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60
00859 Be Infected, Six. =========================================================================
“제 짧은 소견으로는, 타나토스 님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아키로프가 날카롭게 반문했다. 이안은 어설프게 웃었다.
“에, 일단은 신이니까요. 진실의 수정도 그렇다고 했고….”
“아니. 어떻게 부르는지 내 알 바는 아니고. 너는 그 말을 믿는다는 건가?”
“백 퍼센트 신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천사의 의도가 명백하지 않은 이상, 한 번쯤 생각해볼 여지는 있지 않겠습니까? 뭐, 나는 이대로 꼭두각시처럼 살아도 상관없다, 이런 입장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
이안이 조목조목 설명하자, 아키로프는 복잡한 얼굴로 침묵했다. 그러자 두 명을 번갈아 보던 나탈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렇다고 쳐. 하지만 이제 와서 천사가 속 시원하게 말해줄까?”
“없겠죠. 아마 직접 따져도 두리뭉실하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직접 알아내야 합니다. 그 여인에게 듣든지, 아니면 추측을 하든지 해서요.”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으음. 실은….”
문득 품으로 손을 넣은 이안은 꽤 커다란 지도를 꺼내 책상에 펼쳐놓았다. 시선은 자연스레 탁상으로 쏠렸다.
“대륙 지도입니다. 물론 제멋대로 상상해서 그린 거니 정확성을 기대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말한 이안은 차분히 지도의 하단을 짚었다.
“이곳이 바로 남 대륙. 즉 우리가 처음 시작한 지점입니다.”
그리고 검지를 천천히 위로 올리며 말을 잇는다.
“여기서 오크 성을 넘어 북진한 결과, 현재 우리가 있는 라그나로크를 발견했지요. 북 대륙은 강철 산맥을 남진해 아틀란타에 이르렀고요. …물론, 타 대륙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가령 동 대륙은 서진 시 불모의 황야가, 서 대륙은 동진 시 서리 협곡이 가로막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건 우리도 알아. 저번에 한 번 말한 거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럼,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응? 이후?”
“생각해보세요. 지금이야 갓 발견했으니 활동할 거리가 차고 넘치지만, 라그나로크도 언젠가는 포화 상태에 이를 겁니다. 그럼 그때가 오면, 또 신 대륙을 발견해야 한다는 소린데….”
“……?”
스리슬쩍 말을 흐린 이안은 돌연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검지는 지도의 중심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이윽고 멍하니 지도를 바라보던 원탁의 기사 중 서너 명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머리 회전이 빠른 이들은, 이안이 하고자 하는 말을 비로소 알아챘다.
“설마.”
“그렇습니다.”
이안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동 대륙의 서진, 서 대륙의 동진, 남 대륙의 북진, 북 대륙의 남진…. 물론 아직 공략에 성공한 대륙은 우리와 북 대륙, 이 두 지역뿐이죠.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겁니다. 즉 중앙으로 말이지요.”
“잠깐, 잠깐만.”
그때 흰 백발의 미남자, 라이언 윈터스가 당황한 듯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다음 신 대륙은 동서남북 이 네 대륙이 둘러싸고 경쟁한다는 건가?”
“그렇지요. 뭐, 현실적으로는 우리와 북 대륙의 겨룸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요.”
“이안, 너무 앞서 나가는 거 아니야? 아직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잖아. 가령 서로 협력해서 공략하는 방향일 수도….”
“이런, 이런.”
이안은 지도를 짚던 검지를 위로 세우더니 까닥까닥 흔들었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상황을 굉장히 낙관적으로 보시는 겁니다.”
윈터스는 어색한 낯빛을 비췄다. 소슬히 웃는 이안의 얼굴이 괜스레 거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서로 협력하는 방향이었다면, 이미 조금이나마 언질을 줬겠지요.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북 대륙에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정하지 않았을까요?”
“북 대륙? 전쟁? …아.”
의아히 반문하던 윈터스는 순간 탄식과 같은 침음을 흘렸다. 이년 전, 서 대륙이 북 대륙을 침략한 사건을 떠올린 것이다. 실상은 악마 세력이 씨앗을 이용해 조종한 것이지만, 풍파에서 비켜서 있던 남 대륙은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떻게 말의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헛소리라 치부하고 싶어도 반박할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외려 생각의 추가 점차 한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럼, 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 전쟁이라는 건가.”
침묵을 깨트린 건, 에드워드의 무거운 음성이었다.
“하하.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건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 벌써 사실로 받아들이시면 곤란한데요.”
문득 표정을 푼 이안이 사람 좋게 웃으며 지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조금 엇나갔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 여인이에요. 아, 타나토스 님이요.”
“중요하다고?”
“예. 현재 거주민들은, 계시라는 이름 아래 우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달라요. 믿을 수 없지만, 신이라는 지위를 가졌으며 천사의 통제도 벗어나 있지요. 어쩌면 앞으로 닥쳐올 폭풍에 앞서, 우리는 막강한 무기를 쥐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천사조차 뛰어넘는….”
“이거, 엘도라한테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무언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나탈리가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안은 느긋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거라면, 멜리너스 님도 알고 계실 테니까요. 아마 지금쯤 비슷한 이야기 중일 겁니다.”
그렇게 말한 이안은 차곡차곡 접은 지도를 품으로 넣으며 싱긋 미소 지었다.
“우선은, 두 분의 행동을 기다려보죠.”
*
엘도라는 숙소 침대에 누워 하염없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 얼굴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실제로 엘도라의 머릿속은 여러 생각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여인이 깨어난 지 며칠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타나토스가 보인 행동은 주로 멜리너스, 이안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며 밖으로 외출한 일 등, 지극히 정상으로 볼 수 있는 범주였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럼 걱정을 덜었으니 이제 여인의 처우를 결정해야 정상이건만, 현재 엘도라의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타나토스가 신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자신의 눈앞에 놓인 의제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의문이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온 것도 있지만.
물론, 이 복잡한 상황을 간단하게 만드는 방법은 있다. 천사가 생각나지 않은 건 아니다. 상황의 특수성만 아니었다면, 남 대륙의 수호자라는 신분을 가진 만큼 사용자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 곧바로 신전으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을 터. 그리고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하라는 대로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천사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군요. 과거에도 그랬듯이.’
‘그래서 안타깝다는 거예요. 목적과 의도를 모른다면 결국 이용당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마냥 그렇게 하기에는, 타나토스가 흘리듯이 한 말이 마음에 걸린다.
비단 이뿐만은 아니었다. 멜리너스와의 대화도 엘도라가 주저하게 하는데 한몫했다.
‘그럼 멜리너스는, 그 여인의 말을 믿는다는 겁니까?’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스스로 신이라고 밝혔으나, 결과적으로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천사 또한 믿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도우미를 자처하고 있으나, 그 속내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
‘클랜 로드. 믿을 건 자신, 그리고 우리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유념하십시오.’
그래. 믿을 건 우리, 즉 인간뿐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다. 결국,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정보였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그렇게 생각한 엘도라는 바로 몸을 일으켜 호출석을 눌렀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흰 로브를 걸친 노인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멜리너스. 그 여인과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마음의 결정이 서신 겝니까.”
온화한 물음에, 엘도라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단지, 이대로 그냥 편하게 넘어갈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
“이안이 그러더군요. 어쩌면, 잘만 이용하면 이번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기회라 함은?”
“진상을 밝혀보겠습니다. 우선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천사의 말도 들어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스스로 판단할 겁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요.”
“그렇군요.”
멜리너스는 만면에 웃음 띤 얼굴로 부드러이 끄덕였다. 엘도라도 희미한 미소로 화답했다. 멜리너스의 모습이 마치 잘하고 있다고 기특해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요.”
잠시 후.
엘도라는 가벼운 옷차림의 타나토스와 응접실에서 마주앉았다.
“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요?”
“그렇습니다.”
엘도라의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으나 이전과는 달리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타나토스의 예의 바른 모습과 그간 보인 행동으로, 첫 만남 때 느꼈던 적의는 상당히 사그라진 상태였다.
“어려울 것 없죠. 어차피 저도 그쪽과 이야기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럼, 또 수정에 손이라도 얹을까요?”
엘도라는 그럴 필요 없다는 의미로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구에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으니까.
“저번에 이렇게 들었습니다. 우리가 천사의 앞잡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며칠 동안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안타깝게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거의 확신하고 있어요.”
“과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흠. 라그나로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요?”
“신들의 전쟁을 말하는 거라면, 다소나마 들어보기는 했습니다.”
“그럼 간단히 말할게요. 아주 오래전, 여러 신이 이 세상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였지요. 물론 그중에는 저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어느 순간 서로 우위를 점할 목적으로 각자 추종 세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죠.”
“그럼 거기서 인간이 천사의 꾐에 빠져 당신을 적대하는 세력에 섰다는 겁니까?”
“천사야 애초 반대 진영이었지만, 인간은 중립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안타까웠다는 거예요. 저는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끝나지 않을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그 순간, 엘도라의 두 눈에 강한 금빛이 스쳤다.
“끝나지 않는 전쟁이라면…. 설마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타나토스는 잠시 말을 않고, 엘도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설마? 하, 그건 굉장히 무의미한 질문이군요.”
“……?”
“인간은 애초 이 전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해요. 얼마나 치열한지, 오랫동안 이어져 왔는지. 실제로 겪지 못하고 직접 보지 못했으니 모를 수밖에 없죠. 하기야 길게 살아야 일백 년을 사는 인간이, 수천수만 년간 이어져 온 전쟁을 이해하는 건 어불성설이죠.”
“그럼.”
“그저 한 시대, 소속 세력의 유리함을 위해 장기 말로 활용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에요.”
“…….”
엘도라는 순간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타나토스가 말한 ‘이용당하고 있다.’ 는 말이 불현듯 조금씩 와 닿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다면, 아마 당신이 궁금한 건 이거겠죠. 도대체 어떤 이유로 서로…. 아니. 정확히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소환돼 사용자로서 활용되는지. 아닌가요?”
거기까지 말한 타나토스는 잠깐 엘도라의 반응을 살폈다. 이어서 무섭도록 집중하고 있는 얼굴을 확인한 후,
“맞는 것 같군요.”
조용히,
“그럼 혹시.”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로 코드…. 라는 걸 알고 있나요?”
============================ 작품 후기 ============================
하루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네요.
코멘트를 읽으며 조금 안타까웠던 건, 독자 분들의 의견 중 제가 차마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는 겁니다.
확실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방향이 있었거든요.
그러나, 이제 와서 그렇게 하기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800회를 넘게 연재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우가 두어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김수현이 교관으로 들어갔을 때, 한 번은 강철 산맥 제 3지역 공략 때.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현재 연재되는 내용의 무게가 훨씬 무겁다는 점입니다.
정말 어지간하면 뛰어넘겠지만, 함부로 생략하기 어려운 내용이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남 대륙 에피소드는 여기서 일단락 짓고 바로 김수현의 시점으로 돌릴까, 아니면 중간중간 북 대륙 이야기를 삽입해 최대한 지루함을 덜어볼까….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결국에는 정석대로 밀고 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현재 메모라이즈는 완결까지 가는 여정이 세세한 부분까지 구상돼 있으며,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중입니다.
한데 여기서 뭉뚱그려 에피소드를 마무리해버리면, 이후 제가 단계를 수정하며 글을 이끌어나갈 자신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단, 줄여보겠습니다.
김수현의 시점은 에피소드 4부터 돌아옵니다.
원래 남은 에피소드는 최소 8화, 최대 12화 ~ 14화 정도로 기획돼 있었습니다만, 현재 연재 중인 에피소드 6과 5는 최대한 쳐내고 압축해보겠습니다.
물론 생략하기 어려운 내용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요.
이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택인 것 같습니다.
완결이 났다면 모를까, 리메이크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건 조금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정 견디기 어려우시다면, 잠시 묵혀두셨다가, 소제목에 에피소드 4가 걸리면 몰아서 읽으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800회 넘게 읽어왔으니 그냥 계속 읽어라.’ 라는 생각으로 연재하지는 않습니다.
집필할 때는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미 넘치는 사랑을 받은 만큼,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급격한 완결이 아닌, 원래 구상한 제대로 된 완결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긴 후기를 적었는데, 자꾸만 죄송하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네요.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