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65
00864 D-Day, Five. =========================================================================
“흠…. 이거, 멜리너스 님도 같은 의견인지요?”
한동안 입속으로 혀만 차던 카르페디엠 로드가 눈을 돌렸다. 상대가 명성 높은 선지자라 그런지, 아니면 험악해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아까보다 훨씬 점잖아진 말투였다.
잠시 후, 나탈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멜리너스가 천천히 시선을 거뒀다.
“처음 밝혔듯이, 이 자리는 우리는 물론, 영주들의 반응을 보고 의견을 들으려는 자리일세.”
“그래요? 저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바인데요.”
“왜지?”
“사용자 이안의 설명에 공감했으니까요. 사실 그동안 오딘의 행보를 보며 답답할 적이 한두 번이…. 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그냥 불만이 있었다뿐이지, 틀렸다는 말은 아니니까요.”
황급히 말을 정정한 카르페디엠 로드는, “크흠.”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말입니다. 방금 들었던 말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기 이전, 사용자다. …그래요. 우리는 사용자입니다. 홀 플레인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
“아, 물론 인간이기를 포기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안이 그러지 않았나요. 우리만 좋자고 하자는 게 아니라, 멀리 보고, 끝에는 남 대륙 전체를 위한 일이라고요.”
“도의요? 물론 좋지요, 좋아요!”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죠. 이안의 말대로, 만약 중앙을 둘러싼 경쟁이 필연이라면? 몇 년 후, 오늘의 추측이 현실로 다가와 사 대륙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래서 결국에는 서로 죽고 죽여야 한다면, 그때는 어떡하시렵니까? 이 좋은 기회를 놓친걸, 누구를 원망해야 하나요?”
카르페디엠 로드는 이 모든 이야기를 아주 빠른 속도로 말했다.
“뭐, 꺼림칙해 하시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워낙 정의로우신 분들이니만큼.”
“저도 카르페디엠 로드의 의견에 일부 공감해요.”
그때였다. 갑자기 끼어든 음성에 한창 열변을 토하던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하는 중간에 끊겨서가 아니라, 아마 다른 이유 때문인 듯했다.
“…예?”
“왜요?”
망연히 반문하자, 느슨한 보랏빛 가운을 걸친 여인이 우아한 미소를 짓는다.
“올리비아…. 아니, 엘핀 로드?”
“네?”
“방금 제 말에 동의한다고 하셨어요?”
“아니요? 완전 동의는 아니고, 일부 공감한다고 했는데요?”
능청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말에, 카르페디엠 로드는 어색이 주변을 둘러봤다. 원탁의 기사들도 거의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녹스나 카르페디엠은 애초 호전성이 강한 클랜이니 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마 엘핀 로드까지 동의할 줄은 예상 못 했다는 반응이었다.
“그 말대로예요. 앞으로의 전쟁이 필연이라면, 경쟁자가 강해지기를 기다려주는 것보다 지금 공격하는 게 가장 나은 선택이겠죠. 논리적으로 문제는 없어요. 단.”
조용히 말을 잇던 올리비아는, 돌연 끝에서 반전을 예고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아직 추측에 불과하다는 거죠.”
그랬다. 아무리 가능성 높은 예상이라고 해도 확실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사안에서는 특히 그렇다. 아마 살인과 약탈에 젖은 서 대륙이었다면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 대륙은 감정보다는 합리를 중요시한다. 그냥 ‘사용자니까.’ 라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소리다. 내심 구미는 당길지 모르나, 억측으로 받아들일 소지가 다분하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온 걸까. 그랬더니 회의 서두에 들었던 말이 유독 걸리더라고요.”
“서두에 들었던 말이라면….”
“천사가 우리를 소환한 목적과 서로와의 관계요. 저는 오히려 그 점에 주목하고 싶네요.”
“…….”
그러자 이안이 굳었던 얼굴을 풀더니 오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니까.”
올리비아는 시종일관 눈을 감고 있는 엘도라를 흘깃거린 후, 멜리너스를 돌아봤다.
“오딘의 진정한 목적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예를 들어…. 떠보기, 라고 하면 되려나?”
“허허….”
그때 멜리너스가 입을 둥글게 벌리며 허허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장난을 들킨 아이처럼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머금는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이거 참, 엘핀 로드한테는 못 당하겠군.”
그렇게 두어 번 머리를 흔들더니 천천히 수염을 쓸어내린다.
“역시 그랬군요.”
“잠시만요. 그럼 그냥 한 번 해본 말이라는 겁니까? 왜 갑자기 분위기가 이렇게 흐르는데요.”
올리비아가 조용히 끄덕이자, 카르페디엠 로드가 냉큼 끼어들었다.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어느새 평소의 온화한 얼굴을 되찾은 이안은, 차분히 자리에 앉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 자리의 목적은 아까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는가.”
멜리너스도 타이르듯이 말하며 이안의 말에 동조했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실로 잘 보셨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지만, 핵심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 오늘 회의의 주된 목적이 천사의 속내를 밝히는 것이니.”
“좋은 생각이에요. 우리를 꼭두각시로 활용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천사의 입장도 들어봐야 하니까요.”
“그렇지. 잘못된 명제를 반대로 뒤집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참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잠깐, 잠깐만요. 지금 저만 못 따라가고 있는 겁니까?”
이야기가 오고 가는 와중, 카르페디엠 로드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머리 회전이 빠른 이들은 ‘아.’ 하는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해 못 한 이들이 있음을 알았는지,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아까 그랬죠?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다고. 말인즉 확신을 얻겠다는 거예요. 해답은 천사들이 갖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걸 구하는 과정으로 모종의 방법을 사용하겠다는 거고요. 개인적으로 직접 묻는 것보다는, 이렇게 의표를 찌르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 보이자, 혀를 차며 말을 잇는다.
“그냥, 천사의 반응이나 태도를 보고 결정하겠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허, 참.”
“아직도 모르겠어요?”
“아니. 그래서 하자는 거요, 말자는 거요. 우리더러 뭘 어쩌라는 겁니까?”
그러자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몇 명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때였다.
“…이안.”
불현듯 들려온 침잠한 음성. 그 목소리에 탁상 전원의 눈동자가 한 곳으로 쏠렸다.
조금 전까지 계속 침묵하고 있던 엘도라가, 어느새 눈을 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을 모은 듯한 눈동자는, 흡사 가열한 것처럼 형형히 빛나고 있다. 시선이 탁상을 쭉 훑자, 잠시 꿈틀거리던 소란이 금세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럼 회의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고…. 돌아가시기 전, 가장 중요한 내용을 전달하겠습니다.”
엘도라에게 호명된 사내가 입을 열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
“그러니까, 부탁이 있다는 말이죠.”
조심스러운 반문에, 이안은 씩 웃었다.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으나 주변이 워낙 고요하니 확실히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방 안에서는 어떤 반응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러자 문밖에 선 이는 좀 더 기다리다가, 한 번 더 노크한 후 조심스레 문을 열어젖혔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들어온 노인은 멜리너스였다. 항상 소중히 하던 흰 수염을, 흔들거리는 것이 귀찮다는 양 틀어쥔 채로 걸음을 옮긴다.
방 안에는 한 사람이 더 있다. 아니. 사람치고는 심한 이질감이 느껴졌으나, 어쨌든 외양은 긴 흑발의 여인이었다.
“타나토스 님. 방금 회의가 끝났습니다.”
어지러운 책상에 앉은 타나토스는 손으로 뭔가를 만지작거리는 등, 무언가에 한창 열중하는 중이었다. 잠깐 눈을 들기는 했지만, 곧 도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 마디 말은 덧붙였다.
“어땠지.”
“반응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몹시 좋지 않습니다.”
흘끔, 눈치를 살핀다. 그러나 타나토스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팍스 로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며 자리를 박차고 떠났고, 나탈리도 회의 도중 나가버렸지요.”
“…….”
“딱히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원탁의 기사도 과반수가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습니다. 올리비아가 적절히 끼어들어 간신히 밀어붙이기는 했지만….”
“…….”
차분히 이어지던 설명이 갑자기 흐려졌다. 멜리너스는 순간적으로 눈을 돌렸다. 창밖의 풍경은 서서히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지만, 아직 붉은빛은 남아 있다.
그러나 방 안은 이상할 정도로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방에 내려앉는 어두운 침묵에 압박을 느낀 걸까. 멜리너스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타나토스의 말을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적막한 공기가 온몸을 살금살금 옥죄는 가운데,
“그랬군.”
마침내 무심한 음성이 흘렀다.
“그, 그러니까.”
멜리너스는 입을 열자마자, 그간 자신이 숨을 참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급합니다.”
숨결을 토해내며 힘겹게 말을 맺는다.
“그래서?”
“…예?”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그, 그냥 시간을 좀 더 들여서….”
멜리너스의 음성은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다는 듯 덜덜 떨려 나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둘은 멜리너스와 타나토스가 아닌, 벨리알과 사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나마 평소 신뢰받고 악마 14 군주 정도 되니 이렇게나마 말하는 거지, 피조물 처지였다면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이미 끝난 지시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내가 이 몸을 얻고 두 번 말하는 취미가 생겼다고 말한 적이 있나?”
“아, 아닙니다. 단지 아까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주사위는 던져진 거야. 혼란은, 감수하겠다고 했다.”
“…….”
“아니면 시간만 바라다가, 어느 날 갑자기 들켜서 척살 당하는 상황을 바라는 건가? 그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상황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심하면 됩니다. 들키지 않으면 됩니다. 서 대륙 때처럼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냥 조금만 더….”
여기까지 말한 멜리너스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사실 나도 좀 아쉽기는 해.”
동시에 앞에서 들려온 말소리는 예상외로 수긍하는 어조였다. 그러나 반신반의하며 눈을 뜬 순간, 차가운 미소를 목격한 멜리너스는 황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쯤이면 북 대륙이 약속의 신전에 도착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럼 우리는 늦게나마 노선 변경에 성공한 남 대륙에서, 손가락 빨며 구경만 하면 되는 건가?”
“그, 그건.”
“그것도 아니면. 혼란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쫓아가서, 개박살 나면 되겠군.”
“사, 사탄!”
그 순간, 쿵! 크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멜리너스는 흠칫 몸을 떨며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떴다.
“타나토스다.”
조용하던 방 안에, 차갑고 소슬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 그 속에서 잠시 동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소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계획은 변경하지 않는다. D-Day도, 동 대륙 정벌도. 모두 예정대로 진행한다.”
이윽고 호되고 냉정한 음성으로 질책한 타나토스는, 문득 손에 든 무언가를 휙 던졌다. 작고 흔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방이었다.
가까스로 받아낸 멜리너스는, 한껏 놀란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여러 물건으로 흐트러져 있던 주변이 조금은 깨끗해져 있다. 아마 조금 전까지 책상을 어지럽히던 것들이 이 가방 안에 들어간 듯싶다.
“이건….”
“저번에 루시퍼와 같이 보기는 했지만, 확실히 천사가 재밌는 물건을 만들었어. D-Day 때 엘도라한테 전하면 된다. 말은 알아서 잘하리라 믿는다.”
그러자 멜리너스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설마, 성공하신 겁니까? 그래서 계획을 앞당기신 겁니까?”
“이놈의 힘으로는 힘들더군. 그래서 내 힘을 좀 썼지. 조금만 진심으로 하면 천사의 감지 따위….”
그 순간이었다. 말하는 와중, 느닷없이 타나토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상대가 가방을 들여다보며 정신이 팔린 것을 보고는, 몰래 손을 내렸다.
그래서, 멜리너스는 볼 수 없었다. 책상 아래, 수전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친 듯이 진동하는 가냘픈 팔뚝을.
“예? 타나토스의 힘을 이용하셨다고요?”
잠시 후, 멜리너스가 반문했다. 가방 안 내용물을 확인해서 그런지, 약간 늦은 반응이었다.
“으음. 아, 그나저나 에르윈은 어떻지? 꽤 오랫동안 안 돌아오는 것 같은데.”
“아마 그럴 겁니다. 대충 들어보니 요정 여왕 선발에 얽혀서 길게 체류하는 것 같습니다.”
“요정 여왕이라…. 그렇게나 중요한가?”
“예.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정이라는 종족은 여왕을 굉장히 신성하게 여기는 것 같더군요.”
“그런가. 그러고 보니 남 대륙과 요정은 동맹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맞습니다. 오크 성 공략 때 간접적으로 지원도 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타나토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흠…. 요정 여왕이라. 왠지 일말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가시나무 관의 인정을 받은 순간, 모든 정령이 고개를 조아린다. …전설에 따르면, 초대 여왕이었던 알체스테의 일격은 바다를 반으로 쪼갤 정도였다고 합니다.”
“흐흐. 과장이 심한데.”
“애초 전설이 그러니까요. 그래도 일인 군단 이상이라는 기록도 있는 만큼, 동맹 관계를 이용하는 것도 고려해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지금은 하나가 아쉬우니. 뭐, 우선은 D-Day에 신경 써야겠지만.”
“그럼….”
그리하여 화제는 자연스레 요정을 끌어들이자는 쪽으로 넘어갔다.
…당연한 소리지만, 훗날 이 계획이, 이 선택이 어떻게 돌아올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적다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
아. 에피소드 5도 이제 2, 3회 정도 남았습니다.
최대한 2회 안으로 끝내보겠습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