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80
00879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
‘갈림길이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로 지금이 가네샤가 말했던 ‘중요한 선택을 할 때’가 아닌가 하는.
“결국, 양자택일이라는 건가. 동 대륙을 버리고 중앙 대륙을 공략하거나.”
“아니면 동 대륙을 구원하고, 악마를 격멸시키거나.”
세라프가 수긍하는 어조로 말을 받는다.
나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사 내부 여론은 어떻지?”
“…만장일치로 후자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주십시오. 저희는 수현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동 대륙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말하는 중간에 손을 들자, 세라프가 의아히 말끝을 흐린다.
“몇 가지 궁금한 게 생겼으니 그거나 좀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설득은 됐으니까.”
이미 결심은 내렸다. 아니. 확신이 섰다고 해야 하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서로 간의 감정 싸움이 아닌, 직면한 사태를 최선의 방향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천사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선택해야 할 것은 명백해졌다. 이제 남은 건 가야 할 길로 가는 것뿐.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도 있으니까.
“먼저 악마가 동 대륙을 정벌하면 얻을 수 있는 이득부터 말해봐.”
“알겠습니다. 첫 번째는, 차후 각 대륙이 중앙 대륙을 둘러싼 경쟁 구도와 연관하여, 남 대륙 사용자들을 효과적으로 선동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럴듯한 명분을 부여해주는 동시에 서로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이지요.”
“그건 선동이 아니라 맞는 말…. 아니, 그리고?”
“두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만. 혹시 수현은 이 차원의 존재가 중간 세계로 내려갔을 때,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총량을 제한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어느 정도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가령 이번 사태의 경우, 악마와 마족은 소환이 방을 나온 순간부터 법칙의 적용을 받았을 겁니다.”
“설마 그 법칙을 깨는 방법이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인과율의 법칙은 절대 불변입니다. …단.”
혹시나 싶어 물어보자, 세라프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말끝에 불안한 반전을 덧붙였다.
“그들이 중간 세계에서 가용 가능한 힘. 그 힘이 회복되는 속도를 인공적으로 상승시킬 수는 있습니다.”
세라프의 말은 간단하다. 하나, 악마 본래의 힘이 100이라고 가정하면, 중간 세상에서는 20밖에는 사용할 수 없다. 둘, 인과율의 법칙의 작동하는 즉시 악마의 힘은 1로 떨어진다.
말인즉 바로 20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갓 소환됐을 당시에는 극도로 약해진 상태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데, 1에서 20까지 회복되는 속도를 인위적으로 높이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물끄러미 응시하니 세라프가 바로 말을 잇는다.
“수현. 혹시 지옥 대공이 출현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아.”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세라프가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달았다. 동시에 왜 악마가 동 대륙 정벌을 하려는 지도.
“설마, 인간을 양분으로 삼겠다는….”
“Yes. 그것 말고는 굳이 동 대륙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인간, 특히 사용자는 힘을 회복시키는데 최고의 양분이니까요.”
“잠깐만. 그럼 굳이 동 대륙으로 갈 필요는 없지 않나? 사용자는 남 대륙에 더 많을 텐데.”
“그럼 서로 손을 잡은 이유가 없어집니다. 오히려 역으로 당할 가능성도 없잖아 있을 겁니다.”
아, 잠식이 아니라 공존이라고 했나.
아무튼, 우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자. 세라프도 말했듯이 이미 동 대륙으로 진군하는 중이라고 보는 게 좋겠다. 쫓기는 입장인 만큼, 아직 남 대륙에 유유자적하게 있을 가능성은 적을 테니까.
‘이건 시간 싸움이다.’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현시점에서 시간은 우리 손을 들어주고 있고, 반대로 악마는 시간에 쫓기는 처지다. 그런 만큼 사탄은 간절히 원하고 있을 것이다. 북 대륙이 동 대륙을 버리고 약속의 신전으로 진군하는 상황을 말이다.
왜냐고?
그래야 아무 방해받지 않고 원하는 만큼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돌아오는 길을 노려, 단판 승부를 노리시겠다.’
그렇게는 안 되지. 알아차린 이상 뜻대로 움직여줄 생각은 없다. 선택권은 아직 북 대륙이 쥐고 있으니.
“아, 그러고 보니 동 대륙은 아직 너희 관할 안에 있지 않아?”
“서 대륙 때처럼 편입을 생각하고 계신다면, 상당히 위험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째서? 성공만 한다면, 제대로 카운터 치는 건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현재 동 대륙의 상황이….”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니 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니. 신 대륙은커녕, 이제 겨우 대 도시를 공략한 수준이라고? 우리가 몇 년 전 바바라를 점령했더라?
이럼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 대륙처럼 첫 침략 당시 개척한 루트라도 있다면 모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상, 오면서 지리멸렬 전멸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동안 딱히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대륙을 횡단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결국에는 구하러 갈 수밖에 없잖아.
무언가 입이 쓰다는 생각에 한동안 입맛만 다셨다.
하지만, 곧 몸을 일으켰다.
“그래, 알겠다.”
필요한 정보는 전부 들었다. 남은 건 행동만이 있을 뿐.
“수, 수현?”
“이만 돌아갈게. 서 대륙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동 대륙으로 가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거든.”
“네?”
“…왜?”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자, 제단에서 일어난 세라프가 보였다. 몹시 놀란 눈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응.”
“저, 정말로 저희의 의견을…?”
“착각하지 마. 너희 의견을 무조건 따른다는 게 아니야. 그저 내 생각과 우연히 일치했을 뿐이니까.”
나는 가볍게 어깨를 들먹인 후 도로 몸을 돌렸다. 생각하는 시간은 충분히 길어도 되지만, 결정을 내린 이상 신속하게 움직인다. 그렇게 생각하며 포탈로 들어가려는 찰나, 돌연히 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수현.”
거의 동시에 걸음이 덜컥 정지하고 말았다. 왜냐면 부드러우면서도 애절한 손길이 내 옷깃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한껏 기함해 돌아보니 세라프는 어느새 등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이대로, 가시렵니까…?”
“뭐?”
뭐, 뭐야. 가시렵니까 라니. 그러니까 꼭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 같잖아.
갑자기 돌변한 태도에 나는 당황을 금치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아니. 열흘 후에 도착한다며. 그리고 동 대륙 구원군도 편성하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응?”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할 수 있는 선이라면 최대한 도와드리겠다고요.”
“…….”
“십 분, 아니 오 분이면 됩니다. 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세라프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신뢰의 빛을 빛내고 있었다.
*
아틀란타.
이스탄텔 로우 클랜 하우스.
탁, 탁….
한소영은 방 안에 홀로, 왼손으로 턱을 비스듬히 괸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눈이 책상에 놓인 기록을 멍하니 응시하는 것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혹은 별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탁, 탁….
검지와 중지 틈에 낀 깃 펜을 좌우로 흔들 때마다, 작게 부딪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린다. 그러다 문뜩, 하염없이 흔들리던 깃 펜이 우뚝 바로잡혔다. 동시에 눈을 살짝 치뜬 한소영이 차분히 손을 놀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뭘 저렇게 열심히 써내려 가고 있는 걸까? 아마 클랜 행정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
어디 보자. 우선 기록 상단부터….
1. 상황 설정 : 나와 그의 극적인 재회.
그 : 어라, 왜 모른 척하시는 거죠. 설마 저를 잊으셨던 겁니까?
나 : 몰라요. 머셔너리 로드야말로 까맣게 잊고 있으셨으면서….
그 : 하하. 잊기는요. 정말 보고 싶었다고요. …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제부터 소영이라고 불러도 될까?
나 : 뭐, 뭐라고요? 그게 무슨! 으읍!(여기서 거세게 입을 부딪쳐온다.)
…….
…………어?
“후유.”
한소영이 긴 한숨을 내쉬며 깃 펜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황혼 때 드리우는 붉은 노을처럼 아주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래에는 또 뭘 썼길래?
2. 상황 설정 : 침대 위의 그와 나. 그리고 문틈에서 경악한 눈으로 서 있는 그 여인.
그 : 그런데 옷을 꽤 야하게 입었네? 일부러 그런 거야?
나 : 그, 그건 또 무슨 버릇없는 말인가요. 말조심하세요.
그 : 뭐? 말투가 건방지네? 안 되겠다. 소영이 너, 교육 좀 받아야겠어. 지금 당장 바지 벗고 속옷 내려. 그리고 뒤돌아서 엎드려.
나 : 뭐라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정말 제가 아는 머셔너리 로드가…!
그 : 조용히 해! 이건 다 소영이 탓이니까. 네가 너무 야하고 음란하니까 내가 참지 못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잘못한 건 너야.
나 : 말도 안 되는 궤변을…! 아, 안 돼요! 이러지 마요, 제발! 문밖에 게헨나 씨가 있다는 말이에요!
그 : 상관없어! 이제 나한테는 오직 너밖에…!
나 : 아, 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몰라몰라퍄퍄퍄퍄뿅뿅….
…이건 과연 무슨 내용일까?
아니.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쿵!
그때, 기록의 위로 반듯한 이마가 세게 맞부딪쳤다. 고개를 처박은 상태서 스리슬쩍 드러난 입가가 실룩, 실그러진다. 책상 위에 올려둔 양손은, 꽉 쥐다 못해 부르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스스로 써놓고도 아주 부끄러워 죽겠는 모양이다.
그때였다.
“!”
연달아 이마를 찧고 있던 한소영이 느닷없이 휙 고개를 치켰다.
타다다다, 타다다다!
그리고 문밖에서 모종의 기척이 들린 그 찰나의 순간, 무려 세 가지 행동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먼저 기록을 무영창 주문으로 태워버렸고, 자세는 칼같이 바로 잡으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 기록을 꺼내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자,
“언니! 언니이이!”
발로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박다연이 호들갑을 떨며 등장했다.
“또 웬 호들갑이니.”
후우, 숨을 흘린 한소영이 짐짓 엄한 음성으로 말한다. 흡사 중요한 일을 방해받아 자못 짜증이 난다는 투였다. 뭐, 망상을 중요한 일에 포함할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어쨌든 박다연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로 쉴 새 없이 떠벌렸다.
“떴어요? 언니도 떴어요?”
“응? 떠?”
“아니, 뜨셨느냐고요!”
“아까부터 무슨 말이니. 뭐가 떴다는 건데.”
이번에는 연기가 아닌, 정말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나 박다연은 갑갑하다는 듯이 가슴만 탕탕 치더니 불쑥 창문을 가리켰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밖에 안 봤어요? 완전 난리가 났는데!”
“…난리?”
“해밀, 마법의 탑, 리버스, 한, 신 코란, 심지어 북부 연합까지. 대표 클랜은 물론, 대형 클랜까지 모조리 머셔너리 캐슬로 모이는 중이라는 말이에요…!”
“…….”
말이 끝난 순간, 한소영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창문을 향해 느릿하게 걸어가며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뭐가 떴다는 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지만, 적어도 박다연의 태도는 장난이라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그 순간이었다.
정확히는 의아히 창문 너머를 내다보려는 순간,
띠링!
익숙한 신호음이 갑작스레 귓전을 울린다.
이윽고 한소영이 놀란 얼굴로 턱을 젖히자, 허공에 서서히 글자가 출력되기 시작한다.
오직 한소영만이 볼 수 있는 메시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