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63
00862 D-Day, Five. =========================================================================
식사가 끝나고 시작된 바오의 질문 공세는 해가 중천에 올라서야 간신히 멎었다. 겨우 벗어난 에르윈은 통나무 집을 나와 요정의 숲 중심부를 거닐었다. 날이 맑아서 그런지 여러 어린 요정이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연록 빛 녹음을 마음껏 뛰놀고 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아.”
그때 녹색 벨벳처럼 고운 풀밭을 밟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가만히 서 있던 에르윈이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는다. 아침에 깨어날 때만 해도 괜찮았건만, 갑자기 격통이 찾아왔는지 아미가 심히 이지러져 있다. 이윽고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는 “후우, 후우.” 호흡을 추슬렀다.
“…….”
싱그러운 공기를 들이마시자 조금 진정된 걸까.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르윈은 돌연 숨을 세차게 토해내며 수풀에 드러누웠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는 얼굴에 미처 숨기지 못한 수심이 그늘진다. 오른손은 아직 왼쪽 가슴에 얹어져 있다.
문득 심장의 고통이 시작된 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유적의 봉인을 해제하고, 타나토스와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억이었다.
비록 라그나로크로 돌아오자마자 연락을 받고 바로 요정의 숲으로 떠나기는 했지만, 에르윈은 그 당시 봉인 해제에 가장 반대했던 입장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모른다. 근거도 없는, 그냥 일종의 감에 불과했다. 그저 석문을 앞두고 뜻 모를 조마조마함을 느꼈을 뿐.
그러나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을 동반해 기하급수로 커졌다. 심할 때는 석문이 열리고 검은 연기에 휘감겼던 그때의 기억이 끔찍한 악몽으로 재현되는 날도 있었다. 꼭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서서히 옥죄는 기분이었다.
‘왜, 왜….’
심장을 아릿하게 덮쳐오는 가슴을 짓누르며 끊임없이 자문했으나, 답이 있었다면 진작 나왔을 터.
마치 출구 없는 미궁을 헤매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에르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선선한 바람에 실려오는 수마에 조용히 몸을 맡겼다. 오후가 되기 전에는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은 가슴이 편해졌다고 느끼면서 에르윈은 살짝 눈을 떴다. 그리고 가물가물한 시야로 물에 탄 물감처럼 느릿하게 퍼지는 붉은 색채를 발견했을 때, 두 눈이 화들짝 떠졌다. 생각보다 깊게 잠에 빠져서이기도 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인 색과 대비되는 한 쌍의 연두색 눈동자가 바로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일어났군요. 내 오랜 친구.”
감미로운 음성이 들려온 순간, 에르윈은 황급히 일어나 자세를 바로 했다. 이윽고 한쪽 무릎까지 꿇으려 했으나,
“괜찮아요. 편하게 있어요.”
흡사 간절히 부탁하는 어조에 움직임을 멈췄다. 양 무릎을 모아 앉은 은발의 요정이 에르윈을 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에르윈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니뮤에 님.”
“어때요. 몸은 좀 괜찮나요?”
에르윈은 입을 닫았다. 당연히 괜찮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럼 거짓말을 하게 되는 셈이니까. 에르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돌리자, 니뮤에의 낯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요정. 요정으로 태어난 아이는 각성 전까지 성장하는 동안 스스로 걸맞은 역할을 찾고, 성인이 되면 역할에 따라 소속이 변한다. 소속이라 함은 역할에 맞는 임무를 수행하는 단체로써, 전투, 정찰, 암살, 지원, 지킴이, 생활. 이렇게 총 여섯 개로 구분 지어져 있으며, 각 단체의 수장을 맡은 요정은 특별히 ‘하이’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여섯 단체를 총괄하는 요정 한 명, 이 요정을 전문적으로 지키는 요정 한 명. 그리고 지금은 공석인 여왕을 대리하는 장로가 한 명 있다.
이것이 현재 요정의 숲을 이끌어나가는 종족의 현 조직 체계이며, 현재 에르윈의 눈앞에 있는 요정이 바로 단체를 총할하는 임무를 맡은 하이, 니뮤에였다.
“큰일이군요.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병이라니…. 그렇게 고향에 돌아오는 게 싫었던 건가요?”
“니, 니뮤에 님.”
에르윈이 살짝 눈을 흘기자, 니뮤에는 후후 웃으며 눈을 돌렸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갑갑해서 잠시 나와봤어요. 그런데 마침 잠들어 있는 에르윈을 발견했어요.”
“가슴이 갑갑해서….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알고 있으면서 물어보는 건 나쁜 버릇이에요. 에르윈.”
“…아.”
핀잔하듯 말하자, 에르윈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니뮤에는 또 한 번 기나긴 숨을 흘렸다.
“이렇게 하루하루 고민으로 살아가는 건, 근 백 년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에요. 에르윈을 어쩔 수 없이 인간 세상으로 보내야 했을 때보다, 훨씬 더….”
“여왕 자리에 앉기 싫으신 건가요?”
에르윈은 비로소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장로는, 걱정하고 있어요.”
니뮤에는 씁쓸히 말했다.
“아르코느 오크가 멸망한 건 우리로서는 분명 기뻐할 일이죠. 하지만, 그걸 실제로 이뤄낸 인간의 저력에 한층 경계심이 깊어진 것 같네요.”
“인간은 우리와 동맹 관계일 텐데요. 그런데 왜 그렇게.”
“그래요, 동맹이죠. 정확히는 불가침에 가까운. 물론 장로는 이 동맹을 깨트릴 생각도, 인간을 적대할 생각도 추호도 없어요.”
“그럼….”
“단, 하루가 다르게 세를 불려가는 인간이 두려운 거겠죠. 아마 어떤 식으로든 예속될만한 상황을 경계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
불현듯 피식, 힘없이 웃는 소리가 흘렀다.
“뭐, 한 번 사그라졌던 여왕 선발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건, 아마 그런 이유겠죠.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지도자가 필요하니까.”
이윽고 말을 끝낸 순간, 잠시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가끔 비슷한 꿈을 꿔요.”
그때 조금 뜬금없다 느껴지는 말소리가 고요히 흘러나왔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에르윈은 침착히 되물었다.
“꿈? 어떤 꿈인지요?”
“조금 웃기기는 하지만…. 꿈에서 저는 하얀 말에 탄, 그리고 누런 덩어리를 안은 작은 아이를 보고 있죠. 아, 얼굴도 봤어요. 어여쁘면서도 고결한 은발이, 어릴 적 마르가리타를 닮았네요.”
“네?”
“그러니까 꼭 마르가리타의 아이를 보는 것 같다니까요.”
그렇게 말한 니뮤에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놀란 빛을 비췄던 에르윈은, 덩달아 웃으며 니뮤에의 옆에 살며시 붙어 앉았다. 더 듣고 싶다는 듯이.
“가만히 꿈을 더듬어보면, 아이는 굉장히 행복해하고 있던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둘러싸여 항상 웃고 있죠. 그 미소를 보면 저도 행복해지는 느낌이에요.”
“그리고요?”
“저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리고 손에 든 가시나무 관을 아이의 작은 머리에 씌워주죠.”
“후후.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이야기네요.”
에르윈이 눈을 반짝였다.
“아, 어쩌면 예지몽이 아닐까요? 가령 니뮤에 님이 마르가리타 님의 아이를 찾게 된다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때였다.
“…그런데, 거기서.”
갑작스레, 니뮤에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가시나무 관을 씌우고, 기뻐하며 뒤를 돌아보면….”
느닷없이 드문드문 이어지는 말소리.
아무 생각 없이 돌아본 에르윈은,
“!”
순간적으로 몹시 기함했다.
조금 전까지 연둣빛으로 빛나던 니뮤에의 두 눈이, 어느 순간 무채색으로 변해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으니. 에르윈은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가 고개를 빠르게 털었다.
그리고 다시 바라보자, 니뮤에는 무언가 말할 듯 말 듯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돌아보면….”
그러나 끝내 말을 잇지 못하겠는지, 결국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에르윈.”
두 요정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잠깐의 정적. 그러나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하나만, 하나만 약속해줘요.”
어떤 전조도 없이 니뮤에의 말문이 봇물처럼 터졌다.
“장로의 의지는 확고해요. 물론 다른 하이들도 마찬가지고요. 조만간 새로운 여왕 선발이 공식적으로 발표될 거예요. 저로서는 이 이상 거부하기 힘들어요.”
“그래요, 알고 있어요. 썩 달갑잖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는 걸. 그리고 필요성에 공감해 가만히 있다는 것도.”
에르윈이 멍한 얼굴로 입만 뻐금거릴 즈음, 니뮤에는 이 모든 말을 아주 빠른 속도로 말했다. 미처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저.”
갑자기 심상찮아 진 분위기에 에르윈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니뮤에가 두 손을 내밀어 양어깨를 눌렀다.
힘이라고는 손톱만치도 들어가지 않은 부드러운 손놀림이기는 했지만, 그 행동에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오묘한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결국에는 엉거주춤 수풀에 앉고 말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약속해요. 내 오랜 친구이자, 나만의 검이여.”
귓가에 속삭이는 소슬한 음성에 가냘픈 몸이 흠칫 떨린다.
“제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간에, 에르윈만은 저를 믿고 도와주겠지요?”
“네, 네.”
“제가 어떻게 되더라도, 저한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 그럼요. 그건 언제나 당연한 일인걸요.”
에르윈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정말인가요?”
이윽고 세 번째로 같은 질문이 이어진 찰나, 에르윈은 마침내 이상함을 깨달았다. 평소 니뮤에의 언행과도 엄청난 차이가 있거니와, 무엇보다 아까 중간에 끊긴 꿈의 내용이 괜스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르윈은 계속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금으로써는.
“…그래요.”
그렇게 몇 번이나 다짐받고 나서, 니뮤에는 뜻 모를 숨결과 침음을 실어 흘렸다. 잠시 에르윈을 지그시 응시하더니, 왠지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짓고는 처연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 자리에 계속 있기 힘들다는 듯, 은발의 요정은 숲 사이로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한참 동안 니뮤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만 보던 에르윈은, 흡사 홀린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젖혔다.
어느새 노을로 물든 하늘은 황혼이 최고조로 달해, 요정의 숲에 짙은 자줏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냥 아름답다기보다는, 무언가 흉흉하다고 생각되는 빛깔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
왜인지 불길하다고 생각한 순간, 엘도라 생각이 에르윈의 뇌리를 까닭 없이 스쳤다.
한편, 같은 시각.
쾅!
“뭐라고요?”
라그나로크, 푸른 궁전에서는 때아닌 고성이 장내를 떠르르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