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58
00857 Be Infected, Six. =========================================================================
그때였다.
“그거.”
엘도라가 한 번 더 으르렁거리려는 순간,
“엑스칼리버?”
고요한 음성이 둘 사이로 흘렀다.
듣는 이의 귀가 솔깃해질 정도의 매혹적인 미성(美聲). 목소리는 전투적인 태도를 보이던 엘도라조차도 누그러지게 할 만큼 매우 아름다웠다.
“그대가 그 검의 주인인가요?”
비로소 공허에서 깨어난 듯한 여인이 흥미가 동한 눈으로 상대를 응시한다. 찰나의 순간, 엘도라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물렸다. 두어 걸음 물러나고 나서야 본인의 행동을 깨달았는지, 흠칫 놀란 기색을 비쳤다.
어떤 기운도, 어떤 압박도 감지되지 않는다. 존대도 예상외기는 했지만, 꼭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이가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어본 느낌이었다.
눈앞의 상대는 사람이 아닌, 무한한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미지의 존재다. 이렇게 단정 짓고 온 엘도라로서는, 생각한 것보다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여인의 태도에 혼란을 느꼈다. 물론 어색하게 느끼는 건 원탁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앉도록 하세.”
침묵을 깬 멜리너스가 자못 엄숙하게 말했다. 어느새 원탁의 기사는 열세 명 전원이 모여 있었다. 이윽고 기사 몇 명이 주변에서 의자를 끌어와, 여인을 포함해 총 열다섯 명이 커다란 책상 하나를 둘러싸고 앉게 되었다.
조금이나마 관심을 나타내는 여인에 반해, 엘도라를 비롯한 열네 명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탁상에는 한동안 정적만이 감돌았다.
결국, 여인을 제외한 열두 쌍의 시선은 멜리너스와 이안으로 향했다. 이런 일에는 저 두 명이 그나마 제격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혼란스럽군요.”
그때 여인이 불현듯 말문을 열었다. 설마 먼저 말을 꺼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곳곳에서 당황한 빛이 스친다. 금세 정신을 차린 듯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혼란스럽다니요?”
여인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설마 깨어나자마자 보게 된 존재가 인간일 줄은….”
“…인간일 줄은?”
이안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잠시.”
그러한 찰나, 누군가 걸걸한 목소리를 내며 손을 들었다. 이야기를 정지시킨 멜리너스는, 문득 품속에서 조막만 한 푸른 구슬을 꺼내더니 여인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이야기에 앞서, 부탁이 하나 있소만.”
구슬, 정확히는 진실의 수정을 알아본 몇몇 기사가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안심했다는 듯이 몰래 숨을 흘렸다. 막막하던 상황에서 누군가 나름의 대비를 해왔다는 것에서 느낀 안도감이었다.
“그 구슬에 손을 얹고, 본인의 기운을 조금 흘려주셨으면 하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오.”
여인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재밌다는 표정을 짓더니 순순히 진실의 수정에 손을 올렸다. 잠시 후, 구슬이 선연한 빛을 분사하며 파르스름한 불꽃을 일으켰다. 멜리너스는 이안을 한 번 바라보고는 슬쩍 끄덕였다.
“에….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저희는 인간입니다.”
“알고 있어요.”
여인이 잔잔히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너무나 예의 바른 태도에 이안이 한층 어색해 하며 말을 잇는다.
“아까 말씀하셨죠. 혼란스럽다. 그리고 인간일 줄은, 이라고.”
“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여인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질문의 답은 하나로 할 수 있겠네요. 말 그대로예요. 저는 오랜 세월 동안 잠들어 있었던 만큼, 언젠가는 깨어나기를 바랐죠. 하지만 저를 해방한 존재가 인간일 줄은 몰랐다는 뜻이었어요.”
“왜 인간일 줄 몰랐다는 것이오?”
말이 끝나자마자 멜리너스가 곧바로 받아쳤다. 그 순간 여인의 낯에서 웃음기가 싹 걷히며 조금 낮아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연하죠. 먼 옛날 전투에서 패배하고 봉인됐을 때, 그 과정에 인간도 참여했으니까요. 물론, 제 반대편으로요. 제 추종 세력에 인간은 없었으니까요.”
“흐흠. 궁금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일단 말씀을 들어보니 꼭 나는 인간이 아니다, 라는 것처럼 들리오만.”
멜리너스가 침착히 말을 잇자,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의아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가장 궁금한 건 하나요.”
멜리너스의 얼굴도 한층 진지해졌다.
“현재 우리의 눈앞에 있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로 정의해야 하는지.”
“그건 조금 의외군요. 정확히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가요?”
“간단하지요. 인간이 아니라면, 가령 신이라던가….”
“네.”
여인은 멜리너스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한 번 더 수긍한 순간, 원탁의 기사 전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너무나 간단히 수긍했다. 몇몇은 귀를 의심하는 걸 넘어 비현실적인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분명히 신이라는 말에 반응했고, 확실히 긍정했다.
무엇보다.
진실의 수정 불빛이 시종일관 파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도.
그 순간이었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갑작스럽게 대 도서관을 울렸다. 자연스레 시선이 쏠린 곳에는 이안이 의자 채로 넘어진 채 나동그라져 있었다. 찢어질 듯 치뜬 두 눈동자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이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바닥을 짚으며 상반신을 바로 했다.
“마, 말도 안 돼…. 이건, 이건….”
“이안, 진정하게.”
멜리너스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일어서는 이안을, 여인은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응시했다. 그러더니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요?”
“아니…. 그건, 그건 아닙니다.”
이안은 겨우 머리를 흔들어 부정하고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여인을 노려봤다.
“당신이 누군지, 아니 어떤 신인지 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게 제가 놀란 이유입니다.”
여인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벽화를 봤을 때 설마 설마 했는데…. 굉장히 오래된 기록이기는 하지만, 읽은 기억이 있어요. 죽음의 의인화…. 멸망의 강림….”
“호.”
“그래요, 타나토스. 타나토스의 꽃.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
“…이건 놀랍네요. 설마 제 진명을 기억하는 인간이 아직 남아 있다니.”
여전히 변하지 않는 불빛의 색깔과, 여인의 시원스러운 인정. 그 순간 이안은 힘이 쭉 빠졌는지 돌연히 의자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맙소사…. 우리는,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를 해방한 거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만히 듣고만 있던 원탁의 기사들은 긴장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죽음의 의인화, 멸망의 강림. 듣기만 해도 좋은 쪽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말이다. 띄엄띄엄 혼잣말하며 괴로워하고 있지만, 눈앞의 여인이 심상찮은 존재라는 것 정도는 느낌상 직감할 수 있었다.
여인의 예의 바른 태도에 조금씩 느슨해지던 긴장이, 조금 전을 기점으로 다시금 팽팽해졌다. 일부는 이미 슬금슬금 무기를 움켜쥐기까지 하고 있다. 되살아난 긴장의 줄은, 곧 끊어지기 일보 직전처럼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럼.”
그때, 느긋이 주변을 돌아보던 여인이 문득 팔짱을 꼈다.
“이제, 제가 질문 좀 해도 될까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여인, 아니 타나토스가 살포시 미소 짓자 전원 움찔하면서도 아리송한 낯빛을 보였다. 스스로 신이라고 인정했으면서 전혀 신처럼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요, 행동이다.
그러나 한 번 물살을 탄 긴장은, 외려 더욱더 가속화되고 있었다. 엘도라가 움켜쥔 칼자루에서는 땀방울마저 배어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모두가 신호만 기다리는 가운데, 타나토스가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누구죠?”
“…뭐라고?”
예상치 못한 질문에 엘도라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 질문이 잘못됐네요. 물론 당신들은 인간이죠.”
모종의 낌새를 느꼈는지 타나토스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가만히 느껴보니…. 이질감? 아니 이물질? 그런 기운이 느껴져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부드러이 손을 마주 잡는다.
“아. 그러니까 원래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마치 이방인 같은 느낌이에요.”
긴장이 쌓이던 대 도서관에 순간적으로 술렁거렸다.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당혹한 낯으로 서로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타나토스는 느낌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정확히 맞는 말이었다. 그러는 와중 이안이 황급히 끄덕거렸다.
“마, 맞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원래 살던 세상은 따로 있고, 이 홀 플레인에는 강제로 소환된 처지입니다.”
“역시 그랬군요. …뭐라고요? 강제로?”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 같던 타나토스는, 이어지는 말에 느닷없이 의아히 반문했다. 그리고 돌연 엘도라를 정확히 직시하며,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요? 왜 강제로 소환된 거죠? 어떤 목적으로?”
“그건.”
이윽고 반사적으로 입을 연 엘도라는,
“그….”
순간,
“…건.”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을 보였다.
비단 엘도라뿐만이 아니었다. 멜리너스는 물론, 원탁의 기사 전원이 똑같이 망연한 얼굴이다.
기실 타나토스의 질문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또한,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본 질문이었다.
왜.
…그러나.
“…….”
한편으로는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용자로서의 진정한 존재 의의를.
*
목청껏 고함친 결과, 안솔의 상자 개봉은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다.
크게 놀란 속을 추스른 후 단단히 혼내려고 부르려는 찰나, 세 명은 상자를 내팽개치고 쏜살같이 줄행랑을 쳤다.
사실 못 잡을 것도 없지만, 같이 도망치던 안솔에게 좌우서 동시에 발을 걸어 미끼로 삼은 두 명의 잔혹함에 감탄해, 그냥 상자만 압수하는 선에서 그치기로 했다.(사실 배신당했다고 꺼이꺼이 대성통곡하는 안솔이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상자를 회수하고 돌아온 후, 나는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하다가 화정에게 말을 걸었다.
‘화정.’
– 왜?
아직 자고 있지 않았군. 다행이다.
‘타나토스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봐.’
– 야. 내가 걔 얘기 꺼내지 말랬잖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고!
‘제발, 부탁해. 믿을 건 너밖에 없어서 그래.’
– …뭐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간절한 체하며 부탁하자 역시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후후. 화정도 의외로 마음이 약해.
‘네가 아는 정보라면 아무거라도 좋아. 관계된 기록이나, 사용하는 힘이나, 성격이나, 생김새나….’
– 뭐? 이게 듣자 듣자 하니까! 신을 얘기하는데 생김새는 왜 나와? 왜! 걔도 게헨나처럼 자빠뜨리고 싶어서 그러냐? 정말 기도 안 차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고 생김새를 묻는 게 어때서? 게헨나도 그렇고, 화정 너도 그렇고. 타나토스도 꽤 예쁘지 않을까 싶은데.’
– 뭐, 뭐라고?
유들유들하게 말하며 살살 구슬리자 불같이 화내던 화정이 주춤 말을 더듬는다. 아마 ‘화정 너도 그렇고.’ 라는 말을 강조한 게 유효했던 듯싶다.
‘뭘 민감하게 반응해. 그냥 느낌상 그렇다는 거야.’
– 시끄러워. 닥쳐. 그리고 타나토스 걔가 나처럼 고상하고 우아한 신인 줄 알아?
한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 전혀 아니거든. 너희 기준으로 말하면 성격 파탄, 아니. 천재지변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이야.
‘너무 안 좋게만 말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신이니만큼….’
– 신도 신 나름이지. 나야 착하니까 이렇게 대접해주는 거지, 게헨나 봤지? 걔가 처음 인간을 봤을 때 어떻게 취급했는지 기억 안 나?
‘그럼 타나토스는 그보다 더 심하다는 거야?’
– 두말하면 잔소리.
‘오호.’
일부러 추임새를 넣자 화정은 코웃음 치며 빈정거렸다.
– 오호, 는 뭔 놈의 오호. 아무튼, 네가 뭘 기대하는지는 알겠는데, 꿈 깨셔. 이건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야.
‘아니, 뭐….’
– 쳇. 하여간 누가 색마 아니랄까 봐. …아. 그리고 뭐? 화정 너도 그렇고? 웃기지도 않아. 내 본체는 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네.’
– 그러시겠지. 다시는 그런 말 하지도 마. 인간 주제에, 같잖으니까.
‘그래. 알겠다.’
평소보다 갑절은 예리해진 화정의 말투에 백기를 들었다. 그래도 소정의 정보는 얻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만족하기로 할까.
여하튼 화정의 우려처럼 타나토스를 어떻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애초 사서 고생할 이유도 없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다. 다만….
– 흠, 흠.
그때였다. 한창 상념에 잠기려는 찰나, 문득 어색한 헛기침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 좀 뭐라 했다고 갑자기 조용해지네. 신 민망하게.
‘그야 네가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 …돼, 됐고. 어, 어떨 것 같은데?
‘뭐가?’
– 예, 예쁠 것 같다며. 어, 어떻게 예쁠 것 같으냐고.
‘…….’
순간 휙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려고 무진 애를 쓰며, 나는 테라스 너머 밤하늘을 응시했다.
일 회차와 이 회차를 겪으면서 얻은 게 하나 있다면, 바로 ‘감’의 차이다. 말인즉 조금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단단히 일렀는데도 안솔이 상자를 개봉하려고 한 일이나, 뜬금없이 타나토스가 생각난 것까지 모조리 석연치 않다. 단순히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특히나 안솔의 행운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내 행운 능력치도 결코 낮은 편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무언가 묘하게 신경 쓰인다는 건, 일종의 신호라고 해석해도 좋지 않을까.
그래, 설령 기우라고 해도 좋다. 전쟁에 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을지언정, 경계에 소홀히 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도 있으니. 악마가 이대로 물러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우선은 염두에 둬볼까. 정말로 맞닥뜨리게 됐을 때, 최소한 놀라지 않을 정도로 말이지.
– 가슴은 큰 게 좋으려나? 야, 김수현. 듣고 있는 거야?
‘응?’
– 너…. 큰 가슴 좋아하잖아.
‘아니?’
– …아니야?
‘너라면 다 좋아. 어떤 모습이든지.’
============================ 작품 후기 ============================
『김수현 회고록』
…그렇게 빙긋 웃으며 말했을 때만 해도, 나는 스스로 꽤 괜찮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약 오 초 후 깡그리 사라졌다.
이후 화정의 폭주로, 머셔너리 캐슬을 넘어, 도시 전체를 밝힐 만큼의 거대한 불꽃 놀이로 이어질 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