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64
00863 D-Day, Five. =========================================================================
에르윈이 요정의 숲으로 떠난 지, 그리고 타나토스가 깨어난 지 어언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원탁의 기사들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동안 여러 번 자리를 가지며 타나토스의 입장을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면서 각자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계획은 누군가 바라는 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현재 악마 진영의 유일한 장점은 홀 플레인에 직접 나와 있다는 것이다. 소환의 방이라는 이(異) 차원에 머무르며 필요할 때마다 인간을 호출하는 천사보다, 훨씬 많은 접촉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꼭두각시가 아니다.’ 라는 명제로 행동권을 넘긴 것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타나토스는 천사의 목적을 최대한 실감 나게 토로했고, 인간은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반응한 건 아니었으나 상황은 지지부진했다. 선동까지는 성공했지만, 행동으로 이어지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천사의 장기 말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노해도, 어쨌든 그 부분만 제외하면 이후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남 대륙은 서 대륙이 아니다. 스스로 최고라는 자부심이 가득하기는 해도, 약탈과 살육보다는 질서 아래 평화를 좋아하고, 호전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말인즉 이 세상에 적응하고 안주한 인간의 수가 악마의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멜리너스는 물론, 엘도라 포함 원탁의 기사단이 존중받는 집단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들이 남 대륙 전부도 아니라는 점이다.
기실, 비슷한 원인에 기인한 같은 문제였다. 천사가 순수한 도우미라는 인식을 지우고 이제껏 뿌린 불신의 씨앗을 싹트게 하려면, 좀 더 광범(廣範)하게, 좀 더 확실하게 천사의 목적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엘도라를 들여보내 무턱대고 진실을 밝히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이건 현재 악마가 선택할 수 있는 최악의 악수였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으니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시점을 노려야 하니까.
아무튼, 시간이 부족한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나마 남은 천금 같은 시간이 하루하루 의미 없이 흘러가는 가운데, 사탄은 결국 장고 끝에 선택을 내렸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좋지 못한 결과가 예상되는 상황이라면, 천사에게 들켜 기회를 날려버리는 게 아닌, 인간 세상에서 발생할 혼란을 감수하겠다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D-Day와 세 번째 계획을 앞당겼고,
쾅!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래서 회의가 개최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탈리는 황망하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 푸른 궁전에는 총 열여덟 명의 사용자가 모였다. 열네 명은 원탁의 기사와 멜리너스였고, 나머지는 네 개의 외(外) 도시를 이끄는 영주 클랜의 수장이었다. 동 도시의 엘핀 클랜, 서 도시의 팍스 클랜, 남 도시의 카르페디엠 클랜, 북 도시의 녹스 클랜. 사실상 남 대륙을 대표하는 사용자들이 전부 한 자리에 모인 셈이다.
“동 대륙 정벌? 지금 제가 잘못들은 건가요?”
“워워, 진정하시오. 수색의 기사. 나도 충분히 놀랐으니까.”
그때 다소 오만한 표정과 거만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약간 마른 체구의 사내가 손을 휘휘 저었다. 이 사용자가 바로 각성 시크릿 클래스 ‘복마전의 성인’의 주인이자, 소돔과 고모라의 구현을 꿈꾼다는 카르페디엠 로드였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가 싶더니…. 설마 동 대륙을 점령하자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언제나 정의 구현에 앞장서는 오딘 클랜이 말이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넉살 좋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나저나 우리에게 말을 꺼내기 전, 내부서 어느 정도 이야기가 정리됐을 줄 알았는데?”
두 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리며 나탈리를 흘끗거렸다.
“전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첫 반응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쨌거나 여러분도 우리 남 대륙에 중요한 분들이니까요.”
안경을 올리며 구변 좋게 말하는 이안. 카르페디엠 로드는 피식 웃었다.
“뭐, 좋소. 하지만….”
그리고 의자에 기댄 등을 천천히 떼더니, 탁상에 몸을 바싹 붙이며 잿빛 눈동자를 날카롭게 번뜩였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야 할 거요. 우리를 놀리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하하. 여부가 있겠나요. 일단 뜬금없는 말로 혼란스럽게 한 점,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이안은 잔잔히 말하며 깍듯하게 머리 숙였다. 이렇게까지 나오자 조금은 안심했는지, 카르페디엠 로드는 킬킬 웃으며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몇몇 기사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별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눈앞의 사내가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냥 좀 놀랐을 뿐이니까.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건대, 나는 기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요. 인간의 역사만 봐도 전쟁으로 점철돼 있는데, 필요하면 해야지요. 그럼요!”
“예, 예. 물론입니다.”
“아, 사설이 길었군. 그럼 어디 한 번 이야기해보시오. 내 경청하리다.”
“예, 그럼.”
이안은 잠깐 헛기침한 후, 탁상에 깔린 지도의 중앙을 짚었다.
“우선, 아까 말씀드린 것들은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하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천사의 목적에 관해서라면 확실히 이해했지요. 동서남북. 이 네 대륙이 중앙을 둘러싸고 서로 각축전을 벌인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일리 있다고는 생각해요.”
“그럼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죠. 우리가 동 대륙을 공격하고 점령에 성공할 시, 총 네 가지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네 가지?”
이안은 엄지를 접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첫 번째. 차후 중앙 대륙을 둘러싼 각축전에서 경쟁자를 미리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경험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괴물이 아닌 같은 인간과 집단으로 싸워야 할 텐데, 동 대륙과의 전쟁은 분명 소중한 전투 경험을 쌓게 해줄 겁니다. 세 번째. 사용자든 성과든, 동 대륙에 있는 물자를 우리가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리고.”
“잠시만요.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였다. 이안이 빠른 속도로 말을 맺은 찰나, 이제껏 가만히 앉아 있던 사내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특징이라고는 그다지 말할 것 없는 평범한 사내였지만, 어쨌든 이 회의에 참가한 만큼 그저 그런 사용자는 아닐 터. 이 사용자는 겉으로는 중립과 평화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기회주의자로 평가받는 서 도시의 영주, 팍스 로드였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놀라기도 했지만, 상황을 너무 낙관하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제가 아는 체하며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전쟁이라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막말로 싸움을 걸었다가 서로 공멸하는 상황은 생각해보지 않으신 겁니까? 설령 승리한다손 쳐도, 우리가 입을 피해는요?”
“아하. 물론이죠. 그러고 보니 제가 이 말씀을 드리지 않았군요.”
흡사 공격하는 듯한 말투였으나 이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팍스 로드께서는 현재 동 대륙의 상황을 알고 계십니까?”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사뭇 당당한 태도로 말하자, 팍스 로드가 한풀 꺾인 기세로 말했다.
“제가 승리를 낙관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재 동 대륙의 발전 상황은 네 대륙 중에 가장 낮거든요. 완전히 최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죠. 신 대륙은커녕, 이제 겨우 대 도시를 차지한 정도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와 상대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러니까, 알아서 잘살고 있는 동 대륙을 굳이 공격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정 그러면 차라리 서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거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거죠. 쫓겨온 이들을 위한다는 명분도 있고, 천사들에게 할 말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상한 말씀이군요. 서 대륙은 이미 버림받은 것과 진배없는 곳인데 뭐하러 차지합니까? 우리가 자선 사업가도 아닌데요.”
“뭐요?”
팍스 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득에 초점을 맞추면, 팍스 로드야말로 단단히 착각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안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예비 사용자가 들어오지 않을 뿐이지, 서 대륙은 강합니다. 들어보니 아직 약 일만 명 가깝게 남아 있는 것 같던데, 한 명 한 명이 베테랑이라고 하더군요. 살육과 약탈이 일상인 곳에서 살아남은 정예라는 거죠. 그러니 동 대륙과 비할 바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더 약한 동 대륙을 먹이로 삼으시겠다.”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좋아.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드르륵! 콧김을 세게 뿜은 팍스 로드는 곧장 의자를 끌어 몸을 일으켰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 말은 없으나,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실 지금 제 앞에 있는 분들이 정말 오딘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군요.”
“팍스 로드.”
“아니요. 그만하죠. 오늘 이야기는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이만 가보겠습니다.”
“…….”
이윽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엘도라를 한 번 흘깃거리고는,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회의장을 떠나버렸다. 잠시 어색한 적막함이 흘렀다. 이러한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이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꺼낸 이야기는 끝내겠습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또 하나의 신 대륙을 공략할 수 있는 권한이 생깁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요?”
턱을 괸 채 입맛을 다시던 카르페디엠 로드가 반문했다.
“무슨 소리긴요. 우리가 오크 성을 공략하고 라그나로크를 발견했듯이, 동 대륙도 같지 않겠습니까? 이제 겨우 대 도시를 개척하는 상황인데, 신 대륙은 현재 언감생심 꿈도 못 꾸겠죠.”
“잠깐만요. 그럼 우리가 그걸 공략한다면?”
“그렇지요. 정확히는 불모의 황야라는 지역만 통과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호오.”
라그나로크를 발견했을 때 받은 보상이 생각났는지 감탄이 터졌다. 하기야 사용자라면 누구나 능력치에 민감한 만큼, 구미가 당길 만도 했다.
“아니. 나는 반대야.”
그러나 전원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듯, 예리한 음성이 이안을 찔렀다. 나탈리는 아까부터 서 있는 채로 시종일관 이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안은 안타깝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흘렸다.
“이유를 듣고 싶네요.”
“이유라고 할 것도 없어. 아까 팍스 로드와 동일한 의견이니까.”
“왜죠. 서 대륙과 북 대륙도 전쟁을 했습니다. 우리라고 못할 게 있습니까?”
“아, 그래서 똑같이 하시겠다고?
“비꼬시는 건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번 전쟁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미래의 경쟁자를 떨어트리는 데 있어요. 그 외에는 전부 따라오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만. 듣기 싫어.”
“나탈리. 제가 여기 앉은 열여덟 명만 보고 이런 말을 꺼낸 게 아니잖아요. 멀리 보고, 남 대륙 전체를 생각해서 꺼낸 말입니다.”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 좀 해!”
그때 더는 듣기 싫다는 듯, 나탈리가 고함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도의(道義)를 말하는 거라고!”
“…도의…. 요?”
이안은 한 방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도의! 동 대륙이 우리한테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어? 아니잖아. 그럼 우리가 동물이야? 약하다고 잡아먹게?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거야?”
이어지는 고함에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돌연 킥 웃음을 터뜨렸다.
“도의, 도의라…. 하하, 하하하하!”
미친 듯이 터뜨리는 웃음에 나탈리는 주춤 물러났다. 아미가 사정없이 찌푸려지고, 두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너…. 이안 맞니?”
그 말에 이안은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안경을 들어 손등으로 눈을 훔친 후, 머리를 흔들었다.
“아,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너무 웃겨서요.”
“웃기다고?”
“도의. 좋은 말이죠. 좋습니다. 그럼 하나 묻고 싶은 게 생겼는데요.”
“…뭔데.”
“그렇게 도의를 따지시는 분이, 왜 오크 성 공략 때는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우리가 쳐들어가기 전까지는, 서로 크게 마주칠 일도 없었는데요.”
“장난해? 오크랑 인간이랑 같아?”
나탈리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한 순간, 이안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뭐가 다르죠?”
“뭐, 뭐?”
“예. 물론 종족이 다르기는 해요. 하지만 그 외에는 전부 똑같아요. 제가 겪은 오크는 확실히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어요. 오크 로드라는 족장도 있었고, 주술사라는 부족장도 있었죠. 그럼 분명 아비도, 어미도, 새끼도 분명 있었겠죠? …그런데, 그걸 씨 하나 남기지 않고 무참히 짓밟은 게 바로 우리예요. 우리가, 인간이 북진하지만 않았다면, 지금도 알아서 잘살고 있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너!”
“아니면, 인간이 아닌 괴물이니까 괜찮다. 이겁니까? 그러고 보니 그때, 아키로프와 누가 더 많이 죽이나 내기도 하셨잖아요?”
“…….”
나탈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입은 뻐끔거리고 있었으나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이안은 벗은 안경을 느긋이 고쳐 썼다.
“이 세상에서만큼은,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고요. …아니, 적어도 사람이기 이전에.”
그리고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며,
“우리는, 사용자입니다.”
조용히 말을 맺었다.
침묵이 흘렀다. 나탈리는 한동안 충격받은 얼굴로 멍하니 이안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건….”
망연하던 낯에 쓸쓸한 빛이 스쳤다.
“…궤변이야.”
그 한 마디만 남겨두고서, 나탈리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누군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 바람처럼 회의장에서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오늘 내용을 적다 보니, 쿠샨이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