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59
00858 Be Infected, Six. =========================================================================
“잘못된 질문이었나요?”
한참 동안 침묵만 흐르자 타나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잘못된 질문은 아닙니다. 그냥…. 말하는 게 어렵다고 해야 하나.”
이안이 손을 휘휘 저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스리슬쩍 도와달라는 눈빛을 뿌렸으나 돌아오는 건 ‘알아서 해결하라.’ 는 외면뿐. 결국에는 한숨과 함께 조심스레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게…. 사실 왜 이곳에 있는지는, 저희도 잘 모르는 상황입니다.”
“모른다고요?”
“예. 어느 날 눈떠보니 이 세상에…. 그러니까 강제로 소환당한 처지거든요. 엄밀히 말하면 저희도 피해자입니다.”
“강제로 소환?”
드문드문 말을 잇자 타나토스의 고개가 더더욱 비뚤어졌다. 점차 높아지는 목소리로 반문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럴수록 이안은 ‘우리는 당신의 적이 아니다.’ 라고 호소하듯이 열심히 말을 이었고, 타나토스는 눈썹을 추키며 손을 들었다.
“잠시만요. 그러니까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소환됐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살아간다는 말씀인가요?”
“그, 그런가요. 아니, 그렇죠.”
“이해가 안 가는군요. 혹시 당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인간이 많나요?”
“에…. 글쎄요. 정확한 수는 모르지만, 못해도 수만 명은 넘지 않을까 싶은데….”
“하.”
“…….”
이안이 간신히 동의하자, 타나토스는 숫제 기가 막힌다는 듯 짧은 탄식을 흘렸다. 그러자 원탁의 기사들도 하나같이 거북한 낯빛을 숨기지 못했다. 사용자로 살아오면서 암묵적으로 현 상황을 받아들였는데, 꼭 억지로 치부가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더욱 거슬리는 건, 타나토스가 꼬집는 문제에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잠들어 있기는 했지만…. 모르겠네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누구죠?”
“예?”
“이곳에 강제로 오게 됐다면, 소환한 주체가 있을 텐데요?”
“아, 예. 그렇죠. 있습니다. 천사라고….”
“천, 사?”
“예, 예. 일종의 도우미 역할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등에 흰 날개 한 쌍이 달린….”
양손까지 동원해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던 이안은, 타나토스를 보고 돌연히 입을 닫았다.
“…아하.”
그리고 곧, 타나토스의 입에서 미약한 탄성이 이어졌다. 동시에 가만히 앉아 있던 원탁의 기사들이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천사라는 말이 나온 순간 타나토스의 반응이 갑작스럽게 일변했다. 물론 그래 봤자 여전히 인간이라 생각되는 수준의 감정 변화로, 두 눈을 크게 치뜨거나 음성이 약간 높아진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언가 깊숙한 비밀을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처럼 보여, 가슴 한 켠으로 살며시 호기심이 일었다.
“설마 아직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건가….”
“하기야 천사들이라면…. 예전에도 그랬으니, 이번에도 똑같이….”
타나토스는 팔짱을 낀 채로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워낙 조용한 공간이라 그런지, 청력을 높이지 않아도 흐르는 음성은 전원의 귓속에 똑똑히 들렸다. 원탁의 기사들은 조금은 멍청해 보이는 얼굴로 타나토스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불현듯 고개를 든 타나토스는,
“안타깝네요.”
딱하다는 눈빛을 빛내며 탁상을 천천히 돌아봤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있죠. 인간은 여전히 천사의 앞잡이 노릇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군요.”
“그건 틀린 말이외다.”
멜리너스는 흰 수염을 쓸어내리다가, 돌연 살그머니 움키며 반박했다.
“타나토스라고 했던가…. 진실의 수정이 인정한 만큼, 그대가 신이라는 건 알겠소. 그러나 우리가 확인한 건 단지 이것뿐. 당신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소만, 그 말은 부적절한 것 같구려.”
“무엇이 그르다는 거죠?”
“앞잡이라는 말 말이오. 확실히, 나 또한 왜 이 세상으로 불려 왔는지는 모르오, 그러나 끄나풀은커녕, 우리는 천사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오. 왜냐면 지금 이 순간도 스스로 의지를 갖고 움직이고 있으니. 즉, 협력 관계라는 말이 옳을 것 같군.”
“…그래서 안타깝다는 말이에요.”
멜리너스의 말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조리 있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타나토스는 상대가 무안하리만치 단호히, 단칼에 부정했다.
“걸어가는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있으니까요. 그럼 결국 속고, 이용당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하지만 정작 인간은 그걸 깨닫지 못해요. 과거에도 그랬듯이 말이죠.”
거기까지 말한 순간, 문득 진실의 수정이 선연한 빛을 분사하며 잿더미로 바스러졌다. 멜리너스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조용히 침묵했다. 씁쓸히 웃은 타나토스는 느릿하게 손을 거뒀다.
“너무 놀라운 말을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일어나서일까요. 어지러워요.”
그리고 차분히 몸을 일으켜 의자를 밀어 넣는다.
“오늘은 이만 쉬어도 되겠지요?”
그렇게 미묘한 말로 여지를 둔 타나토스는, 곧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던 일촉즉발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부서질 듯 쥐고 있던 칼자루는 어느새 힘없이 풀려 칼끝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리하여 엘도라는 물론, 원탁의 기사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서서히 멀어지는 타나토스를 하염없이 응시하기만 했다.
*
“후우.”
방으로 돌아온 엘도라는, 문을 열자마자 한숨과 함께 쓰러지듯이 침대에 엎어졌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침대에 푹 퍼졌다. 그저 이야기만 하고 왔을 뿐인데 전신으로 심한 피로감이 엄습한다.
엘도라는 스스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자문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금 전의 만남을 천천히 되새겼다.
일단 걱정 하나는 덜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니.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타나토스라는 여인은 생각보다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이라는 게 거짓말처럼 생각될 만큼 예의 바르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엘도라는 입을 살짝 짓씹었다.
‘이상해.’
찝찝하다. 혼란스럽다. 여인의 정체는 확인했지만, 무언가 개운치 않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머리를 비우려고 해도,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던 눈빛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왜?’
간단한 질문이었으나 쉬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단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본 적 없다. 당장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잊고 있던 문제였다. 혹은 익숙해진 순간부터 체념하고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잠시만요. 그러니까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소환됐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살아간다는 말씀인가요?’
생각해보면 그렇다. 당연한 말이지만, 처음 느닷없이 소환됐을 때만 해도 누구나 한 번쯤 비슷한 의문을 품었을 터.
그러나 몇 번이고 물어도, 아무리 난리 치고 발광해도 변하는 건 없다. 오히려 쫓기듯이 통과의례라는 잔인한 생존 시험을 강제로 치르며, 이후 간단한 설정을 마치고 홀 플레인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입장하자마자 기존의 사용자들에게 듣게 되는, 어디서나 비슷한 첫마디.
‘현재 이 자리에 서 있는 저희 역시 한때 지구에 살았던 인간이었습니다.’
‘저희와 여러분의 차이점은 단 하나, 순서밖에 없습니다.’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 먼저 들어왔는지, 아니면 후발로 들어왔는지.’
‘즉 우리는, 당신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가 그러던가.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아마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기하는 순간 도태되고, 도태되는 순간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결국, 남은 길은 하나. 삶에 대한 욕구가 손톱만치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조금씩 현실을 직시하고, 단념하고, 순응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비로소 사람이 아닌, 사용자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엘도라도 똑같다고 볼 수 있다. 지구에서는 평범한 소녀였으나, 홀 플레인으로 소환된 이후 추앙받는 사용자로 재탄생했으니까. 아니. 비단 엘도라뿐만 아니라, 원탁의 기사 전원이 비슷한 입장일 것이다.
그런 만큼, 누구도 이 근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망치로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 맞는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달칵.
그때였다.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은 채 상념에 잠겨 있던 찰나, 돌연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흘끗 돌아본 엘도라의 낯에 조금이나마 화색이 서렸다.
“멜리너스!”
“후후. 이 늙은이가 실례해도 괜찮겠지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용자는 바로 멜리너스였다. 엘도라는 반쯤 일으켰던 상반신을 도로 뉘었다. 멜리너스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잡해 보이는구려. 클랜 로드.”
그 말대로였지만,
“그냥…. 갑자기 큰 이야기를 들은 느낌이라서. 왜인지 머리가 멍합니다.”
멋쩍게 웃는 엘도라의 얼굴은 방금 보다 한층 안정돼 있었다.
“그렇군요. 그럼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
이내 침대 끝에 앉아 부드러이 웃음 짓는 멜리너스를, 신뢰 가득한 눈길로 응시한다. 비록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그래도 엘도라는 여태껏 문제가 발생했을 때마다, 항상 합리적인 답을 찾아온 ‘선지자’ 멜리너스를 굳게 믿고 있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한편, 같은 시각.
타나토스, 엘도라, 멜리너스. 이 세 명이 떠난 자리에는, 아직 열두 명의 원탁의 기사가 탁상을 떠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있다. 전원 심각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속닥거리듯 말을 나누는 것이, 심상찮은 기운마저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속고 있다고?”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아직 시기상조 아닌가? 사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어.”
“당황스럽군. 나는 그냥 일종의 유희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거든.”
“어느 쪽이건 기분 나쁜 건 마찬가지잖아. …이안,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탈리가 돌발적으로 물어오자, 망연히 앉아 있던 이안이 언뜻 정신을 차렸다.
“예? 그, 글쎄요.”
버릇처럼 쫙 핀 손으로 안경을 추켜올린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못했다. 은근슬쩍 계단을 흘겨본 이안의 눈매가 오묘한 호선을 그렸다는 것과, 입이 비뚜름한 미소를 그렸다는 것을.
‘설마 첫 만남에 이렇게나 흔들어버릴 줄은…. 이 속도라면 디데이도 머지 않았나.’
오늘 타나토스는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신이라는 사실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천사의 정체에 관해 운을 띄우고, 불신의 씨앗을 뿌렸다.
진실 속에 거짓을 섞는다고 했던가. 천사가 인간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만큼, 이용하고 있다는 건 불변의 사실이다. 말인즉, 확실한 것만 진실로 말하면 된다. 그럼 과거이든 역사이든, 나머지는 어떻게 끼워 맞추든지 알게 뭐냐.
아마 지금쯤 멜리너스가 엘도라에게 접근했을 터. 그럼 남은 원탁의 기사는….
여기까지 생각한 이안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표정은 어느새 원래 이안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잠시 후, 이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 작품 후기 ============================
흠…. 그렇네요.
완결도 다가오는데, 일러스트도 하나 새로 하는 게 좋겠지요.
완결 전에 주인공 일러스트를 그리겠다고 말씀드린 적도 있으니까요.
그럼 김수현 + a로 가야 하는데, 파트너가 고민이네요.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게헨나, 고연주, 임한나, 화정, 한소영(새로운 버전으로.) 중 한 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이 다섯 명이냐고 물어보신다면, 아시잖아요. *-_-*
아, 물론 화정은 아직 드러난 적이 없지만요.
어쨌든 이 외에 다른 좋은 파트너가 생각나신다면 기탄없이 말씀해주세요.
조만간 코멘트를 정리해, 상위 네댓 명을 선발해 투표로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