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81
00880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
세라프가 말한 ‘방법’이라는 건 생각보다 간단했다.
북 대륙 사용자 중 일부에게 ‘임무 메시지’를 보내겠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중견 클랜 이상의 간부급 사용자를 호출해, 현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겠다는 소리였다.
물론 천사의 속내는 짐작이 간다. 남 대륙이 악마에게 넘어간 이상, 천사의 입장에서 북 대륙은 반드시 잡아야 할 카드다. 서 대륙은 이미 악마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고, 동 대륙은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니까. 여기서 우리마저 악마와 동맹을 맺으면 정말로 답이 없어지니, 그걸 방지하려는 차원에서 도와주려는 것이리라.
결과적으로는 단합하는 과정을 대신 맡아주겠다는 것인데, 나로서는 하등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부터 전쟁이다!’ 라는 가당찮은 한 마디로 사용자들이 움직여줄 리가 없거니와, 안 그래도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천사가 전면적으로 나서준다면, 명분 부여 및 설득에 들어가는 시간도 훨씬 절약될 터.
한편, 정작 내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현재 북 대륙이 해결해야 할 상황은 두 개. 하나는 곧 침공해올 서 대륙을 격퇴하는 것. 그리고 남은 하나는 동 대륙을 구원하는 것.
여기서 나는 또 두 갈림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모두 힘을 합쳐 최대한 빠르게 서 대륙을 분쇄한 후 동 대륙으로 떠나거나, 아니면 적절히 힘을 나눠 두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거나.
전자는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자칫 잘못하면 사탄의 의도대로 놀아날 가능성이 높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서 대륙이 미끼라는 걸 알고 있는 이상, 버리는 패를 좇는 건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세라프와 이야기를 끝내고 소환의 방을 나온 후, 나는 신속히 머셔너리 캐슬로 향했다. 돌아가는 와중, 한산하던 도시가 서서히 어수선해지기 시작해 걸음을 더욱 바삐 놀렸다.
그렇게 정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문득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정원에는 마르가 시커먼 두 놈 앞에서 사뿐사뿐 거닐고 있다. 안현과 진수현은 그런 마르를 보며 입을 헤 벌리고 있었고.
“저 어때요?”
“예뻐.”
“응? 예뻐요?”
“잘 어울린다는 소리야.”
흠. 뭘 하고 있던 거지?
“마르?”
이름을 부르자, 한 바퀴 빙그르르 회전하던 마르가 몸을 기우뚱하며 멈춰 섰다. 그리고 내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더니 “아빠!” 반갑게 외치며 화사하게 웃는다. 허나 나는 마르를 보며 머리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 복장은….”
아닌 게 아니라, 마르는 평소 전혀 볼 수 없었던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머리띠, 가죽 갑옷, 장갑, 롱 부츠…. 얼씨구? 목걸이도 걸었잖아?
“아, 형 오셨어요.”
“형님! 저희가 창고에서 장비 좀 꺼냈습니다. 허락하셨다고 들어서요!”
빤히 쳐다보고 있자, 덤과 더머가 으스대며 걸어 나왔다. 왜 우쭐대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말은 사실은 듯싶다. 마르는 뺨을 살짝 붉히며 머리에 낀 은색 머리띠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네. 장비를 고르는데 오빠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리고 이 머리띠는 유정이 언니가 선물해주셨고요.”
“이유정이? 아….”
그러고 보니 저거, 순결의 머리띠였지? 원래는 마르가리타가 갖고 있던 것이니 일종의 유품인 셈이다.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마르가 양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아빠아빠. 저 어때요? 잘 맞는 것 같아요?”
“어? 어, 그러네.”
담담히 수긍하기는 했지만, 사실 넝마를 걸쳐놓아도 어울릴 것 같았다. 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도 있잖아.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마침 잘됐다. 너희 둘, 시킬 게 좀 있거든.”
“예 형?”
“어라? 저 사람 누구였더라?”
“……?”
그때였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진수현이 갑자기 정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배가 불룩 튀어나온 덥수룩한 사내가 성큼성큼 들어오는 중이었다. ‘전투 명가’ 리버스 클랜의 김덕필이다. 벌써 도착한 건가.
“어이, 머셔너리 로드!”
나를 보자마자 허둥지둥 뛰어오는 걸 보니 아마 그 메시지를 본 듯싶다. 아마 굉장히 혼란스러울 테니 일단 진정시키는 게 좋겠다.
“오랜만입니다.”
“여~. 오랜만….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김덕필은 손을 들어 화답했다가, 벌컥 소리 지르며 달려왔다. 그리고 말했다.
“연초 좀.”
불쑥, 손을 내밀면서.
…이 인간이 정말.
순간 저 솥뚜껑만 한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 싶었으나, 주섬주섬 연초를 꺼내 세게 튕겼다. 김덕필은 솜씨 좋게 잡아챘고, 싱글벙글 웃으며 점화석을 꺼내 들었다. 젠장, 괜히 아니꼽다.
“메시지는 확인하셨습니까?”
“천사가 보낸 거? 응, 봤지. 봤으니까 왔지.”
퉁명스레 말하니 씨익, 멋쩍게도 웃는다. 예상보다 상당히 담담한 반응이다. 이건 좀 의외인걸.
“그런데 말이야, 나 말고도 메시지 받은 놈이 없지는 않더라고?”
“아마 그랬을 겁니다.”
“역시 너는 알고 있었나…. 한데, 그놈들은 신전으로 오라고 했다던데? 나야 메시지 하단에 너를 찾아가라고 적혀 있어서 여기로 왔다만.”
“음….”
그렇게 말한 김덕필은 연기를 푹 뿜으며 나직이 투덜거렸다.
“옌장, 당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거 알아? 지금 완전 난리 난 거.”
“뭐, 대충은요.”
“서 대륙의 공격, 남 대륙의 반란, 동 대륙의 구원…. 뭔 말인지 이해가 가야지.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한데, 머셔너리 로드. 이거 정말이야?”
“저도 믿기는 어렵지만, 그렇게 듣고 왔습니다.”
김덕필이 은근한 말투로 물어, 나는 은근슬쩍 천사에게 책임을 돌렸다. 애초 이렇게 하기로 세라프와 이야기했으니까. 설득은 천사에게 맡긴다. 내가 하는 건 현상에 대한 집중뿐.
그 순간, 누군가가 또 정문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번에는 공찬호였다.
“허, 저놈도 왔군.”
김덕필도 봤는지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죠. 아직 올 사람들이 꽤 있으니까요.”
“후우우웁! 그러자고.”
김덕필은 연초를 필터 끝까지 빨아들이며 동의했다.
*
조금이지만 정신이 지친 듯하다. 과장 조금 보태서 뇌가 찌릿찌릿 떨리는 것 같다. 나는 상석에 깊숙이 등을 기대며 주변을 살폈다. 머셔너리 캐슬, 일 층 회의장에는 어느새 아홉 명의 사용자가 도착해 앉아 있었다.
중앙 관리 기구 수장 이효을.
동 도시, 이스탄텔 로우 클랜 로드 한소영, 아사신 클랜 로드 이찬희.
서 도시, 북부 연합의 공찬호.
남 도시, 리버스 클랜의 김덕필, 마법의 탑 클랜 로드 선율, 신 코란 연합의 박환희, 한 클랜 로드 성현민.
북 도시, 해밀 클랜 로드 김유현.
그리고 머셔너리 클랜 로드인 나까지.
총 열 명이 모였다. 이제 올 사람은 다 온 셈이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무겁다. 여기 앉은 한 명 한 명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클랜 소속이나, 오늘따라 얼굴들이 딱딱히 경직돼 있다. 전원 메시지를 보고 왔을 것이고, 그만큼 충격이 크다는 방증이리라.
뚫어지라 쳐다보는 시선을 이기지 못해, 나는 이마를 짓누르던 손을 떼며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메시지는 다들 보고 오셨으리라고 생각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네. 보고 왔는데, 질문 있어요.”
입을 열자마자 선율이 손을 들었다. 예의 장난기 가득한 낯빛이 아닌, 처음 보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러면 약간 부담스러워지는데. 워낙 직설적인 성격이기도 하고.
“메시지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거잖아요. 현재 서 대륙이 쳐들어오고 있다. 남 대륙은 웬 이상한 놈들과 손을 잡고 천사를 적으로 돌렸다. 그리고 동 대륙을 공격하러 가고 있는데, 우리는 서 대륙 침공을 방어하는 동시, 동 대륙을 구원하러 가야 한다. 맞나요?”
선율은 이 모든 말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말했다. 확실히 마법사라서 그런가. 무언가 상당히 생략된 것 같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긍정했다.
“맞습니다.”
“왜요?”
눈살을 살짝 찌푸린 선율이 이번에도 곧장 반문한다. 살짝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어투.
“생각해봐요. 먼저 서 대륙은, 글쎄요? 솔직히 뭔 자신감으로 또 오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예전의 패배를 복수하러 온다는 셈 치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죠. 그리고 우리 터전을 방어한다는 명분도 있으니 기꺼이 참가할 생각도 있고요. …하지만 동 대륙은 좀 아니잖아요?”
“…….”
“왜냐면, 아니. 됐어요. 구구절절 말할 필요도 없이 머셔너리 로드라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아시겠죠. 아무튼, 제가 알고 싶은 건 딱 두 가지에요. 남 대륙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왜 우리가 그 싸움에 끼어들어야 하는지. 머셔너리 로드는 현 북 대륙 수호자 입장에서, 이 두 사안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는 답변을 해주기를 바라요.”
“잠깐. 그건 내가 얘기해도 될까?”
그때였다. 미리 준비해둔 답변을 하려는 찰나, 이효을이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선율은 조금 불쾌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간신히 참는 듯했다. 일종의 전관 예우라고 해야 하나.
“거두절미하고 바로 말할게. 선율? 네가 뭘 궁금해하는지는 알겠는데, 그건 아마 김수현도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을 거야.”
“뭐라고요?”
선율이 낯을 와짝 찡그리자, 이효을이 손을 휘휘 젓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도와주려는 것 같다.
“진정해. 나도 수호자를 해봐서 알 거든. 뭔 일이 터졌을 때, 사전에 설명을 듣는 경우도 있지만, 듣지 못하는 경우도 꽤 있었어.”
“그래서, 이번이 그 듣지 못한 경우다?”
“그렇지. 왜냐면 이런 경우는 대체로….”
“아~. 그럼 우리는 그냥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건가요?”
“아니, 얘.”
“이봐요. 지금 장난해요? 전쟁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별 같잖지도 않은 메시지 하나 툭 던져놓고, 그냥 까라면 까라?”
한껏 비꼬며 말하는 걸 보자, 왜인지 좋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혼란스러울 거라고 생각은 했으나 예상외로 강도가 심하다. 심지어 천사를 적대하는 프레임이 생성될 기미조차 보이고 있다.
무언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찰나.
쾅!
“어이, 거 입 좀 다물지 그래.”
흡사 책상이 부서지는 소리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뭉클뭉클한 악기가 몰아쳤다. 선율은 흠칫 몸을 떨더니 떨떠름한 빛을 비췄다. 선율의 맞은편, 의자에 고개를 기댄 공찬호가 상대를 지그시 깔아보고 있었다.
“조잘~조잘, 말만 많아서 말이야. 역시 종자가 마법사라서 그런가?”
“뭐, 뭐라고요?”
“너만 혼란스러운 거 아니니까, 좀 닥치고 있으라고. 혼자서만 씨부렁거리지 말고.”
“…지금, 말 다하셨어요?”
선율의 눈매가 한껏 가늘어진다. 그러나 공찬호는 피식 비웃으며 소리 죽여 웃었다. 마치 네까짓 게 어쩔 거냐는 듯이.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죄송하지만, 저도 사용자 공찬호와 같은 의견입니다.”
그러나 그때,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말쑥한 사내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끝 쪽에 앉은 성현민으로 시선들이 돌아간다. 성현민은 가볍게 혀를 차더니 한숨을 길게 흘렸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사용자 선율의 의문 제기는 이해하고, 또 온당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요. 일단 가만히 좀 계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가만히 있으라고요?”
“무조건 껴 듣지 마시고 상황 좀 보시라는 말입니다. 왜 이례적으로 이런 메시지가 뜨고, 왜 다른 사용자는 신전으로 가는데 우리만 이 자리에 급하게 모였을까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어느 분 한 명 만만한 클랜이 없는데요.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
“그, 그건.”
“사용자 선율만 궁금한 거 아닙니다. 우리도 궁금합니다. 그런데 우선은 듣고 판단해보자는 겁니다. 의문 제기는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을 텐데…. 혼란스러운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사실 왜 머셔너리 로드에게 화를 내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비판의 날이 날카로울수록 언어는 부드러워야 한다고 했던가. 성현민의 논리 정연한 말에, 선율은 할 말을 잃은 얼굴을 보였다. 이어서 나를 스리슬쩍 흘겨보더니,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풀이 죽은 표정을 짓는다.
“말이 심했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됐어요. 아니, 아니에요.”
성현민은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가, 문득 나를 보며 몰래 신호를 보냈다.
…겨우, 이야기할 분위기가 조성된 듯하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원래 두 편 분량을 올려야 하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요즘 상당히 집중력이 떨어졌습니다.
어제 같은 경우는 단단히 벼르고 일찍 자리에 앉았는데, 4시간 동안 겨우 6줄을 적었습니다. 그나마도 지우려다가 간신히 참았네요.
사실 오늘 내용도 뭔가 마음에 차지 않고 자꾸만 부끄러운데, 왜 이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휴식은 문제가 아닌 것 같고,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그냥 눈 딱 감고 하루 더 쉴까 하다가, 여기서 손을 놓으면 상황이 더 악화될 것 같아서, 억지로라도 이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갑자기 사정이 생기지 않는 이상 일일 연재는 최대한 이어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