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36
00835 The Town At Night. =========================================================================
세 번째 거리까지만 해도 길은 호화로웠다. 곳곳에 설치된 등이 빛을 밝히고, 건물 창문이나 입구서 흘러나오는 다채로운 빛깔은 화려한 번화가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다음 거리로 들어선 순간부터 길은 점차 어두워졌고, 활기도 눈에 띄게 사그라졌다.
단순히 이용하는 사용자가 적어져서가 아니었다.
우선 시야가 스리슬쩍 어두워졌다. 자주 보이던 등이 모조리 사라지고, 간간이 건물에 걸린 횃불만이 눈앞을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처럼 길을 거니는 사용자보다는, 도처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용자의 수가 태반이다.
왜 멈춰서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왜냐면 개인의 ‘욕망’을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는 만큼, 장사 내용도 날마다 달라지니까.
단 하나 확실한 건, 이 네 번째 거리부터가 진짜 밤의 거리라는 것이다.
그래. 사람이 아닌 ‘짐승’이, 정상인이 아닌 어딘가 망가진 ‘비정상인’들의 향연이 이루어지는 공간.
웅성웅성.
문득 앞에서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걷자 큰 거리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약 스물 남짓한 사용자가 무언가를 둥글게 둘러싸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하나 특이한 건, 모여 있는 사용자가 거의 여인이었다. 사내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겨우 서너 명에 불과했다.
그냥 빠르게 지나치려는 찰나, 사용자 사이사이 보이는 광경이 돌연히 시야를 스쳤다. 그 순간 알고 있으면서도 순간적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쭉…. 쭈우우욱….”
“윽, 흑…! 으윽…!”
웬 거한의 사내가 무릎을 꿇은 채 누군가의 사타구니에 머리를 묻고 있다. 무언가를 힘차게 빨아들이는 소리가 울렸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당하는 처지에 있는 이의 성별이 동성이었다.
사지는 단단한 밧줄로 결박돼 있고, 입에는 가느다란 막대를 문 채 소리 죽여 흐느낀다. 백한결 급은 아니지만, 얼굴도 희고 외모도 꽤 곱상하다. 아직 앳된 남아가 건장한 털북숭이한테 당하는 장면은 몹시나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광경을 뜨거운 눈으로 관람하는 구경꾼들과, 의자에 편히 앉아 있는 여성 사용자 한 명. 흥미로운 눈으로 응시하면서 한 손에 든 와인 잔을 입가로 기울인다. 아마 저 광경은 저 여인의 욕망을 구현화한 것이리라.
그때 여인이 두 손을 입에 모아 교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지루해지는 것 같은데…. 동걸이 아저씨~. 이제 슬슬 본 게임으로 들어가는 건 어때요?”
“예, 예. 알겠습니다.”
거한은 허리를 굽실거리더니 곧바로 상대를 바닥에 눕혔다. 그 순간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아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익숙한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이려나?
잠시 후.
“끄으으윽? 끄르르륵!”
처절하리만치 서글픈 절규가 귀를 세게 때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깔깔 웃는 소리와 가볍게 손뼉 치는 소리.
고연주는 허탈이 코웃음을 치고 입속으로 혀를 찼고, 나는 입맛을 다시며 걷는 속도를 가일층 높였다.
“어서 갑시다. 마지막 거리까지 가는 것도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그렇게 삽시간에 길을 벗어났으나, 다음 거리라고 상황이 다른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하다고 볼 수 있을까. 아까는 사내보다 여인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다면,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다섯 번째 거리로 접어든 순간, 여인이 울부짖는 소리와 욕설 섞인 환호가 우리를 맞이했다.
“꺄아아악!”
“잘한다! 아주 그냥 찢어 죽여버려! 저 개 같은 부랑자 년!”
“여, 열어! 문 열라고! 아, 아아아악!”
“싸워! 일어나서 싸우라는 말이야! 아, 못 일어나나? 킬킬킬킬!”
네 방향으로 길이 트인 광장은 한창 떠들썩했다.
중앙에는 가로세로 오륙 미터 정도 돼 보이는 사각형 모양의 철창이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쉰 명 남짓한 사용자가 고함을 지르고 있다. 귀를 기울이니 태반이 여인을 조롱하거나 상대를 응원하는 소리였다. 가까워질수록 점차 심해지는 비릿한 내음이 코를 자극한다.
마침내 광장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이미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다. 철창 안쪽에는 늑대처럼 보이는 괴물 두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누군가를 조여가고 있다. 시뻘건 안광과 침을 뚝뚝 떨어트리는 걸 보면 흥분 상태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안쪽에는,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낡은 천 쪼가리만 걸친 여인이 땅에 쓰러져 있었다. 두 다리는 밧줄에 칭칭 감겨 묶였고, 오른손목은 쇠고랑과 함께 밧줄에 걸려 있다. 자유로운 건 머리와 왼팔뿐.
문득 한쪽에 부서져 쪼개진 목검이 눈에 밟혔다. 이 정도로 제한을 걸었다는 소리는 여인도 어느 정도 실력은 있는 모양이다.
이윽고 늑대가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척 지쳐 보이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살고 싶은 걸까. 여인은 눈물 맺힌 눈으로 필사적으로 기었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 소리 질렀다.
“시, 싫어! 싫어어어! 이건 너무하잖아! 살려줘, 살려달라고!”
비명이 커지자 덩달아 응원도 커졌다. 여인은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으나 왼팔만으로, 그것도 맨손으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이내 괴물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여인의 머리를 주둥이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허무하리만치, 힘껏 씹었다.
뿌드드득!
“깍…!”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여인의 몸이 세차게 펄떡였다. 주변에 흐르던 소리가 뚝 끊겼다. 괴물이 우물우물 주둥이를 움직일 때마다 핏물 섞인 으스러진 뇌수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덜덜 떨던 여인의 몸은 점차 간헐적으로 경련하더니 곧 힘없이 축 늘어졌다.
이윽고 광장을 완전히 지나쳤을 즈음, 거대한 함성이 터졌다.
“…참 재밌는 투기장이네요.”
고연주는 기어코 한 마디를 던졌다.
“투기장이 아니죠. 그냥 일방적인 농락입니다.”
“하기야, 저도 일본의 이지메 방송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살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수현. 그거 알아요? 서 대륙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상이라는 거.”
“누가 그럽니까?”
“사라한테 들었어요. 거기가 더 심하기는 하지만….”
“…….”
고연주의 음성은 담담했다. 그러나 낯빛은 썩 탐탁잖은 빛이 조금이나마 드러나 있었다.
이 거리를 걸으며 모종의 기분을 느끼는 걸까?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왜냐면 이런 전투는 그나마 깔끔하게 죽기라도 하니까.
사실 오늘 밤의 거리는 생각한 것보다 상당히 약한 수준이다. 일 회차 때 겪은 밤의 거리 중 가장 심한 기억은, ‘Endure’라는 이름의 경기였다. 여인을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강제로 발정시킨 괴물을 수십, 수백 마리 풀어 섹스 배틀을 벌이는 것이다.
끝까지 살아만 있으면 여인의 승리지만, 이기는 건 당연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부분 잔뜩 흥분한 괴물에게 목숨을 잃었고, 쏟아 붓는 정액을 견디지 못해 배가 터져 죽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반다희가 포로로 잡히고 나서 그렇게 죽었던가?
뭐, 아직 그 정도로 타락하지 않았다는 방증이겠지.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다음 거리로 이동했다.
여섯 번째 거리는 그 어느 길보다 조용했다. 사용자 수는 확실히 줄어들어 한산하기 그지없고, 간간이 두런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길거리에는 여태껏 지나온 곳보다 가장 심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어머?”
그때였다. 이제 곧 도착한다는 생각을 할 즈음, 고연주가 약한 소리를 냈다. 왜 그러나 싶어 앞을 바라보자 너덧 명의 사용자가 보였다. 주변에는 사람 키만 한 장대 하나가 땅에 박혀 있고, 진열대 위에는 검은 봉투 같은 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자세히 보니, 장대에 한 사용자가 양손이 묶인 채 끝에 매달려 있었다. 흡사 푸줏간에 주렁주렁 걸린 고기를 보는 듯했다. 아직 몸 성히 살아 있었지만, 두 눈은 초점을 잃고 흐릿하게 풀려 있다. 아마 약을 먹였겠지.
“다른 데로 갈 줄 알았는데, 잡혔나 보네?”
“예?”
“아니, 아무것도 아녜요. 어서 가요.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
이번에는 고연주가 나를 잡고 이끌었다.
“그냥 좀 달라니까…. 쓸 데가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닌가….”
“아 말했잖수…. 살려서는 반출 못 한다고…. 못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법칙이 그래요…. 알만한 분이 이래….”
“정 그러면 저기 봉투나 좀 집어가시던가. 내 싸게 드릴 테니….”
“저건 양놈들이잖아. 내가 원하는 건 북 대륙 사용자라고….”
지나치는 와중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 걸까?
“나도 어지간하면 원하는 대로 해드리고 싶은데, 얘는 안 돼요. 양놈들이야 합법적으로 노예로 부릴 수 있다지만….”
“언제 노예로 부리겠다고 말이나 했나? 싱싱하게 데려가는 게 더….”
“내가 불안해서 그래요, 내가. 생각해보슈. 이제 갓 수료한 애를 잡았다는 말이 새어나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요? 그때는 장사 접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죽는다고!”
“거참, 이 사람….”
“자자, 그러지 마시고. 어차피 실험 재료로 쓸 거 아뇨. 내 최대한 신경 써 토막 쳐 드리리다.”
“에이, 그럼….”
걸음에 속도를 붙일수록 소리도 빠르게 멀어졌다. 우리는 침묵을 지키며 거리를 통과했고, 약 10분 후 양 갈래로 갈라지는 길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좌우를 살폈다.
왼쪽은 서서히 길이 좁아지는 형태로, 어딘가의 입구로 들어가는 길을 보는 듯했다. 꼭 뭘 은밀하게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반대로 오른쪽은 드문드문 건물이 보였고, 길도 제대로 트여 있었다. 그러나 사용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오직 고요한 정적과 어둠만 흐르고 있다.
여기는 몹시 위험한 공기가 흐른다. 마치 이대로 들어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 같은….
“그래서, 어떻습니까?”
“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는지 고연주는 흠칫 상념에서 깬 얼굴로 반문했다.
“한때 이 거리에 군림했던 여왕의 평가를 듣고 싶은데요.”
“…킥.”
고연주는 싱겁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다 옛말이죠. 그리고 구 북 대륙 밤의 거리는 이만큼 크지도 않았네요.”
그러더니 흘긋 눈을 치켜 나를 흘겼다.
“그것보다는, 현재 군림하는 왕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예? 저 말입니까? 저는 별로….”
“왜요? 제가 물러났으니 현재는 아마 살문이 장악하고 있겠죠. 그런데 살문은 누구만 보면 벌벌 떨던데…?”
“…신 코란 연합을 무시하는군요.”
“그들은 관리자일 뿐,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군림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누구 한 마디면 이 밤의 거리도 당장 접어야 하지 않나요?”
“…….”
그런가?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걸음을 돌렸다.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씩 좁아지던 거리는 어느새 서너 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협소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길의 끝으로 이제껏 지나쳐온 어느 건물보다 커다란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건물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외관이 검은색 장막으로 빈틈없이 둘러쳐져 있었으니까. 어쨌든 저곳이 목적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들어가는 통로에는 천막의 입구처럼 휘장이 처져 있었고, 앞에는 두 명의 사용자가 경호원처럼 서 있다. 우리를 보자마자 서로 한 번 쳐다보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손님. 죄송하지만 로브는….”
한 사내가 말을 꺼낸 찰나, 옆의 여인이 가만히 팔을 뻗어 제지했다. 여인은 잠시 고연주를 지그시 응시하고는 나를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요. 그나저나 조금 늦은 것 같은데요.”
“전혀 아니에요. 이제 곧 시작하니 마침 딱 맞춰 오셨네요.”
“다행이군요.”
그러자 영업용 미소를 지은 여인은 손으로 어두운 입구를 가리켰다.
“그럼, 여기서부터는 제가 직접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이자 여인은 몸을 돌려 사뿐사뿐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나와 고연주도 차분한 걸음으로 따라 들어갔다.
베일에 싸인 일곱 번째 거리,
이제 곧 ‘금(金)의 전쟁’이 벌어질 경매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