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61
00860 Be Infected, Six. =========================================================================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왜,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異) 세계 인간들을 소환한 걸까….”
그게 뭐냐고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 타나토스의 말이 이어졌다.
“아시다시피 저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고, 그런 만큼 천사의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몰라요. 하지만 이안이라는 인간이 현재 대륙의 역사를 꽤 상세히 말해주더군요.”
“이안이….”
“그 결과 가능성 높은 추측을 할 수 있었죠.”
“그 추측이라는 게 방금 말한 제로 코드라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그래요.”
“그게 도대체 뭐길래?”
엘도라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반문했다.
“탄생 비화부터 풀어서 설명하면 며칠 밤낮을 새도 부족할 거예요.”
타나토스는 여전히 아름다운, 그러나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단순히 말하면 만능의 힘이 담긴 물건이라고 볼 수 있지만…. 현 상황에 맞춰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천사 입장에서는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 그러나 적대 세력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것.”
만능의 힘, 무조건 지켜야 하는, 꼭 필요한….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으나 의구심은 한층 깊어져만 갔다. 마치 밖으로 나가려 길을 찾는데, 외려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를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거였다면 애초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이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닌가. 여태껏 그래 왔듯 ‘그렇구나.’ 하고 물 흐르듯이 넘어가는 건 사양이다. 엘도라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왜 천사는 그 제로 코드란 걸 지켜야 하며, 적대 세력은 필요하다는 겁니까?”
“간단해요. 제로 코드는 만능의 힘이 담긴 물건이라고 말했잖아요?”
턱을 까닥인 타나토스가 평온히 말을 잇는다.
“이 만능이라는 단어를 구분해보면, 제로 코드에는 일종의 열쇠 역할이 포함돼 있어요.”
“열쇠?”
“그래요. 열쇠. 엘도라 당신에게도 돌아갈 고향은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엘도라는 자신도 모르게 뒤늦게 반응했다. 왜인지 ‘돌아갈 고향’이라는 말이 가슴을 살짝 건드렸다.
“어느 존재든 고향은 있죠. 이건 저도, 천사도 마찬가지예요. 이 홀 플레인이 아닌, 훨씬 높은 차원에 실재해요. 가령 천사의 경우 천계라고 부를 수 있겠네요. 인간들의 언어로.”
타나토스의 어조는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을 차근차근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시종일관 차분했지만,
“바로 이 천계에 한해서 제로 코드가 열쇠 역할을 한다는 거죠. 적대 세력을 침공할 수 있게 하는, 말인즉 천계를 보호하는 자물쇠를 해제할 수 있는 열쇠.”
여기까지 말한 순간 돌연 상대를 빤히 직시했다. 이제 결론을 내리겠다는 듯이.
아니. 이미 본론은 나왔다.
“천사로서는 어떻게든 지켜야 할 고향을 수호해주는 장치. 그러나 반대 세력은 반드시 획득해야 할 천계로 통하는 열쇠. 이게 바로 홀 플레인 각축전의 중심인 제로 코드의 현주소라는 거죠. 이제 좀 이해가 되나요?”
엘도라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득하기만 하던 머릿속이 차차 정리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응시하는 눈길에 타나토스는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살짝 코웃음 쳤다.
“그러니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어느 순간 미세하게나마 덜덜거리고 있었다.
“그 엄청난 물건이 이 홀 플레인에 실재하고.”
“…우리는, 천사와 적대 세력 전투의 연장 선상에 서 있다는 겁니까? 그 제로 코드라는 물건 때문에?”
말은 끊겼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타나토스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엘도라 자신은 모르겠지만, 어느새 눈꼬리는 파르르 떨리고, 허벅지에 얹은 주먹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만큼 세게 움켜져 있다. 머릿속을 부유하던 퍼즐 조각이 하나로 맞춰진 순간 가슴이 들끓기 시작했다.
문득 육 년 전 기억이 뇌리를 무작위로 스쳤다.
눈을 뜨고 일어나니 이상한 공간에 널브러져 있던 기억.
잘못했다고, 돌려보내 달라고 애걸했지만, 강제로 통과의례로 내쫓겼던 기억.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같이 소환됐던 친구의 끔찍한 살해 광경.
무엇보다 필사적으로 울부짖는 자신을, 흡사 실험용 생쥐를 보듯 차갑게 응시하던 천사의 눈초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불현듯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분노가 꿈틀꿈틀 치솟는다.
“어째서?”
비로소 토해진 당연한, 그러나 의도된 의문.
“저도 그게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타나토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차라리 이 세상 거주민이라면 모를까. 왜 아무 관련도 없는 이방인까지 끌어들이면서….”
“아무튼, 글쎄요. 이것 또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아마 천사 진영이 극도로 불리한 게 아닐까 싶은데.”
타나토스의 말은 지극히 간단했다. 홀 플레인에는 제로 코드라는 적대 세력에서 군침을 흘리는 물건이 있다. 여기서 천사는 제로 코드를, 자신들의 고향인 천계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인간을 소환했다. 즉 사용자는 천사를 위해 간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는 일종의 대리 역할을 수행 중이다.
여기까지 깨달은 엘도라는 느닷없이 힘껏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러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자 용암처럼 들끓던 속이 서서히 식는다.
‘믿을 건 우리, 인간뿐입니다.’
폭발 직전 스친 멜리너스의 조언은 한 가닥 이성을 되찾게 했다.
‘그래.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원하던 정보는 얻었다. 이제는 천사 쪽의 입장도 확인해봐야 한다. 판단은 그 다음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인간이 한다.
그렇게 생각한 엘도라는 돌연 떨떠름한 낯빛을 비췄다. 어느새 고개 돌린 타나토스는 방문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이내 의아히 눈을 돌린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이야기 중에 죄송합니다. 전령입니다. 클랜 로드.”
문밖의 사내는 정중히 몸을 숙인 후, 바로 용건을 꺼냈다.
“천사의 호출입니다.”
*
찬란한 푸른 궁전에도 황혼빛 노을이 드리우더니 완연한 어둠이 찾아왔다. 이내 인근을 밝히던 불빛이 촛불 꺼트리듯 사라지고, 창가에는 푸른 달빛이 내려앉았을 때. 밤 풍경을 구경하는 걸까. 타나토스는 홀로 침대에 누워 창밖의 달을 흘기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흡사 죽은 사람처럼 한동안 바라보기만 하던 타나토스는, 문득 입꼬리를 올렸다.
“어째서라고….”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
그러나 업신여기는 듯한 웃음은 곧 사라졌다.
오늘 엘도라와의 만남은 충분한 소득이 있었다. 천사에 대한 불신의 씨앗을 확실히 뿌렸으니까.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하지만 아직이다. 계획은 예상보다 순항하고 있지만 이제 겨우 한 걸음 내디딘 것에 불과했다. 씨앗을 뿌린 것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 물과 양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문제는 씨앗이 발아하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은 여전히 딜레마에 빠져 있다. 엘도라가 호출된 것만으로도 불안해지는데, 열매를 기다리며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하라면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위험이 너무 크다. 서 대륙 때처럼 완벽하게 잠식하고 뜻대로 조종하는 상황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설령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속전속결로 몰아쳐야 한다. 결국, 필연적으로 발생할 혼란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까닥 잘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터.
결국에는 시간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쉰 타나토스는 갑자기 고요히 입을 열었다.
“멜리너스인가.”
“타나토스.”
갑작스러운 부름에 방구석 어둠에서 낮은 음성이 응답한다.
“죄송합니다. 깊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엘도라는 어떻게 됐지?”
“아, 큰일은 아니더군요. 그냥 안부 겸 호출한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저와 이안을 언급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타나토스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말투에서 낌새를 느꼈는지 멜리너스는 얼른 말을 이었다.
“이것도 큰일은 아닙니다. 저희 말고도 언급된 인간이 여럿 있으니까요. 아마 요즘 호출에 응하지 않아 엘도라를 통해 말을 전달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렇게 말한 타나토스는 느릿하게 멜리너스를 돌아봤다.
“아무튼, 알맞게 잘 왔군. 마침 일정을 변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예?”
“세 번째 계획을 앞으로 끌어당길 필요가 있겠어.”
“세 번째 계획이라면, 동 대륙 정…?”
거기까지 말한 찰나, 멜리너스는 황급히 말을 멈췄다. 사탄이 갑작스레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문밖으로 복도를 소리 죽여 걷는 기척이 잡혔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
이윽고 기척은 정확히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한참 동안 인근을 서성거리다가, 걸어온 방향으로 살금살금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약 십 분이 흘렀을 무렵.
“멜리너스. 이안, 올리비아에게 전하도록.”
어둠 속에 파묻힌 타나토스가 한층 낮춘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디데이에 맞춰, …을 시작하겠다고.”
============================ 작품 후기 ============================
심사 숙고해서 검토한 결과, 에피소드 6은 이번 회로 매듭짓기로 했습니다.
원래는 두 내용 정도 추가로 들어갈 분량이 있기는 했어요.
하지만 하루 동안 노트를 정리한 결과, 하나는 가지를 쳐낸 에피소드 5로 들어갈 여지가 보였고, 나머지 하나는 이후 에피소드에 끼워 넣어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에피소드 6은 이걸로 끝입니다.
다음 회부터는 남 대륙 + 악마 시점 진행의 마지막인 에피소드 5가 시작됩니다.
주인공의 시점은 에피소드 4부터 돌아옵니다.
독자 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