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55
00854 Be Infected, Six. =========================================================================
붉은 빛깔 구름이 하늘을 가로지른다. 하루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듯, 도시 전역(全域)을 물들인 저녁놀은 푸른 궁전을 벌건빛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멜리너스 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나선 계단 아래에 위치한 대 도서관에도 불그스름한 빛깔이 깔렸다. 일과를 마친 후, 언제나처럼 한가로이 기록을 읽고 있던 멜리너스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머리를 들었다.
“들어오시게.”
그러자 뚜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노을이 그늘진 난간 아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계단을 내려온 훤칠한 청년이 공손히 허리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멜리너스의 눈동자에 놀라워하는 빛이 서렸다.
“허, 이게 누구 신가. 라이언 윈터스 경이 아닌가.”
“늦은 시간에 찾아와 미안합니다.”
정중한 목소리로 말한 라이언 윈터스라 불린 잘생긴 청년은, 특이하게도 머리카락이 백발이었다. 흰 눈을 연상케 하는 머릿결은 마치 사자 갈기처럼 내려와 목을 부드럽게 덮고 있다. 천천히 다가오는 윈터스를 보는 멜리너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별말씀을. 원탁의 기사 중 최고라는 사자의 기사가 찾아왔는데, 외려 몸 둘 바를 모르겠네.”
“하하. 그 호칭은 그만둬주시면 안 될까요.”
윈터스가 쓰게 웃자 멜리너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왜?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드는 칭호이네만.”
“워낙 낯간지러워서 말이죠. 그냥 윈터스로도 충분합니다.”
“싫다고 하면 어쩔 텐가?”
“그럼 저도 똑같이 하겠습니다. 멜리너스 님은 아마, 별을 추구하는….”
윈터스가 장난스레 말하자 멜리너스는 두 손을 번쩍 들어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두 사용자는 서로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윈터스는 상대가 손짓으로 권한 의자에 편안히 몸을 앉혔다. 멜리너스는 책상에 놓여 있던 기록을 덮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겐가?”
“이미 짐작하고 있으실 거로 생각합니다.”
“흠.” 짧은 숨을 내쉰 멜리너스의 얼굴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선 문답하는 취미는 없지만, 그래도 맞춰보도록 하지. 얼마 전 원정 때문인가?”
“그것도 그렇지만…. 엘도라가 요새 묘하게 기운이 없어 보이더군요.”
윈터스는 담담히 말했다.
“사실, 처음에는 저번 원정 때 칼집을 찾지 못해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고는 운을 떼듯이 스리슬쩍 말을 흐렸다. 멜리너스는 싱겁게 웃었다.
“아마 자네는, 내게서 그렇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 같은데.”
그러자 윈터스는 멋쩍은 표정을 보였다. 마치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멜리너스는 차분히 수염을 어루만지며 살짝 끄덕였다.
“뭐, 계속해보게.”
윈터스는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 땅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근래 분위기가 확실히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조금 침체했다고나 할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이상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달라요. 예전과는 무언가가 다릅니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거기까지 말한 윈터스는 문득 눈을 들어 상대를 응시했다.
“멜리너스도 그 여인은 보셨겠죠?”
“최근 원정에서 데려온 여인이라면, 봤네. 오늘도 보고 왔지.”
“어떻습니까?”
“글쎄.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던걸?”
윈터스는 그게 아니라는 듯 조용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바로 입을 열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제 말은.”
그러다 마침내, 윈터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 여인을 보고 있으면…. 까닭 없이 불안해지는 감정을 말하는 겁니다.”
*
어느새 황혼이 최고조로 붉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방 안에는 이상하다 생각될 정도의 냉기와 을씨년스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단순히 춥다고 느끼기보다는, 유독 이 방만 음침하고 스산한 분위기가 강하다.
엘도라는 조금 긴장한 낯으로 색색 숨소리가 흐르는 침대를 응시하고 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은 흰 이불이 가슴께까지 덮여 있었으나, 굴곡진 부분만 봐도 가녀린 체형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키는 150센티미터를 간신히 넘는 듯하나, 왜인지 어리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갸름한 턱선은 약간 야위어 보이나, 연약하다기보다는 바싹 메마른 느낌이다. 고운 눈썹과 가냘픈 어깨를 보고 있으면, 무언가 위험하면서도 야한 기분이 괜스레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즉, 이렇게 눈앞에서 보고 있어도 모든 것이 불분명하게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엘도라가 굳어 있는 건 겉으로 보이는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질감. 이것은 엘도라 자신도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요요한 빛이 흐르는 칠흑색 머리카락과 유령 같은 여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왜인지 인간처럼 느껴 지지가 않는다. 사람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혹시 인형이 아닐까 싶어 손을 대봐도, 따뜻한 체온을 확인하면 이율배반적인 기분만 강해진다.
모순된 감정이 시시각각 혼란스러움을 키우자, 엘도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고마워.’
그때 석문이 열리고 나서 들었던 첫마디. 라그나로크로 돌아오면서 그 이상의 말은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왜냐면 엘도라의 어깨에 쓰러지듯이 기댄 이후, 여인은 계속 잠들어 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말하면 원정은 성공도, 실패도 아니었다. 공략에는 성공했지만 바라던 칼집은커녕 얻은 성과는 전무하다. 그냥 헛수고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럼 그냥 그렇구나 넘기면 되는 것을, 이상하게도 엘도라는 그러지 못했다. 돌아오는 내내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고, 까닭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원인이라도 알면 속이 시원 하련만, 스스로 이유를 모르니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만 끙끙거릴 뿐. 게다가 이 모순에 기인한 불안감은 여인을 가까이서 볼 때마다 더욱 심해졌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그때였다.
“……?”
끼익, 문득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가 방 안의 고요를 살그머니 깨트렸다. 이어서 사뿐사뿐 걷는 기척은 엘도라의 바로 뒤에서 멈춰 섰다. 흘끗 뒤를 돌아본 엘도라는 조금 놀란 듯 황금빛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에르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바로 요정 에르윈이었다. 항상 나뭇잎으로 짠 옷을 걸치고 있는 건 똑같지만, 오늘은 어깨에 펑퍼짐한 가죽 가방과 등에 활을 메고 있다. 마치 금방이라도 긴 여행을 떠날 것 같은 차림새였다.
“떠나기 전 인사하려 했는데…. 여기 계셨군요.”
에르윈의 말에 엘도라는 속으로 아차 탄성을 질렀다.
“오늘 요정의 숲으로 돌아간다고….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네, 미안해요. 일족의 명운이 걸린 일이 생겨서. 제가 꼭 참석해야 할 것 같네요.”
“음. 그러고 보니 여왕 선출 건으로 한창 시끄럽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아요. 우리는 오랫동안 여왕이 없었으니까요. 이야기는 꽤 오래전부터 나왔지요.”
에르윈은 가볍게 수긍했으나 별로 기뻐하는 낯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낯 한구석에 미묘한 수심이 그늘져 있다. 그 기색을 알아챈 엘도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몇 년 전 여왕이 태어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그렇게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기억이 잘 안 난다는 듯 물어봤으나 엘도라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면 그날 에르윈으로서는 드물게도, 온종일 방방 뛰어다니며 기뻐하던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 죠.”
살짝 말을 끈 에르윈은 씁쓸히 미소 지었다.
“확실히 위그드라실의 꽃은 피었지만…. 그뿐이니까요.”
그러나 더 말하기 싫다는 듯 고개 돌려, 엘도라는 이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누구나 사정은 있는 법이니까.
“그렇군요. 그럼….”
이왕 다녀오는 거 편히 쉬고 오라는 말을 하려던 엘도라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슬을 머금은 풀처럼 싱그럽던 에르윈의 자태는, 예전과 비교하면 완연히 수척해져 병자와 흡사한 기색을 풍기고 있다. 요정의 숲에서 동료로 맞이한 이후, 오 년을 넘게 같이 활동하는 동안 항상 건강한 모습을 보였으니 향수병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갑작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확히 말해 최근 원정을 다녀온 직후 눈에 띄게 시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에는….
“…….”
무언가, 싫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사정은 모르지만, 요정 여왕 선출로 인해 걱정이 많구나, 결국 엘도라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엘도라?”
“아, 배웅해드리겠습니다.”
엘도라는 얼른 구변 좋게 말을 꺼냈다.
“네? 아, 아니. 괜찮아요. 혼자서 가는 게 편해요.”
“아니요. 당분간 보지 못할 텐데, 가면서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군요. 그러니 부디.”
연이은 청을 거절하지 못하겠는지, 에르윈은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달칵, 다시 한 번 문이 조심스레 닫히며 두 여인이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잦아들었다.
그렇게 엘도라와 에르윈이 사라진 공간에는 오직 여인만이 누워 있을 뿐.
방은 다시금 끝없는 고요로 침잠했다.
*
이안은 서고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록 더미를 바라봤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주변도 어두컴컴했으나, 이안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하나하나 기록을 뒤져나갔다.
그러기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록을 훑고 다시 꽂기를 반복하던 이안은, 느닷없이 손에 든 기록을 내팽개치며 서재를 주먹으로 강하게 쳤다.
쿵!
“젠장, 전부 쓸모 없는 기록들이군.”
아마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이라도 봤다면 크게 놀랐을 광경이었다. 왜냐면 이안이 얼마나 이 세상의 기록을 아끼고 좋아하는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라그나로크를 발견했을 때 장비나 영약보다는 새로운 기록을 읽을 수 있다고 좋아하던 사용자가 바로 이안이었다. 업무가 끝나면 언제나 대 도서관을 찾아 늦은 시간까지 기록에 파묻혀 지낸다.
애초 비전투 사용자 신분으로 원탁의 기사단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선지자 멜리너스가 한 수 접고 들어갈 만큼 방대한 고대 지식을 지녔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만큼, 방금 보였던 모습은 확실히 어색하고 느껴질 법한 행동이었다.
“도대체 누구를 깨운 거지? 왜 깨어나지를 않는 거지?”
몹시 초조한 듯 입을 질근질근 씹더니 갑자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안의 발길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여인이 잠든 침실이었다.
방을 지키고 있던 고용인에게 잠시 쉬라는 말로 내보낸 후, 이안은 침대에 딱 붙어서 여인을 내려다봤다. 아직 딱히 깨어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여인을 내려다보다가, 돌연 갑갑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회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은 이렇다 할 표정 없이, 시종일관 눈을 감은 채 고른 숨만 내쉬는 중이었다.
그런 여인을 바라보는 이안의 얼굴도 엘도라처럼 뜻 모를 후회나 자책감을 띠고 있다. 물론, 그 감정에 담긴 의미는 오직 본인만이 알고 있겠지만.
이안은 한동안 여인의 몸을 살피거나 손대는 등 유심히 관찰했지만, 그런다고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턱이 없다. 결국에는 깊은 한숨과 함께 황급히 몸을 돌리고 말았다.
“안 되겠어. 일단 벨…. 리너스 님에게.”
이안은 말을 살짝 더듬으며 조심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좌우를 한 번씩 둘러본 후, 바로 방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그 말은.”
문득, 조용하면서 깨끗한 미성이 나가려는 이안의 옷깃을 붙잡았다.
“!”
그 순간, 이안의 몸은 건전지가 떨어진 로봇처럼 한순간 정지했다. 깜짝 놀라 방을 돌아봤으나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여인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있다.
단 하나 변한 게 있다면,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다는 것.
“이 몸을 차지한 게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건가?”
작고 예쁜 입술이 열리는 걸 똑똑히 확인한 순간, 이안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지고 입은 쩍 벌어졌다. 그러나 곧 힘껏 숨을 삼키고는 조용히 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마침내 눈을 뜬 여인이 선연한 검정 눈동자로 이안을 또렷이 응시했다.
잠시 후.
“그리고 벨리너스가 아니라 멜리너스겠지. 벨리알과 혼동한 것 같지만, 꽤 괜찮은 임기응변이었어.”
이어지는 말을 들은 찰나, 이안이 갑작스레 주저앉아 무릎 꿇었다.
“아….”
떨리는 눈동자로, 떨리는 입으로.
그러나 환희가 깃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사탄?”
============================ 작품 후기 ============================
사탄 : 자, 이제 나를 TS한 이유를 말해봐.
로유진 : ㅎ.
*
…아, 죄송합니다.
며칠간 22시에 자 버릇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깜빡 졸았습니다.
일어나서 새벽 두 시인걸 보고 멘붕을…. ^^;
이전 회에서 봉인이 너무 쉽게 풀린 거 아니냐고 질문하신 독자 분들이 몇 분 계셨습니다.
현시점에서는 당연한 의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건 에피소드 2까지 가야 완전히 풀리는 부분이니, 그때 본문에서 해답을 드러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자서 간신히 맞춘 신체 리듬을 유지해야겠네요.
독자 분들도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PS. 에피소드 6,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에피소드 뒤 숫자는 일부러 역순으로 가는 중입니다. 말인즉 에피소드 0(Zero)이 메모라이즈가 완결되는 에피소드라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