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28
00827 우리는 열심히 돌파하고 있는데. =========================================================================
“인정 못 해애애애!”
진수현이 소리를 질렀다.
아니, 포효라고 봐야 옳을까.
못 해애…!
못 해애애애…!
못 해애애애애애…!
못 해애애애애애애애…!
고함은 곳곳에 부딪쳐 도처에 메아리쳤다.
이어서,
꽈아아앙!
세찬 폭발음이 사방을 왕왕 울렸다. 격렬한 진동이 주변을 휩쓸고, 흐르던 공기가 짜릿하게 떨렸다.
이 무시무시한 기백(氣魄)에 치열하던 전투는 한순간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사용자는 물론, 심지어 벌레 무리조차도 하던 행동을 멈췄다. 눈동자가, 주둥아리가 모두 한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진수현이 있었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두 다리는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다.
이마와 지면이 맞닿은 부분에 점차 검붉은 빛이 번졌다.
“인정….”
그러한 찰나, 진수현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못하겠다고…. 새끼들아….”
반쯤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한 살기를 품은, 맹렬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였다.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찢어진 의복은 이미 옷의 기능을 상실해 넝마에 가까웠고, 군데군데에 시뻘건 액체가 그득했다. 깨진 이마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져 흘러, 얼굴은 선혈(鮮血)로 낭자하다.
그러나, 두 눈동자만큼은 형형한 빛을 뿌렸다.
“그래…. 형님이 존나 센 건 인정해.”
휘청, 잠시 몸이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그러나 바로 균형을 잡고 살며시 무릎을 굽힌다. 마치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준비를 마친 육식 동물과도 같이.
“하지만….”
으스러지도록 칼자루를 잡는다.
“나도, 아니.”
진수현이 머리를 흔들었다. 울음을 참는 듯 목울대가 떨리고, 굳게 닫은 입 틈으로 거친 그르렁거림이 새어 나왔다. 잠시 후, 힘껏 숨을 들이켜며 한껏 턱을 치켰다.
그리고,
“내가, 내가 진짜 사냥꾼이다! 이 개새끼들아아!”
여태껏 참고 참아온 화산이 꽝 폭발했다. 상처 입은 짐승의 최후의 울부짖음이 통로를, 방을, 공간을, 아니 지하 전체를 떠르르 울렸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용솟음치며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최후의 촛불이 타오르며, 마침내 깨어났다.
1회 차 춘추 전국 시절. 단신으로 전장을 휩쓸었던, 김수현이 기억하는 진정한 ‘마법사 사냥꾼’이 지금 이 자리에서 부활한 것이다.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고연주는 아차 하며 몸을 돌렸다. 경험상, 전투 도중 ‘폭주’할 시 끝이 좋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
다음 순간,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당장에라도 짐승처럼 달려들 것 같던 진수현이, 오른손에 쥔 검을 천장을 찌르듯이 들어 올린다.
“검(劍)의 승리를 노래하는 칼.”
칼날이 찬연한 빛을 뿜었다. 그리고 지극히도 차갑고 냉정한 음성이었다. 떨려 나오는 목소리는, 흡사 설원의 늑대를 연상케 할 정도로 싸늘하다.
“마(魔)의 패주를 음영하는 칼.”
스르르릉!
남은 손이 스치듯 움직였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검이 둘로 나뉘었다. 어느새 왼손에는 찬연한 빛을 분사하는 또 하나의 검이 움켜져 있었다. 하나 분명한 건, 지금 진수현은 양손에 검을 들었다는 것.
이윽고 어떤 예고도, 어떤 전조도 없이 진수현이 달렸다. 양손의 검을 풍차처럼 빙그르르 돌리며 바람처럼 질주한다. 그 바람은, 곧 하나의 거대한 폭풍으로 변해 벌레들을 세차게 강타했다.
씨잉! 첫 바람이 매서운 칼날처럼 스쳤다. 뒤늦게 검광(劍光)이 번뜩인 찰나, 한 놈의 머리통이 썩둑 베여 떨어졌다. 연이어 불어온 바람은 눈 깜짝할 새에 예닐곱 마리를 한꺼번에 갈가리 난자했다.
그리고 세 번째 바람이 흐른 순간, 진수현을 중심으로 사출된 수십 줄기의 검기(劍氣)가 사방팔방 뻗어 나가, 벌레 무리를 눈부시게 난도질한다. 수십의 벌레가 일거에 체액을 뿜으며 분리되는 광경은 그야말로 일대 장관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조금도 멈추지 않고 무섭게 밀고 나가자, 벌레 무리는 속절없이 좌우로 갈라졌다. 진수현은 호흡도 잊은 듯, 아니 멈추는 때가 자신이 죽는 순간이라는 듯, 쉴 틈 없이 동서로 번쩍였다. 빛나는 검으로 적을 시원스레 쓸어버리는 모습은, 흡사 2회 차 초, ‘빅토리아의 영광’을 들고 거침없이 전장을 누비던 김수현을 보는 듯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림자 여왕’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냉정히 상황을 분석한 결과, 객관적인 전황은 아직 벌레들에게 유리하다. 진수현의 힘은 분명히 폭발적이나, 일시적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노련한 고연주는 확실히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폭주’가 아닌 ‘각성’이라면, 그리고 조금 전부터 벌레의 충원이 끊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말인즉, 비단 고연주만이 아닌 전원이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히 옵니다.’
‘역전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불리함을 넘어 극한까지 치달리던 전투의 흐름이 파국(破局) 직전에 멈춰 섰다. 최후의 촛불을 불태우며 되살아난 투쟁심(鬪爭心)이, 결국에는 조금씩이나마 흐름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진수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이 흐름이 다시 되돌아갈지, 아니면 완벽히 가져올 수 있을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에게 달렸다.
그리하여.
“일어나라, 심연의 무리(Abyss Crowd).”
전원 각자 남은 여력을 꺼내고, 쏟아내기 시작했다.
열, 스물, 서른, 마흔…. 고연주의 아래, 줄기줄기 뻗어 나가던 수십 가닥의 그림자가 하나씩 차례대로 몸을 일으킨다.
“여왕은….”
남다은의 전신에 화사한 빛이 떠오른다. 어찌나 강렬한 기운인지 한 올 한 올 올라가는 머리카락이 시린 냉기를 뚝뚝 떨어트린다.
“금이득지어(今已得地於)….”
임한나는 하늘을 향해 시위를 놓았다. 쏘아진 빛나는 화살은 천장으로 스며들 듯 사라지더니, 이내 거대한 원으로 변해 하나의 진을 그려낸다.
“────! ────! 오라! 피에르!”
비비앙도 남은 마력을 박박 긁어모았다. 이미 한계치까지 마력을 사용했지만,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놓은 ‘질서의 오르도’를 사용하면 한 번 더 소환이 가능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 전장 분석…. 완료.
– 분석 결과, 사용자 진수현의 엄호를 최우선으로 설정, 이차적으로 전방위로 지원 사격을 설정합니다.
웅웅웅웅!
근원이 공중으로 느릿하게 부유했다. 허공에 은근한 빛이 감돌며 기이한 공명(共鳴)이 번져나갔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변으로 익숙한 것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입체의 마법 진이 핑그르르 돌아가며 서서히 모습을 갖춰간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무려 수십 개나.
– 고대 마법 도시를 소환…. 완료.
– 마지아(Magia)와의 연결을 시도합니다.
근원의 음성이 공간에 잔잔히 흐른다.
이로써, 바야흐로 서로의 명운을 건 최후의 전투가 재개를 알렸다.
아까와 변한 게 하나 있다면, 전투에 임하면서 대부분이 웃고 있었다.
승리를 확신한다는 듯이.
*
한편, 같은 시각.
사멸 무저갱 심층부.
서로 사이좋게 하의 실종으로 탁자에 걸터앉은 두 여인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김한별은 멍한 눈으로 입을 벌린 채 누군가를 쳐다보고, 이유정은 낯을 살짝 붉힌 채 눈웃음을 치고 있다.
한참을 응시하던 김한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하루만 다른 방에서 자면 안 되겠느냐고요?”
이유정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가…. 오빠랑 그, 그 짓을 할 거라고요?”
또 한 번 말없이 끄덕끄덕.
“그러니까…. 언니는 이 원정만 마치면 B 등급인데, B 등급으로 오르면 언니를 따먹겠다고 말씀하셨다고요? 오, 오빠가?”
“아니. 사실 말을 꺼낸 건 나야. 내가 먼저 따먹히고 싶다고 했어.”
김한별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동시에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유정은 시선을 피한 채 엄한 머리카락만 배배 꼬며 말을 잇는다.
“사실 등급에 별 의미는 없고…. 그냥 자격을 갖추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아, 몰라 몰라. 갑자기 말이 안 나오네.”
“…….”
“뭐, 한창 고생하고 있을 동료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이렇게 기약 없이 기다리기도 좀 그렇고.”
“으음.”
“뭣보다 악몽에 시달리면서 괴로워하는 게 너무 싫어. 환상인 건 알지만, 진짜 몸이 더럽혀진 기분이거든. 그래서 오빠한테 안기고 싶은 건가 봐. 히.”
“그, 그건….”
“아무튼, 한별이 너는 나 이해하지? 들어줄 거지? 응?”
“자, 잠시만요.”
그렇게 말한 이유정은 돌연 품에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정확히는 습격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고연주가 극구 경계한 미약이었다. 워낙 위험한 가루라 김수현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자는 도중 스리슬쩍 가져온 것이다. 김한별의 의아한 눈빛을 빛내자 이유정이 씩 웃었다.
“이게 아프로…. 뭐였더라? 여하튼 일단은 오빠한테 들이대 보고, 만약 안 먹히면 이걸 사용할 생각이야. 좋은 계획이지?”
“────.”
“물론, 알고 있어. 너도 오빠 좋아하잖아. 나 그렇게 경위 없는 년 아니다? 만약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면, 이거 쓰고 남은 거 너한테 줄게. 어때?”
“────.”
이유정은 주머니를 흔들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갑자기 김한별이 입을 딱 다물더니 지그시 쳐다보기만 한다. 아니, 무어라 웅얼거리는 소리는 들리는데 입속말이라 자세히 들리지 않는다.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아.”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늦었다.
탁, 날카롭게 주머니를 가로챈 김한별은 그대로 몸을 돌려 침실로 달렸다. 이윽고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록 업(Lock Up).”
찰칵! 잠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벌어진 일.
“…….”
한 손을 든 채 멍하니 있던 이유정은, 약 3초 후 상황을 이해했다.
“야아아아!”
“어헉.”
방이 떠나가라 지르는 소리에 김수현이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쾅쾅쾅쾅!
“문 열어어어!”
뻥뻥뻥뻥!
“문 열라고오오오!”
미친 듯이 두드리고 발로 차는 소리, 그리고 잡아먹을 듯한 비명. 아직 덜 깬 눈으로 들썩거리는 문을 쳐다보던 김수현은, 눈앞으로 황급히 다가오는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오, 오빠.”
“김한벼어어얼!”
“죄송한 데 지금 말씀해주세요. Yes에요 No에요?”
“개소리하지 말고! 빨리 문 열어 이 개새끼야!”
쾅쾅쾅쾅쾅쾅쾅쾅!
김수현은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의아히 쳐다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나 김한별은 한없이 급한 얼굴로 김수현의 어깨를 잡고 흔들 뿐이었다.
“빨리요. 대답해주기로 하셨잖아요.”
“아, 아니. 한별아.”
“그냥 좋아, 싫어 이렇게 말씀하시면 되잖요. 이게 어려워요?”
“그게 아니라….”
꽈앙!
결국에는 문이 부서졌다. 입을 짓씹은 김한별은 순간적으로 김수현의 옆으로 도망쳤다. 쿵쾅쿵쾅 들어온 이유정은 씩씩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일촉즉발의 상황. 푹 한숨을 내쉰 김수현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오른손을 꾹 주먹 쥔 채로.
잠시 후, 소란스럽던 방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두 여인은 허연 김이 피어오르는 정수리를 문지르며 김수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데, 두 명 모두 하의를 입지 않은 탓에 상황이 꽤 묘하게 됐다. 김한별은 옷을 벗어 가리기는 했으나 대신 드러난 가슴을 가리려 애썼고, 이유정은 이불을 끌어당겨 하반신을 덮었다.
어쨌든 상황 설명은 대충 끝났다. 팔짱을 낀 채로 상념에 잠겨 있던 김수현은, 기나긴 한숨을 끝내고 머리를 들었다.
“그래. 순서를 정하다가 싸웠다고.”
“…….”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너희가 뭔 얘기를 하든 크게 상관은 않겠다만…. 어째서 내 의지는 무시하는 거지?”
“무슨 의지? 오빠 나랑 하기로 약속했잖아?”
뻔뻔함도 도를 넘으면 기가 막힌다. 김수현은 입을 쩍 벌렸다. 말을 들은 적은 있으나 약속한 기억은 없다.
“저는 최소한, 대답이라도 듣고 싶었을 뿐이에요.”
김한별은 조용한 음성으로 최소한을 강조하며 말했다. 김수현은 침음을 흘렸다. 이 건에 관해서는 백 번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봐도 확실히 잘못한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생각을 정리한 김수현은 습관처럼 입에 침을 바른 후 두어 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친여동생을 보는 듯한, ‘그래. 오빠는 다 이해한다.’ 라 말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으음. 우선 너희가 오빠를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도 정말 고맙다고 생각한다. 이건 진심이야. 하지만 얘들아? 너희는 아직 어려. 이 세상에는….”
“아닌데? 나랑 한별이는 여기서 사 년이나 활동했고, 다른 남자한테는 손톱만큼도 관심 없는데? 오빠바라기라고 했잖아.”
“하하. 그렇구나. 그런데 말이다. 너희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어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 연주 언니, 한나 언니, 하연이 언니, 다은이 언니. 다섯 명이죠?”
콜록! 김수현이 크게 기침했다. 순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둘을 쳐다봤지만, 이내 체념한 듯이 입을 깨물었다.
“…알고 있었구나. 그래. 하지만 아무리 홀 플레인이라도….”
“야, 아니지. 여섯 명이지. 게헨나는 왜 빼먹어? 임신시키고 애까지 낳았는데.”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게헨나도 있었네요.”
“…….”
김수현은 침묵했다.
============================ 작품 후기 ============================
마법사 사냥꾼 각성 완료.
이제 보너스 스테이지로 돌입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