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53
00852 Meanwhile, Same Time : Seven =========================================================================
이안의 말투는 의미심장했으나 원정대는 별로 이상한 기분은 느끼지 못했다. 심각히 와 닿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사실 애초 고대 문양은 해석하기 나름일뿐더러, 이안도 어렴풋이 기억한 단편적인 기록을 읊었을 뿐,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여하튼 벽화 해석에서는 별반 소득을 얻지 못했으나, 엘도라는 일단 들어가 보자며 동료를 탑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낡은 석문을 밀고 들어간 원정대는 드러난 안쪽 풍경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본 탑의 크기도 높고 거대했지만, 내부는 상상 이상으로 훨씬 드넓은 공간이었다.
“가요. 이 층으로 올라가는 길까지는 저희가 알아놨어요.”
올리비아는 가볍게 한 마디를 남기고는 어둠이 휩싸인 공간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방금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어지러운 갈림길을 거침없이 걸어가더니,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올라가는 계단이 원정대 앞으로 나타났다.
올리비아는 여기까지라는 듯 조용히 뒤로 물러났고, 나탈리는 후다닥 선두로 달려나갔다. 이제 할 일이 생겨서 그런지 낯에 화색이 만연하다.
“히히. 드디어 모험이다, 모험.”
“나탈리. 너무 들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도….”
“조심이고, 둘째도 조심이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
나탈리가 잽싸게 할 말을 가로채며 흥청거렸다. 순간 엘도라의 아미가 꿈틀거렸으나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왜냐면 나탈리는 진정으로 모험을 즐기는 사용자이며, 상황을 즐길수록 본연의 실력을 잘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들어갑니다!”
나탈리는 활기차게 외치며 올라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 층은 일 층보다 한층 어두워, 앞으로 뻗어 나가는 길은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탈리는 목에 건 뿔 나팔을 입에 물고는 차분히 길을 찾기 시작했다. 뒤따라가는 이들 또한 약간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고쳐 잡았다. 어찌 보면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라고 생각했지만, 탑 내부 현황은 원정대의 예상과 완전히 빗나갔다. 안은 음침하고 먼지가 켜켜이 쌓이기 했으나 그뿐, 딱히 괴물이나 함정이 출현하는 일은 없었다. 나탈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으나 안 나타나는 걸 어쩌랴. 결국에는 일 층을 통과한 것과 비슷한 시간에 삼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을 수 있었다.
원정대는 어리둥절해 하며 계단을 올랐으나 삼 층, 심지어 사 층의 상황도 비슷했다. 층마다 그저 구조만 약간 변했을 뿐, 기분 나쁠 정도의 침묵은 여전했다. 그리하여 계속, 아무런 방해 없이 공략이 이어지자 원정대의 분위기는 점차 긴장감이 고조됐다. 낙승이라며 기뻐하기에는 워낙 잔뼈가 굵은 사용자들이라, 되려 정적에서 오는 불안함을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엘핀 로드!”
결국, 오 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앞두고, 참지 못한 아키로프가 버럭 소리 질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각나는 경우는 딱 한 가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뻔하군! 클랜원들이 철수하자 승냥이 같은 놈들이 바로 달려들었겠지! 정보 관리를 도대체 어떻게 한 거요!”
“꼭 이미 청소가 돼 있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아 지금 상황이…!”
“아키로프, 그만.”
분위기가 험악해질 기미가 보이자 엘도라라 얼른 아키로프의 말을 끊었다. 눈짓으로 주의를 시키고는 계단 앞에 서 있는 나탈리를 바라봤다.
“혹시 침입 흔적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까?”
나탈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 아니. 못 본 것 같아. 봤으면 진작 말했을 거야.”
아키로프는 그 말에 한풀 꺾이기는 했으나 씨근거리는 기색은 역력했다. 조금은 어색해진 기류 속에서 멜리너스가 부드럽게 달래듯이 격려하자 나탈리가 다시 앞을 돌아봤다. 잠시 후, 전원 입을 굳게 다문 채 오 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오 층의 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힌 순간, 아래층과는 조금 다른 광경이 원정대 앞에 펼쳐졌다. 일단은 길이 하나밖에 없었다. 지름이 이 미터쯤 되는 통로 말고는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차 있어, 흡사 허공에 걸린 구름다리처럼 보였다.
좌우를 내려다본 나탈리는 살짝 눈을 치떴다. 이 구름다리가 허공에 떠 있는 거라면 응당 아래가 보여야 정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안력을 높여도 보이는 건 어둠뿐이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치자 행군 속도도 자연스레 느릿해졌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행군한 결과, 약 한 시간이 지나서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다리도 점차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통로 끝에서는 갑자기 길이 둥글게 퍼지듯이 넓어져 광장과 같은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이내 다리를 벗어나 광장에 첫걸음을 내디딘 순간, 앞을 바라본 나탈리가 돌연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아….”
“왜 그러지?”
나탈리가 걸음을 멈추자 사자 문양이 그려진 은빛 필드 아머(Field Armor)를 걸친 준수한 미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나 그 사내 또한 앞의 광경을 보더니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원정대의 발치로 낡은 금속이 툭툭 걸리는 요란한 쇳소리가 이어졌다.
광장은 약 지름 이백 미터 즈음 되는 넓은 공간이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잔해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개중에는 깨진 무기 조각이나 반파된 갑옷 파편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는데, 하나 특이한 점은 대부분이 중앙 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지키려다가 실패한 것처럼.
“뭐 엄청나게 치열한 전투라도 있었나? 꼭 전쟁 직후의 풍경을 보는 기분이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던 에드워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글쎄. 나는 쥐새끼가 몰래 훔쳐먹고 간 밥상을 보는 기분인데.”
아까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지 아키로프는 스리슬쩍 투덜거렸다. 그 말을 들은 올리비아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주먹을 움켜쥔 찰나, 앞서가던 나탈리가 문득 앞을 가리켰다.
“어, 저기!”
원정대 전원은 반사적으로 나탈리가 가리킨 전방을 응시했다. 그러나 몇 명은 곧 실망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잔해가 쌓인 중앙의 가장자리에는 총 여덟 개의 기둥이 원을 그리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돼 있었다.
일반적인 원형 기둥이 아닌 케이크를 팔 등분한 듯 부채꼴 모양이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성물은커녕 칼집 비슷한 건 보이지도 않고, 기둥도 신비하다기보다는 초라하고 보잘것없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군가 약간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잠시만요.”
불현듯 이안의 음성이 들렸다. 발로 잔해를 치웠는지 쭈그려 앉은 이안은 바닥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손으로 지면을 싹싹 쓸거나 숨을 세게 부는 모습을 보며 멜리너스가 수염을 더듬었다.
“흠. 그렇지. 잔해로 가려진 마법 진이 있을 수도….”
“아니요. 마법 진은 아닙니다. 오면서 계속 살펴봤어요. 문양 같은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응? 그럼?”
“줄, 입니다.”
이안이 이것 좀 보라는 듯 잿빛 바닥을 손가락질했다. 원정대가 모여서 보자 그곳에는 확실히 새끼손가락 마디만큼 패여 있는 줄이 직선으로 쭉 그어져 있었다. 이안은 앞과 뒤를 한 번씩 돌아보고는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이 줄 말입니다. 이어져 있는 것 같은데요?”
“응? 이어져 있다니?”
“보세요. 기둥의 모가 진 부분과 방향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리고 또 중앙을 향하고 있잖아요?”
“……!”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사용자들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이안의 말이 뭘 뜻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원정대는 곧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기둥과 이어지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치운 터라,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똑같은 줄을 발견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잠시 후, 기둥 수와 정확히 일치하는 여덟 개의 줄을 발견하자 원정대의 시선은 자연스레 중앙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여전히 정체 모를 잔해가 쌓여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아까는 별로 이상하다 생각지 못했는데, 유독 저곳만 두텁게 포개져 있는 걸 보니 갑작스레 감이 왔다. 덮여 있는 게 아닐까, 무언가 감춰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느낌.
“…치울까?”
이윽고 누가 낮은 음성으로 말하는 동시,
꿀꺽.
고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불안한 침묵이 맴도는 오 층을 고요히 울렸다.
*
북 대륙.
아틀란타.
남 도시에 우뚝 솟은 머셔너리 캐슬은 뜻 모를 열기로 한창 뜨거워져 있었다. 기실 성은 이미 한참 전부터 소란스러웠다. 단순히 여러 사람이 떠드는 수준이 아니라, 굉음과 폭음이 연달아 울리며 사방을 들썩인다. 아마 지나가는 사람이 들었으면 폭탄이 터진 거라 생각할 정도였다.
쾅!
바로 지금처럼.
소음의 근원은, 정확히 말해서 머셔너리 캐슬의 정원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 전 폭발 소리를 마지막으로 갑자기 잠잠해졌다. 더 이상 들썩거리지도 않고, 열기도 서서히 식어가는 느낌이다. 이어서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자욱한 연기 사이로 칠흑색 갑옷을 입은 청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청년은 잔뜩 그은 얼굴로 주변을 차분히 돌아봤다. 이어서 느릿하게 왼손을 들어 뒤집어 응시했다. 놀랍게도, 손등에는 검붉은 화살 한 대가 박혀 손바닥을 뚫고 나온 상태였다. 줄줄 흐르는 핏줄기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무심한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이었다.
“이 화살은…. 선유운입니까?”
청년, 아니 김수현이 왼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제야 상처를 봤는지 사방에서 놀란 탄성이 우수수 터졌다. 사제 로브를 입은 몇 명이 바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김수현은 손을 저어 물리치고는 보랏빛 활을 든 사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선유운은 예의 무뚝뚝한 얼굴이 아닌, 상당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정말 맞출 줄은 몰랐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낯빛이다. 김수현은 피식 웃으며 화살을 잡아 뺐다. 선유운이 정신을 차린 건, 김수현이 도로 던져준 화살이 핏방울을 뿌리며 완곡히 날아왔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사멸 무저갱 일 층을 완전하게 청소했다고 들었는데.”
“예? 예.”
선유운은 황급히 화살을 받으며 연달아 턱을 끄덕거렸다.
“솔직히 처음 도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면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정말 완벽한 노림수였습니다.”
“아, 아닙니다. 나름 봐주신 거 알고 있고, 어디까지나 동료들 덕분에….”
이번에는 빠르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횡설수설한다. 비록 한 발, 그것도 손등에 입힌 상처에 불과했지만, 선유운으로서는 김수현을 맞췄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질 정도로 말이다.
“흐음.”
김수현은 만족스러운 신음을 뱉고는 한 번 더 정원을 훑었다. 가볍게 손을 젓자 어디선가 날아온 검 두 자루가 허리춤에 척척 꼽혔다.
“다들 열심히 하는 것 같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본성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이내 김수현의 모습이 사라지자, 정원 곳곳에서 깊은 탄식이 흘렀다.
“푸부부부!”
땅바닥에 거꾸로 처박혀 있던 안현은 간신히 머리를 빼서 세게 흔들었다. 입안까지 침투한 흙을 퉤퉤 뱉다 보니 털썩 널브러진 진수현이 헤헤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웃어?”
“야, 방금 형님 얼굴 봤어?”
정원에 꽂혀 있던 안현으로서는 당연히 보지 못했다. 진수현은 그야말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더니 미친놈처럼 소리 죽여 킬킬거렸다.
“아깝다. 봤어야 했는데.”
“어떠셨는데?”
“완전 한 방 먹은 얼굴이었다니까? 드디어 우리가 공격에 성공했다는 거 아니겠느냐.”
“…….”
엄지로 어깨너머를 가리키는 곳에는 선유운이 김수현이 건네준 화살을 꼭 쥔 채 멍하니 서 있다. 진수현은 낄낄 웃으며 신 나게 말을 이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다 이 말이지.”
“글쎄다.”
진수현은 꼭 자신이 공격을 성공한 것처럼 거들먹거렸으나 안현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뭐? 왜? 좀 더 기뻐하라고. 이게 얼마만의 공격 성공….”
“주변 좀 둘러보지그래.”
안현이 핀잔 주듯이 말하자 진수현은 의아히 정원을 돌아봤다. 이윽고 눈이 서너 번 깜빡였을 때, 흥 오른 얼굴이 서서히 가라앉더니 어색해 하는 기색이 대신 자리 잡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방금 대련에는 선유운, 안현, 진수현 셋만 참여한 게 아니었다.
신재룡은 꽃밭에 대(大)자로 뻗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임한나는 커다란 나무의 나뭇가지에 걸려 절반으로 접혀 있다. 차희영은 복부를 부여잡은 채 웅크려 낑낑 울고 있었으며, 이유정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안솔과 제갈 해솔은 돛단배라도 되려는지, 서로 사이좋게 기절한 채 수로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중이었다.
풍덩!
“아, 진짜.”
아니, 제갈 해솔은 깨어 있었던 모양이다. 수로 가장자리를 간신히 붙잡고 올라오더니 김수현이 사라진 방향으로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이게 말이 돼? 저 인간 저거 사기라니까요?”
“클랜 로드야. 저거라고 하지 말라고.”
어디서 왔는지 절뚝거리며 나타난 이유정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정도 상당히 처참한 몰골이었다.
“아니, 어떻게 마법이 들어가는 족족 다 잘려 터져요? 내 마력 능력치가 몇인데!”
“…….”
“그리고 그 검들은 도대체 뭐예요? 하도 막히니까 일반적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무형무색무취무음 마법을 날렸는데, 어머나 씨발? 검 새끼가 스스로 요격을 하네? 요망하기도 해라. 뭐 이런 음경 같은 경우가 다 있어요?”
“…….”
분노에 찬 음성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제갈 해솔을 보며 안현은 남몰래 한숨을 흘렸다. 하지만 곧 싱겁게 웃고 말았다. 오늘이 제갈 해솔이 첫 번째로 공식 대련에 참가한 날이던가?
그러면 이해가 간다. 왜냐면 안현도 강철 산맥에서 김수현과 붙었을 때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니까.
*
“아야야야.”
물약을 들이붓자 정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손등이 따끔거린다. 아무래도 경매장에서 화살은 괜히 사다 준 듯싶다. 저주가 걸려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당해보니…. 아, 화정이 바로 치료해줬던가?
나는 시답잖게 웃으며 물약의 반은 골고루 펴 바르고, 남은 반을 단숨에 들이킨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라스로 나가보니 곳곳이 파헤쳐지고 부서진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뿌듯한 기분이다. 이제는 대련이 거의 공식 일정으로 자리 잡은 만큼, 클랜원들의 실력 향상이 눈에 보일 정도니까. 나를 계속 상대하다 보면 아마 어지간한 마족을 봐도 별로 놀라지 않을 테니까.
물론 나도 얻는 건 있다. 그러니까 일종의 수련이라고 해야 하나.
돌이켜보면 이 회차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생각보다 수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뭐 굳이 할 필요가 없기는 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검의 군주를 계승함으로써 얻은 능력은 확실히 좋으나 그만큼 고수준의 컨트롤을 요구한다. 능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에 불과하니, 하루빨리 내 것으로 만들어 익숙하게 사용해야 한다.
“음….”
그래도 정원을 보고 있자니 아주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예상하건대 아마 오 분 안에 조승우가 찾아오지 않을까. 당장 어제만 해도 이제 정원에서 대련은 제발 그만두라며, 복구에 얼마나 돈이 들어가는지 아느냐며, 차라리 연무장을 새로 만들자고 울고불고….
똑똑.
아, 벌써 찾아온 건가? 이건 조금 빠른데.
“들어오세요.”
만약 뭐라고 할 낌새가 보이면 손등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얼른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달칵 문이 열린 후 들어온 사용자는 조승우가 아니었다.
“김한별?”
“네, 네. 안녕하세요.”
김한별은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왜인지 쭈뼛쭈뼛 들어왔다. 품에는 양팔로 기록 더미를 꼭 품고 있다. 얘가 어쩐 일로 찾아온 거지?
“무슨 일이야?”
“보고 때문에….”
보고라. 사실 현시점에서는 썩 달갑잖은 방문이기는 했다. 막 대련을 마친 터라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는데, 얼른 씻고 싶었기 때문이다.
“혹시 급한 거?”
“네? 아 뭐…. 바쁘세요?”
“아니. 보다시피 땀을 많이 흘려서. 냄새가 좀 나거든.”
“아. 저, 저는 괜찮은데요.”
괜찮다고…?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김한별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다. 쌀쌀맞던 눈동자도 오늘따라 잔뜩 긴장한 것 같고, 자꾸 말을 더듬거나 흐리는 것이….
“죄송해요. 생각 없으시면 밤에 다시….”
그때 김한별이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하, 이제야 알겠다. 근래 내 일정이 상당히 살인적인 스케줄이라, 아마 잠깐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에 미안해하는 모양이다. 마음이 예쁘네.
“괜찮아. 필요한 보고니까 왔겠지. 그런데 왜 정하연이 안 오고?”
“많이 바쁘셔서요.”
“아 그래?”
“네. 그리고 이제 저도 슬슬 배울 때가 됐다고….”
그렇군. 나는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다. 하기야 요새 머셔너리 자체가 엄청나게 바쁘거니와, 현재 정하연 개인이 맡은 일만 해도 네 개가 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김한별은 마법사 클래스의 부단장을 맡고 있으니 보고하러 오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미소가 지어졌다.
“왜 웃으세요?”
“그냥. 기대돼서.”
“기, 기대요?”
“후후.”
그렇잖은가. 조금은 신선한 기분이다. 통과의례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던 병아리가, 이렇게 훌륭히(?) 커서 보고까지 하러 오다니. 심지어 격세지감마저 느껴졌다. 아마 김한별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좋아. 그럼 보고해봐.”
나는 의자에 한껏 몸을 묻으며 턱을 까닥였다.
“후유, 네.”
김한별은 숨을 들이켜며 자세를 고쳐 잡고는 조심스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냥 그 자리에서 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얘도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니까. 약간의 실수쯤은 너그러이 눈감자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가까워지는 김한별을 응시했다.
그러나.
“……?”
김한별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별안간 방향을 틀어 옆으로 돌아오더니, 느닷없이 허리를 굽혀 엎드렸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 책상 안으로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그럼….”
땀 젖은 바지가 살며시 끌러내러 가는 감촉이 느껴지는 동시,
“보, 보고 시작할게요.”
책상 아래서 김한별의 얼굴이 쏙 내밀어 졌다.
“…….”
…어?
============================ 작품 후기 ============================
휴, 간신히 올리고 가네요. 에피소드 7은 아마 다음 회로 끝날 것 같습니다. 김수현의 시점이 완전히 돌아오는 건 에피소드 4부터인데, 에피소드 6에서 5까지는 최대한 빠르게 빼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제 코멘트에 간략히 남겼는데, 제가 오늘 예비군 동원 훈련에 입소합니다. 2박 3일 입영 훈련이며 3월 31일(화요일)부터 4월 2일(목요일)까지 총 28시간을 받습니다. 아마 10시간, 10시간, 8시간 이렇게 받을 것 같은데, 퇴소하고 돌아오면 아마 밤 늦게 집에 들어올 것 같아요.
사실 어지간하면 이때 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병무청에 전화해보니 동원 훈련은 특별한 사유 없이 한 번만 불참해도 고발이라고 하더라고요. -_-a 벌금도 50정도 나온다고 해서 그냥 항복했습니다.(?)
뭐 독자 분들 중에서는 이미 끝난 분들도 계실 테고(개인적으로 무지무지 부럽습니다. ㅜ.ㅠ), 예비군이면 누구든 예외 없이 받는 거니 즐거운 마음으로 받고 오려고요. 또 올해로 4년 차가 끝나니, 이걸로 입영 훈련도 끝나는 셈이네요. 하하.
어쨌든 업데이트하고 2박 3일 동안 필요한 생필품을 챙겨야겠네요. 그럼 저는 4월 4일(토요일)에 에피소드 7 마지막 편을 들고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