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35
00834 The Town At Night. =========================================================================
쪽지를 거듭 읽고 내린 결론은, 성으로 걸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서지환이 협조하겠다고는 했으나 무작정 믿고 있을 수만은 없거니와, 같잖은 수작을 엿 먹이려면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서였다. 한편으로는 홀몸으로 가는 게 적적하기도 했고. 공교롭게도 가장 적합한 사용자가 떠올랐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오 층의 복도는 고요했다. 어두운 통로에는 어슴푸레한 흰색 문이 좌우를 아울러 두 열로 늘어서 있다.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숙소가 어디였더라?
무려 10분이나 어둠 속에서 헤맨 후에야 겨우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애초 잘못된 곳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반성하며 반대쪽으로 이동했다. 계단을 등지는 방향으로 바라보고, 왼쪽 가장 끝 방이었지? 똑, 똑. 가볍게 눈을 노크하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니? 이 야심한 시간에….”
이런, 잠든 걸 깨운 건가. 힘없는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살짝 쉰 거 같기도 했다. 이내 서서히 문이 열리며 부스스한 얼굴의 고연주가 얼굴을 내밀었다. 나를 보고 몹시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어머, 웬일이에요?”
“같이 밤의 거리에 가지 않을래요?”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러자 반듯한 이마가 살며시 좁혀지더니 왼쪽 눈이 찡그려졌다.
“밤의 거리에 같이 가자고요?”
“예.”
“저랑? 단둘이서?”
“그렇지요.”
“왜요?”
“응? 싫어요?”
돌연히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하기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고연주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비뚜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표정도 어느새 샐쭉해졌다.
“싫은 건 아닌데,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아, 그건.”
“수현이야말로 갑자기 왜 이러는데요? 오늘 제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니까, 안쓰럽기라도 하셨나요?”
“…아니요?”
“그럼요.”
“도움받고 싶은 일이 생겨서요.”
실쭉하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사전 설명이 부족해 오해를 부른 것 같아, 나는 쪽지를 꺼내 차분히 설명했다. 오늘 올라올 영약을 꼭 갖고 싶다는 말과 이걸 이용해 야료를 부리려는 놈들이 있다는 것 등등. 짧은 설명을 끝내자 고연주는 킬킬거리며 한참을 소리 죽여 웃었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에 나는 괜스레 볼을 긁적였다.
“저, 고연주?”
“나는 또. 그래, 이래야 수현답지.”
“예?”
“아니, 아녜요. 오해해서 미안해요.”
“…….”
“아무튼, 좋아요. 같이 갈 테니까 삼사십 분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빙긋 미소 짓고 문을 닫았다. 한 삼 초 정도 멍하니 있다가 나는 벌컥 문을 열었다. 바로 준비에 들어갔는지 상의를 목까지 끌어올린 고연주는 의아히 나를 돌아봤다. 우선 옷자락에 걸려 끌려 올라간 가슴 실루엣을 한 번 쳐다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꿀꺽.”
잠시만. 이걸 말하려는 게, 아니 침 삼키는 소리를 내려는 건 아니었어.
“혹시, 옷 갈아입는 거 보는 거 좋아해요?”
“험, 그게 아니라요. 준비 시간 때문에.”
“응? 그게 왜요?”
“무슨 삼십 분이나 걸립니까. 그냥 로브 하나 걸치고 얼른 나와요.”
그렇게 말한 순간 고연주는 진정으로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진심이에요?”
“아니, 진심이고 자시고….”
“이제 막 잠에서 깼는데, 이런 꼴로 나오라고요?”
“그게 무슨 상관….”
“나 참. 말을 말지. 됐고, 나가서 조용히 기다리고나 있어요?”
“고…!”
쾅,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은 세찬 소리와 함께 닫혔다. 이어서 “진짜 별꼴이야. 예의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불쑥 찾아온 것도 괘씸한데….” 라는 말소리가 안에서 들려와 나도 똑같이 투덜거렸다.
“거참, 이해가 안 가네. 뭘 삼사십 분이나 준비한다고. 씻는 시간 포함해도 십 분이면 될걸.”
“뭐라고요? 다 들리거든요?”
“들으라고 한 겁니다?”
“…기막혀. 남자랑 여자랑 똑같은 줄 알아요? 이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준비 시간이라고요.”
나는 일부러 힘차게 코웃음 쳤다. 그리고 한층 목소리를 낮추며 비꼬는 투로 입을 열었다.
“예, 예. 그러시겠죠. 아주 그냥 제가 씻겨주고 싶네요. 그럼 오 분이면 될 텐데.”
그러나.
“책임져줄 자신 있으면 그러시던가?”
짓궂은 음성에 조용히 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다시 정문으로 걸어가면서 스스로 생각해도 뜻 모를 한숨이 계속 나왔다. 결국에는 홀로 쓸쓸히 기다려야 하는 건가. 그저 고연주가 빨리 나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결과적으로 고연주는 내 간절한 기도를 배신했다. 애초 말한 것보다 십 분이나 늦게 나온 것이다. 그러나 나를 보며 바쁘게 달려오는 모습을 바라본 순간,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말았다.
가슴 윗부분이 직선으로 트여 있는, 몸에 찰싹 달라붙는 터틀넥(TurtleNeck) 같은 옷과, 안이 비칠 듯 말 듯한 고급스러운 면사(綿絲)로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가린 모습은, 몹시 색정적이면서 아름다웠다. 오른손목에는 금빛 브레이슬릿이 찰랑거리고, 왼쪽 어깨에는 은빛 끈으로 연결한 아기 카오스 미믹을 걸었다.
또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망사 천으로 얼굴을 가리니 어딘가 모르게 몽환적인 미(美)를 자아낸다. 거기다 긴 잿빛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려 깔끔하게 묶은 자태는, 실로….
“정말, 못살아. 자꾸 어디를 보는 거예요?”
킥킥대는 소리를 들은 순간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시선은 반 이상이 훤히 드러난 가슴에 머물러 있었다. 와, 아예 노출한 것보다는 살짝 가린 게 더 야할 때도 있구나.
“으음, 이만 가도록 하죠. 출발이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어색이 헛기침하며 몸을 돌렸다. 사실 늦은 건 아니었다. 애초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으니 지금 가면 오히려 경매 시간에 딱 맞을 것이다. 원래는 오랜만에 가는 것이니만큼 이곳저곳 돌아보며 눈요기나 할 예정이었는데, 이쪽이 더 남는 장사다.
“네, 좋아요~.”
고연주는 생글생글한 음성으로 말하고는 팔짱을 껴오며 몸을 비비듯이 밀착해왔다.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의 향기로운 냄새가 물씬 흘렀다. 나는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의심하더니, 웃더니, 화내더니, 이제는 기분이 좋아 보인다. 여자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밤의 거리로 이동했다.
어디 보자. 머셔너리 캐슬을 기준으로 남서쪽 구석이던가?
“삐아….”
“응? 얘가 왜 갑자기 안솔처럼 울지?”
“삐에에에….”
“얘, 왜 그러니? 왜 우는 거야, 응?”
밤의 거리로 가는 와중 구슬프게 울어 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입구를 쫙! 시원스레 찢어 조용히 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왜냐면 ‘제발 아기 카오스 미믹 좀 그만 괴롭혀라.’ 라는 익명의 투서가 가끔 결재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정도 느긋하게 걷자 마침내 서서히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색찬란한 불빛이 거리 곳곳을 밝히고, 대로에는 수많은 사용자가 소리 없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긴 찰나, 문득 사방의 사용자들이 머리를 돌렸다. 그 현상은 순식간에 전염돼 종내 어수선함이 잦아들며 모든 사용자가 우리를 쳐다봤다. 흡사 ‘홀드(Hold)’ 주문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약간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뜻 모를 정적이 흐른다.
“…….”
로브도 눌러쓰고 왔는데 갑자기 왜 이러나 생각할 즈음, 시선이 내 옆의 여인에게 꽂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옷차림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만으로 주변의 관심을 완벽하게 끌었다. 어찌나 색기가 강한지,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눈에 보일 정도로 아랫도리가 부풀어 오르는 사내가 한두 명이 아닐 지경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에 밀집해 있던 사용자들이 양쪽으로 주춤주춤 물러나 길이 트였다. 덕분에 혼잡한 틈을 헤집거나 순서를 기다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이내 생각지도 못한 곤란이 찾아왔다.
사내, 심지어 여인조차도 고연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도 적잖았다. 시선 중에는 무언가 굉장히 억울해 하거나, 칼로 몸을 콱 쑤시는 듯한 무시무시한 살기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정작 고연주는 현 상황을 무척 즐기고 있었다. 아니, 즐기는 정도가 아니었다. 고혹적인 미소를 던지거나 찡긋 눈웃음치는 건 애교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덥다면서, 검지를 갈고리처럼 구부려 가슴 트임 부분을 살그머니 끄집어내리는 행동은….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꼭 ‘먹고 싶니? 먹고 싶어?’ 라고 희롱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으음. 세상에서 가장 치사한 짓이 먹을 거로(?) 놀리는 거라던데.
자꾸만 걸음이 느려지는 고연주를 억지로 잡아 이끌며 겨우 입구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비싼 입장료로 금화 서른 개를 낸 후, 우리는 겨우 밤의 거리에 들어올 수 있었다.
“흐응, 이건 에히토 향…. 아니, 카마리나 인가?”
고연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킁킁거렸다. 힘껏 숨을 들이켜자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흐음. 해로운 향은 아닌 것 같은데요.”
“네. 아니죠. 살짝 맛만 느낄 수 있는 정도로 뿌리기는 했는데…. 서서히 활성화하는 오감을 바탕으로, 인간이 인지하는 것에 한층 강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약이에요.”
“호오.”
“…단, 그 반응이 원초적인 감정에 기인한다는 것이 문제지요.”
“…….”
“서지환이라고 했죠? 상인으로서 대단한 수완가라고 들었는데, 조금은 알 것 같네요. 이 거리의 특성을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아니 이용하고 있어요.”
고연주의 설명에 공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눈에 보인 건 홍등가처럼 은은한 붉은빛을 밝히는 조명등과, 가지런하게 늘어선 건물 벽에 알알이 매달린 반짝이는 수정들이었다. 거기서 조금 더 지나자, 탁 트인 거리의 가장자리로 사용자들이 한두 명씩 짝지어 좌판(坐板)을 깐 광경이 들어왔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흔한 시장의 풍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밤의 거리의 모토는 ‘욕망’을 구현하고, 실제로 사고파는 것에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생각하면 일 인당 금화 열다섯 개를 받는 이유도 답이 나온다. 말인즉 입장료에 관전 값을 포함한 것이다. 구매자가 즉석에서 욕망의 발현을 원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맛도 쏠쏠하니까.
여하튼 이 추악한 거리를 이용하는 사용자들이 무조건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철칙.
‘어디서, 어떤 광경을 봐도,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걷는 거리는 첫 번째 거리, 초입에 불과하다. 밤의 거리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욕망의 강도가 심해지는, 일종의 단계형 상승 구조로 돼 있다. 즉 절대로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욕망은, 더 은밀하고 으슥한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일례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경매장의 경우, 가장 마지막 단계나 혹은 바로 그 아래 단계라고 볼 수 있을 터.
그만큼 위험하지만, 그만큼 유혹도 강렬하다.
잠시 후.
첫 번째 거리를 통과한 후에는 상점이 밀집한 두 번째 거리가 나타났다. 겉으로 내건 간판을 보니 어떤 상점인지 짐작이 갔으나, 아직은 정상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곳도 지나쳐 세 번째 거리로 들어서니 이번에는 예상대로 창관의 거리가 나왔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거리를 합친 것보다 많은 사용자가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갑절은 떠들썩한 거리는 호황(好況)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여기도 극심한 거부감이 들 만큼 비정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어쨌든 성(性)을 합법적으로 상품화하는 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니.
…바꾸어 말하면, 이 세 번째 거리까지는 최소한 ‘정상인’ 혹은 ‘사람’이 이용하는 거리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밤의 거리’가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낸 건,
“……?”
“……!”
상위 단계의 첫 시작이라 볼 수 있는, 네 번째 거리로 들어섰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