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56
00855 Be Infected, Six. =========================================================================
멜리너스가 여인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건, 상담을 끝내고 윈터스를 돌려보낸 직후였다. 이안의 개인 연락을 받고 나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은밀히 방으로 향한 멜리너스는, 곧 의자에 앉은 이안과 침대에 등을 기대 누운 여인을 볼 수 있었다.
“호, 벨리알…. 아니. 여기서는 멜리너스인가.”
“…사탄.”
문을 열자마자 소슬한 어투가 멜리너스를 맞이했다. 들리는 목소리는 여성 특유의 앳되고 고운 음성이었지만, 진명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앞의 여인이 사탄임은 부인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여인의 몸속에 들어앉은 영혼이.
“깨어나셨군요.”
멜리너스는 한층 소리를 낮추며, 그러나 기쁨과 안도가 섞인 얼굴로 씨앗의 각성을 축하했다. 여인은 천천히 방을 돌아보더니, 돌연 목을 좌우로 꺾거나 손을 움켰다가 펴는 등의 행동을 했다. 왜인지 그러는 행동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무언가 느낀 걸까. 멜리너스가 완곡히 돌린 말로 물었다.
“글쎄. 어때 보이나?”
그러자 여인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는 스리슬쩍 눈짓했다. 비록 안은 대 악마의 수장이라고 하나, 겉 생김새가 워낙 미인이라서 그런지 무척 귀여워 보였다. 물론, 이안과 멜리너스는 엄청나게 어색해 했지만 서도.
“모, 모르겠습니다. 단,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와 사브나크가 간신히….”
“그랬더군. 상당히 힘들었겠어.”
“확실히 신화시대의 봉인이라 만만치는 않더군요. 그래도 주변을 지키던 수호자나 외부에 걸려 있던 봉인은 어찌어찌 처리했습니다만, 그 이상은….”
“흠.”
멜리너스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치를 살폈다.
“그렇군. 그나저나 사브나크는 어떻지?”
그러나 다음 순간, 살며시 입을 짓씹었다. 여인이 은근히 화제를 돌리려는 낌새를 느낀 것이다. 왜 몸 상태를 명확히 말해주지 않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불 보듯 뻔하다. 사정은 잘 모르지만, 아마 사탄의 씨앗이 발아하는 과정에서 모종의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감히 물어볼 생각은 못 한 채, 멜리너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브나크의 씨앗은 정상적으로 발아했습니다. 현재 올리비아란 이름의, 엘핀 클랜의 로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여인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네 번째로 가능성이 낮을 거로 생각했는데, 용케 성공했군. 잘 됐어. 가프는 잘하고 있나?”
“가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사히 성공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마 지금쯤 서 대륙에 남아 있는 세력을 규합하는데 한창 힘을 쏟고 있을 겁니다.”
“포르세우스는?”
“포르세우스는…. 처음에는 예상외로 진행이 굉장히 더뎠으나, 타나토스의 봉인을 해제했을 때 흘러나온 연기의 영향을 확실히 받았습니다. 일단은 에르윈의 심장에 자리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직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초반과 비교하면 나름 순조롭습니다.”
멜리너스의 설명이 끝나자 여인의 코에서 긴 숨이 흘러나왔다.
“사브나크, 가프, 포르세우스…. 그렇다는 말이지. 좋아. 그럼 너희는 어땠지?”
그동안 봉인지에 갇혀 있던 만큼, 사탄으로서는 계획이 잘 진행되는 중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단 세 악마 군주가 무사하고, 큰 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는 소식에 안도했는지 조금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안이 씩 웃으며 손을 들었다.
“저는 별로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럴 테지. 아무리 성향이 선하다고 해도, 사용자가 지녀야 할 능력이 부족할수록 발아가 쉬워지지 않나.”
“그런 주제에 여기에서 입지는 나름 괜찮더군요. 워낙 이것저것 아는 걸 좋아하다 보니, 가끔 북 대륙 정보를 흘려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을 모두 고려해서 선정했으니까. 멜리너스는? 꽤 어려웠을 것 같은데.”
여인이 고개를 돌리자 멜리너스가 쓰게 미소 짓는다.
“거의 실패할 뻔했습니다.”
“…뭐라고?”
그 순간 여인의 두 눈이 의아히 치떠졌다.
사탄이 구상한 대계(大計)의 첫걸음은 사탄 자신과 휘하의 다섯 악마 군주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남 대륙 사용자에 원활히 발아하는 것. 그리고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탄이 봉인된 타나토스에 무사히 자리 잡는 것과, 엘도라와 멜리너스 중 최소한 한 명이라도 완전히 차지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그냥 도박이라손 쳐도, 후자는 무조건 이루어야 하는 터라 사탄으로서도 고민이 많았다. 결국, 여러 신물로 보호받는 엘도라보다는 멜리너스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타깃으로 잡았고,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만큼 악마 14 군주 중 하나인 벨리알을 씨앗으로 사용했다.
어쨌든 일개 인간에 불과한 존재이니 설마 실패하랴 싶었는데, 거의 그르치기 직전까지 갔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실패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진정으로 위험했지요. 인간, 그것도 노인치고는 정신력이 대단히 강했거든요. …하지만.”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일그러진 부분이 있었지요. 후후.”
“…….”
멜리너스는 돌연히 킬킬거리며 입김을 뿜었다. 평소 현자와 같은 이미지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몹시 야비하고 비열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이 인간, 엘도라한테 욕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호?”
“솔직히 좀 웃겼습니다. 거의 딸처럼 키워왔는데, 극히 추악하고 변태적인 상상을 품고 있더군요. 느낀 제가 놀랄 정도로 말입니다. 물론 덕분에 간신히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만.”
“그런가. 사실 별로 놀랄 것도 없지.”
여인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선지자다, 현자다 추켜세워도 결국에는 이 세상의 거주민이 아니거든. 원래 세상에서는 어떤 인간이었을지 궁금하군.”
그렇게 말한 여인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과정이야 어떻게 됐든, 일단 계획의 첫걸음은 성공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아직 첫발에 불과하며, 남은 길은 구만 리 장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예언의 반전을 위해 타나토스의 발아 시도라는 하이 리스크를 감수했지만, 전황이 지극히 불리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시간이 문제였다.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여인은 문득 이안을 응시했다.
“아몬, 아니 이안. 현재 북 대륙의 상황은 어떻지?”
“으음. 그게….”
이안은 말하기 좀 그렇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여인의 지긋한 눈초리에 조용히 말을 이었다.
“…상황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사탄께서 원하시는 안주라는 건, 놈들의 머릿속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고?”
“예. 북 대륙 전체의 활동이 갑작스레 갑절은 활발해진 것이…. 아마 본격적인 힘 모으기에 들어갔다는 생각이….”
“…….”
이안이 말을 채 잇지 못하자, 여인의 낯빛도 조금은 어두워졌다.
몇 번을 강조하지만, 현재 악마 진영에 절실히 필요한 건 첫째도 시간이요, 둘째도 시간이다. 계획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소요소가 뚝딱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만한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해서 그렇다.
그래서 혹시 당분간 아틀란타에 안주하지는 않을까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외려 그 반대의 상황이란다. 이렇게 되면 영원한 소멸을 각오하고 나온 것도 도로아미타불이 돼 버린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멜리너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찌 보면 현재 악마 진영이 직면한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나온 것까지는 좋다. 화정과 겁화에 대항할 힘까지는 손에 넣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정해야겠지.”
여인이 침대 시트를 걷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담하면서 눈부실 만큼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으나, 멜리너스와 이안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그 때문이 아니리라. 하지만 무어라 말하기도 전, 여인이 비로소 침대에서 걸어 나온다.
“인간을 대리인으로 내세운다…. 그래, 천사 쪽이 옳았어.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가브리엘의 선택이 옳았던…?”
“사, 사탄!”
그때였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멜리너스는 호칭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사탄이 돌연 춤추듯 두어 번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곧바로 다가가 앉은 멜리너스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몸을 둥글게 웅크린 여인의 왼팔이 사시나무 떨듯 마구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괘, 괜찮으십니까?”
멜리너스가 황급히 묻자,
“빌어먹을….”
여인은 아미를 찡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오른손을 왼팔에 대고 지그시 누르자, 이내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걸 보는 멜리너스의 미간도 사정없이 좁혀졌다. 아까 느꼈던 모종의 불안감이 한층 강해졌다.
“역시 실패한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여인은 그건 아니라는 듯,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럼…?”
“깨어 있더군.”
“…예?”
“타나토스 말이야. 육체는 봉인된 상태였지만, 정신은 어느 정도 각성한 상황이었어. 설마 그렇게 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여인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키고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부족해. 지금 바로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하겠다.”
*
어두운 밤.
‘화정.’
나는 테라스 밖에 서서 속으로 말을 걸었다.
“자, 그럼 연다?”
“야, 야! 진수현! 잠깐만, 잠깐만 멈춰봐. 이번에는 내가 열면 안 돼?”
“뭔 이번에야? 방금 열었으면서.”
“맞아요. 일단 유정이 언니는 빠지고, 오빠. 그냥 제가 열게요. 어때요?”
“너도 안 돼. 형님이 너는 절대로 열지 말라고 했잖아. 잊었어?”
“히잉….”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난간 아래 정원은 무척 시끄러웠다. 한 소리 듣고 시무룩이 물러나는 안솔과, ‘괴물 소환 상자 4’ 하나를 두고 이유정과 진수현이 옥신각신 싸우고 있다. 어디서 샀는지 말해달라고 하도 조르길래 알려줬는데, 설마 저렇게 바로 사올 줄은 몰랐다.
뭐, 개인의 GP를 어디다 쓰는지 알 바는 아니니 큰 상관은 없고, 전투 경험을 쌓거나 운이 좋으면 괜찮은 장비를 얻을 수도 있으니 결국 허락해주기는 했다.
하지만 조건을 하나 걸었다.
바로 절대로 안솔은 상자를 개봉하지 말라는 것. 왜냐면 저번처럼 고대 악신을 깨우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그리고….
– 왜?
문득, 약간 늦은 화정의 회답이 머릿속을 울렸다. 원래는 잠이 안 와 심심해서 말을 걸었는데, 상자를 보니 마침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다.
‘저번에 그…. 누구였더라? 도리토스의 꽃?’
– 푸. 타나토스의 꽃이겠지.
‘아, 그렇지. 타나토스의 꽃. 아무튼, 걔가 너나 게헨나와 동급이라고 했었지?’
– 응. 그런데 걔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
갑자기 화정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계속 생각을 이었다.
‘다른 건 아니고. 저번에 안솔이 걔를 소환할 뻔했잖아?’
– 젠장, 그 얘기는 꺼내지도 마.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니까. 진짜, 바로 닫아서 다행이었지.
‘혹시 봉인이 풀릴 가능성은 없나?’
– …나는 또, 뭔 말을 하나 했더니. 그건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하지만 고대 악신이 깨어난 경우처럼….’
– 그건 인간이 봉인한 거였잖아. 애초 필멸자가 불멸자를 영원히 봉인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하지만 타나토스는 상황이 달라. 신들의 전쟁인 라그나로크에서 패배한 만큼, 봉인 과정에 여러 신이 직접 참여했다고. 즉 영구적으로 봉인했다는 소리지.
라그나로크?
무언가 낯설지 않은 단어가 나왔지만, 일단 질문을 잇기로 했다.
‘하지만 저번에 그랬잖아. 스스로 풀고 나오기는 어렵지만, 외부 간섭이 있다면 봉인을 푸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라고.’
– …….
이 말에는 화정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조금은 진지해진 음성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 그러네. 확실히 불가능하지는 않지.
‘어떻게?’
– 너.
‘나?’
– 응. 정확히는 나를 품은 너. 그리고 게헨나의 겁화 역시 봉인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을 테고, 그리고 마지막은 쟤.
‘응?’
순간 ‘쟤’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궁금했지만, 곧 안솔을 가리켜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안솔이?’
– 뭘 놀래? 저번에 한 번 풀릴 뻔했잖아. 직접 눈앞에서 봤으면서.
으음. 그런가?
하기야 어느 능력치든 101포인트만 돼도 인간을 초월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그런데 안솔의 행운은 무려 105나 되지 않는가. 실제로 게헨나를 소환한 전력(前歷)도 있고. 103부터는 나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니, 안솔이라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나 안솔이나 타나토스의 봉인을 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왜인지 근래 기분이 찜찜해서 말이지.
‘그래도 너무 자신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타나토스의 봉인이 풀릴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만에 하나의 경우라도 말이야.’
– 아이고, 그래. 만에, 억에, 조에, 경에 하나 정도는 경우의 수가 있을 수도 있겠지. 실제로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봉인 해제 과정서 내가 특정한 경우를 포함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풀려봤자 일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그러니까 신을 봉인할 때는 서로 격이 맞는…. 에이 씨, 이건 좀 설명하기 복잡한데. 어쨌든!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냥 기우라고. 설마 봉인이 해제되고 타나토스가 풀렸으니 세상이 멸망한다, 이따위 생각은 집어치워. 신들이 그렇게 허투루 일을 처리한 줄 알아?
화정의 핀잔 어린 어조에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고, 저거나 잘 감시해. 혹시 저번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진짜 네 생각대로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 그래.’
화정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으로 다시 테라스 너머를 응시했다.
그러나.
“뭐….”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웃음이 싹 달아났다.
망을 보고 있었는지, 나와 눈을 마주치자 당황해 하는 진수현.
한껏 긴장한 얼굴로 무언가를 주시하며, 목울대를 꼴깍꼴깍 움직이는 이유정.
그리고 테라스를 흘끗거리며 상자를 향해 살그머니 손을 뻗는 안솔을 확인한 순간.
나는,
“안소오오오오오올!”
목청껏 소리 질렀다.
============================ 작품 후기 ============================
사탄 : 시간이…. 시간이 없다! 어서, 어서 계획을…!
안솔 : 이얍! 상자 개봉!
웅웅웅웅!
사탄 : 자, 다음 계획은…. 응? 이건 또 무슨 마법 진이지?
우우우웅!
System Message : 타나토스의 꽃(사탄)이 머셔너리 캐슬로 소환되었습니다.
사탄 :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