 한 번 깜박인 후 도로 바다를 응시했다.
“아득한 과거…. 이 일대는 빙하가 아닌 해안가였습니다.”
더 설명해달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기계처럼 말을 잇는다.
“해안가였다고요?”
제갈 해솔이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근원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 왕국 멤논. 이달칸 부족의 정복 전쟁으로 멸망하기는 했지만, 한때 이 해안가를 중심으로 번성한 부유한 해상 왕국이었습니다.”
“멤논? 이달칸?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게 이 해안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예요?”
“무덤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제갈 해솔이 의아히 반문했다.
“이달칸은 멤논을 정복한 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을 처형해 이 바다에 수장했습니다.”
시이이이. 돌연히 차디찬 바람이 불었다. 바람치고는 이상한 소리였다. 흡사 원통한 비명처럼 들렸다고 해야 하나. 제갈 해솔은 얼빠진 얼굴로 근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 존재가 이 일화를 기억하는 이유는.”
근원은 비로소 시선을 거두고 우리를 돌아봤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즈음. 바다가 급격히 차가워지는 동시, 이 세이크리드 해안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가 서서히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라는 게 이 해안가가 설원으로…. 이 말이에요?”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겠습니다만, 이상 징후일 뿐입니다. 가장 가능성 높은 인과 관계를 언급했을 뿐, 정확한 원인까지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아, 괜히 들었어. 갑자기 무서워지잖아.”
이유정은 어깨를 움츠리더니 하승윤을 와락 껴안았다.(하승윤은 졸도할 것만 같은 표정으로 행복해했다.)
이 바다에 얽힌 일화는 나도 알지 못한 터라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빙하의 설원은 1회 차 때도 아틀란타의 관심사로 부상한 적이 있다. 유적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관심 받기는 충분하지만, 그것 말고도 바다를 탐색하면서 망령을 봤다는 사용자들이 속속히 등장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연기 속으로 사라져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유령선을 봤다는 등 이상한 소문이 여럿 돌았는데, 명확하게 확인된 사실은 하나도 없다. 실제로 바다를 탐험한 무수한 사용자 중 거의 8할에 가까운 인원이 무사히 생환했으니까. 허나 바꾸어 말하면 2할 정도는 저 바다에서 사라졌다는 소리다. 그것도 소리소문 없이.
어쨌든 실지로 망령이 존재한다손 쳐도, 우리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저 세이크리드라는 해안 어딘가에 있는 신녀곡을 찾는 것이니까. 물론 위치를 기억하는 만큼, 괜한데 신경 쓰기보다는 신속히 통과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리라.
그럼 이제 어떻게 저 바다를 건너느냐가 화두인데.
짝짝.
두어 번 손뼉 치자 이목이 쏠렸다. 모두 근원의 말을 들었는지 썩 좋은 낯빛은 아니었다.
“얼굴들이 왜 그럽니까? 망령 만나는 게 처음도 아니고. 폐허의 연구소, 얼어붙은 숲, 용이 잠든 산맥…. 한 번씩은 겪어봤잖아요?”
그러자 누군가 “나는 처음인데.” 라고 종알거렸다. 제갈 해솔의 음성이다. 흘깃 쳐다보니 휙 고개 돌려 아련한 눈으로 바다를 쳐다본다. 반응 속도가 좋군.
“그보다는 현재 당면한 문제를 하나 해결해야 해요.”
“문제요?”
누군가의 반문에 나는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 이제부터 저 바다를 건널 길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
동료들은 어리둥절한 낯을 보였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당연히 수송으로 이동할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길을 만든다니. 아마 사정을 모르는 처지였다면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송 어빌리티는 어떻게 해서든 아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동원해 설득했다. 이러니저러니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 결론은 간단했다. 신녀곡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거니와, 수송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놔야 한다. 특히 수송 어빌리티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들먹인 점이 주효했다.
목소리에 너무 힘을 준 탓일까. 긴 설득을 마치니 제갈 해솔이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아니. 이상해서요.”
제갈 해솔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선 무슨 말인지 이해는 했어요. 나름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기는 한데….”
스리슬쩍 말끝을 흐리더니 입가에 묘한 미소가 자리 잡는다. 갑자기 거북해지는 기분이다.
“만날 셔틀 취급하시던 분이, 갑자기 그렇게 말씀해주니 조금 이상하잖아요?”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가볍게 말했으나 그 말이 품은 저의는 결코 가볍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진한 호기심을 품은 눈초리가 가슴을 쿡 찌르고 들어오는 듯했다. 어쩌면 농담이 아니라, 일부러 농담조로 말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무튼, 그럼 어떻게 이 바다를 탐험하겠다는 소리지?”
다행히 허준영이 적기에 화제를 돌려줬다. 나는 제갈 해솔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바다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쭈뼛거리는 했지만, 곧 동료들이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약 5분 정도 걷자 바다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바다는 그냥 넓다고 표현하기는 부족할 정도로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절정이었다. 나는 집게손가락으로 바다의 한 가운데를 가리켰다.
“모두 빙하가 눈에 보이실 겁니다.”
광활한 크기에 못지 않게 바다에는 빙하도 굉장히 많이 떠 있다. 개중에는 거대한 빙산이 이어져 산맥을 이루는 것도 심심찮게 보이니, 거진 빙하의 숲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우리는 이 지점부터 가장 가까운 빙하까지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 겁니다.”
발로 물기 젖은 눈밭을 툭툭 건드린 후, 나는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바로 바다를 얼려서 말이지요.”
당연히 바다 전체를 얼리자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건 애초 불가능한 일이니까.
허나,
“물론 전부가 아닌, 우리가 걸을 수 있는 정도로만 만들면 됩니다. 요컨대….”
“빙 계열 마법을 이용해 얼음 길을 만들라는 뜻이군요?”
제갈 해솔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이상하게도 제갈 해솔은 그렇지 않다. 상정 외의 존재라고 해야 하나. 사실대로 말하면 약간 불안한 마음이 생긴 것 같다.
차소림이 물었다.
“바닷물을 얼려서 길을 만든다니….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하기는 해요. 저번에 하연이 언니가 비슷한 마법을 구사한 적이 있으니까요.”
김한별의 말에 서너 명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마 ‘야만 왕의 무덤’ 원정을 떠올린 것이리라. 그 당시 정하연은 사방을 에워싼 식물 군단을 한 번의 주문으로 모조리 얼려버리지 않았는가.
“하지만….”
무언가 말하려던 김한별은 어색이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닫았다.
“맞아요. 가능하기는 하죠. 하지만 그때와 현재의 상황은 달라요. 이걸 말하고 싶었던 거죠?”
또 제갈 해솔이 나섰다. 김한별은 살짝 눈을 치떴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를 얼린다. 길을 만들려고 바닷물을 얼린다. 이 두 말의 공통점은 얼린다는 것만 있을 뿐, 목적은 판이하게 다르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후자가 훨씬 더 어려워요.”
“그렇지. 마력의 배분은 물론, 세심한 조절까지 필요로 하니까.”
이어지는 설명에 하승우가 부연해 받는다.
“옳은 말씀이기는 한데, 왜 자꾸 은근슬쩍 반말이에요?”
제갈 해솔은 톡 쏘아붙이더니 두 손을 살며시 모으며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무튼, 그래서요. 물론 클랜 로드의 생각도 좋지만, 저한테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거든요?”
“…무슨 방법입니까?”
“날개, 있죠?”
“…….”
제갈 해솔은 싱긋 미소 지었다.
“저번에 보니까 날개가 있는 것 같던데….”
…젠장, 이럴 줄 알았다. 제갈 해솔의 말인즉 용족화를 사용하라는 뜻이다. 그래. 왜 이 말을 안 꺼내나 했다.
“그 날개로 이 바다를 선회하시면서 신녀곡이라 추정되는 장소를 찾는 거예요. 물론 저를 데리고 말이죠. 그리고 장소를 찾으면 그 다음은…. 아시죠?”
“아. 맞아. 그거 되게 좋다. 어쨌든 장소만 찾으면 만사 OK잖아?”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전원 수긍하는 낯빛을 보였다.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단순한 촉인지 아니면 감을 잡은 건지는 몰라도, 적어도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즉 제갈 해솔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태껏 실컷 멋대로 써왔으면서 왜 갑자기 여기서 아끼려고 하는 거예요?’
곰곰이 생각에 잠겼으나 딱히 이거다 싶은 돌파구는 보이지 않는다. 아주 잠깐, 갑갑한 가슴을 이기지 못해 그냥 확 비밀을 밝혀버릴까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러나 현재로써는 결단코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선웃음이 나왔다. 상황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야 하는 처지인데 비밀을 숨기려는 일환으로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니. 솔직히 짜증 난다.
여하튼 결국에는 말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썩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군요.”
“어머. 왜요?”
“확실히 날개는 있습니다만. 그렇게 형편 좋게 사용할만한 능력은 아닙니다.”
“제한이 있다는 건가요?”
“예. 완전한 게 아니라 애초 제한된 능력으로 습득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지요.”
“흐응.”
제갈 해솔이 팔짱을 끼며 숨을 흘렸다. 언뜻 보면 수긍한 체 보여도, 꼭 ‘이렇게 나오시겠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제한된 조건 안에 신녀곡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느니 제 계획대로 탐색하면서 조금씩 사용하는 쪽이 더 낫겠지요.”
“그러니까 어쨌든 수송 능력을 아껴보자는 말씀이시죠?”
제갈 해솔은 무언가 확증을 얻으려는 듯 물었고,
“탐험 지역이 바다가 아닌 육지였다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나는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말로 응수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제갈 해솔은 으쓱 어깨를 들먹였다.
“아~. 뭐,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우리 마법사들이 고생하는 수밖에요.”
후유, 어떻게든 납득한 건가. 어쩌면 그냥 넘어간 걸지도.
속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며 나는 다시 바다를 응시했다.
“그래요. 되든 안 되든 우선 한 번 해보기로 하죠. 가장 가까운 빙하로 첫 얼음 길을 잇는데 성공하면, 아마 그 후로는 쉬울 겁니다. 보면 알겠지만, 바다에 떠 있는 빙하의 거리가….”
그때였다.
『사용자 제갈 해솔의 고유 능력,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의 발동을 감지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고유 능력, ‘제 3의 눈’이 반응합니다!』
『동 랭크 판정…. 격의 차이를 확인했습니다.』
『‘제 3의 눈’이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을 간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
허공에 주르르 출력된 메시지를 무심코 읽은 찰나, 어느새 시야는 한껏 가늘어져 있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갈 해솔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 제 3의 눈만큼은 아니지만, 사용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럼 제갈 해솔은 도대체 뭘 보려고 했던 거지?
…설마.
“이크. 또 안 되네.”
잠시 후, 제갈 해솔은 장난치다 걸린 개구쟁이처럼 혀를 쏙 빼물었다. 그리고 배시시 미소 짓더니 바다를 향해 총총히 이동했다.
“좋아요. 얼음 길이라고 했죠? 제가 먼저 한 번 해볼까요? 나름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 순간 나는 자동적으로, 느릿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사용자 제갈 해솔.”
목소리는, 스스로 들어도 놀랄 만큼 차가운 음성이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상당히 엉터리 같은 실수를 저질렀네요.
그제 오늘 내용을 적다가 아차 하고 말았습니다. 적다 보니 설정 충돌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세이크리드 해안에 관한 설정과, 또 하나는 신녀곡까지 가는 여정에 관련된 설정인데…. 전자의 설정대로 이야기를 진행하면 후자의 설정에 오류가 생기는 경우였습니다. 이게 톱니바퀴 하나가 어긋나니까 전체가 어긋나는 기분마저 들더군요. 그나마 미리 오류를 발견해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진짜 오만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열쇠…. 수송 능력을 아껴야 하는 상황…. 거기다 대기 시간…. 근데 이렇게 가면 해안 설정이랑 어긋나고.’
‘수호의 보석을 가져왔다고 할까? 아, 근데 그건 마력 제한이 있으니까 안 되겠네.’
‘이렇게 가면 되기는 하는데…. 그럼 이 캐릭터가 가만히 있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아틀란타나 야만 왕의 무덤에서 드러낸 적도 있고.’
‘아이 씨, 괜히 천재로 설정해놔서…. ㅜ.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방법을 찾아내기는 했습니다. 원래는 후반에 등장 예정인 떡밥인데, 이번 파트로 당겨 썼습니다. 아이고, 아까워 죽겠네요 정말.
그리하여 어떻게 끼워 맞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사실 애초 심사숙고해서 플롯을 작성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였겠지요. 앞으로는 조금 더 생각하고 적도록 하겠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