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95
00894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성내 전황도 서서히 정리되어 가는 것 같아, 나는 성벽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올랐다.
첫 전투서 대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겨우 떨거지에 불과한 놈들이다. 악마든 오딘이든, 연합군의 중심은 성 바깥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주력 부대의 움직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새 해는 서쪽으로 완전히 넘어갔고, 어스레한 석음(夕陰)이 도시로 그윽이 스며드는 중이다.
나는 성벽으로 올라선 후, 시력을 높여 성 너머를 응시했다.
그러자, 역시나.
어둑해져 가는 황혼 사이로, 떼로 움직이는 무수한 형상이 한눈에 시야로 잡힌다. 아마 우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듯싶다. 생각보다 움직임이 빠르다.
그나저나 악마는….
“수현아.”
상념에 잠긴 와중, 문득 나를 나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벽 계단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다. 형이다.
“넘어온 거야?”
“방금. 거의 끝나가는 것 같기는 하다만.”
어깨를 으쓱인 형은 성큼성큼 다가와 성벽을 짚었다. 나는 차분히 끄덕였다.
“간발의 차이였어. 한 시간, 아니 삼십 분만 늦었어도 돌이킬 수 없었을지도.”
“흠. 아군의 도주로를 확보하려는 건가? 아니면 네 방향에서 몰아치려고 저러나.”
“응?”
“상대 주력 말이다. 총 넷으로 나뉘어 움직이는 중이다. 아마 사 방향 정문을 점거할 속셈인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어두운 석양에 가려 몰랐는데, 형의 두 눈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제야 하늘을 빙글빙글 선회하는 노을빛 매 한 마리를 볼 수 있었다. 왜 멍하니 먼 곳만 바라보나 싶었건만, 쪼롱이의 눈과 동화해 도시 주변을 확인한 듯싶다.
“혹시 악마가 어디 있는지 보여?”
형이 한 바퀴 몸을 돌리더니 천천히 머리를 가로젓는다.
“아니. 안 보이네.”
“안 보인다고?”
“물론 쪼롱이 시야도 한계는 있지만…. 글쎄. 적어도 인근에는 없는 것 같다.”
“…….”
단언하는 음성에 나는 조용히 침묵했다. 약간 의외이기는 했지만,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선 예전 가브리엘의 입수한 영상으로 악마가 나왔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그리고 악마는 모종의 목적을 갖고 동 대륙을 침공했다. 그럼 그 목적이라는 것 때문에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도시를 점령한 이상, 메모리아 스톤도 얻었을 테니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고.
이렇게 하나씩 생각을 정리하니 불현듯 짐작 가는 바가 하나 생겼다.
아니, 거의 확신에 가까운 예측이었다.
웅웅웅웅, 웅웅웅웅!
그때, 느닷없이 거칠게 날뛰기 시작하는 흉포한 마력 흐름이 느껴졌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나도 모르게 턱을 젖히니, 어느 순간 잔뜩 밀려든 먹구름들이 하늘을 먹먹히 가리는 중이었다.
“형?”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자, 형은 어느새 온몸서 샛노란 번갯불을 튀기고 있었다. 춤을 추듯 지그재그로 들썩대던 금빛 전류는, 이내 짜르르 흘러 오른손으로 둥글게 뭉치기 시작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저릿해지는 게, 당장에라도 천지를 진동시킬 듯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는다.
그러할진대, 전방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형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다.
“뭐 하는 거야? 왜 뇌신을…?”
“응? 아, 이상한 행동을 하는 놈들이 보여서.”
“이상한 행동?”
“보아하니 세 부대는 정문에서 도주로를 확보하려는 것 같은데, 한 부대는 계속 안으로 들어오네.”
쿠르르릉, 쿠르르릉!
뒷마디는, 갑자기 치는 뇌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형이 팔을 앞으로 천천히 뻗는다.
“그러니까.”
그리고 싱겁게 미소 짓더니,
“가벼운 환영 인사 정도로 해둘까.”
딱.
가볍게 손을 튕겼다.
*
꽈르르릉, 꽈르르릉!
‘자, 이제 시작이야.’ 를 외치려던 아키로프는, 갑자기 귀를 후리는 뇌음(雷音)에 걸음을 멈췄다. 반사적으로 사방을 둘러봤으나, 어떤 이상 현상도 보이지 않는다.
“방금 무슨 소리…. 응?”
아니. 하나 있기는 했다.
좀 전까지 차츰차츰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건만, 소리 이후 갑자기 땅바닥이 환해졌다. 흡사 조명을 비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짧은 시간, 아키로프는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허나 곧 아차 소리 지르더니 황급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
하늘이 끓고 있었다. 방대한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먹구름. 서로 부딪치는 구름 사이로 환한 빛이 드리우고, 흑운은 뇌운으로 돌변한다.
찰나의 순간, 아키로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치떠졌다.
그 순간이었다.
콰르르르르르르릉!
거대한 천둥소리가 고막이 찢어지라 강타한 순간,
짜자자자자자자작!
갈지자(之)를 그리는 수백 발의 빛줄기가 폭우처럼 퍼부어졌다.
*
한편, 같은 시각.
동 대륙 어느 곳에서는,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광활한 광장에는 수천, 아니 일만을 넘는 인간들이 곳곳에 차곡차곡 쌓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포개져 있는데, 기실 거의 동 대륙 사용자였으나 거주민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핏물 범벅인 채 눈을 감고 있는 사용자가 많았지만, 간혹 신음을 흘리거나 공포에 질려 눈을 떠는 이들도 종종 보인다.
“흐흥, 흐흐흐흥.”
그런 인간 더미로 향하는 여인이 한 명 있었다. 심지어 콧노래까지 부르며 걷는 것이 몹시 기분이 좋아 보인다. 앙칼지게 올라간 눈썹이나 반듯한 이마는 겉보기에 미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
그래서 외려 어색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처절하다 못해 끔찍한 배경을 기분 좋게 걷고 있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사뿐사뿐 걷던 여인은 더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빙긋 웃었다.
“어디 보자~.”
기이하게도 걸음이 멈춘 곳에는 커다란 마법 진이 그려져 있었다.
애초 인간 더미가 가리고 있고 진도 붉은색이라 선명하지는 않지만, 하나 분명한 건 쌓인 인간 아래로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꼭 인간들을 진의 제물로 바칠 것 같은 풍경이라고 해야 하나.
여인은 손을 뻗어 먹잇감을 가리켰다. 그리고 조용히 주문을 외우자,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다. 붉은 진이 돌연 빛을 띠기 시작하더니 올려진 인간들이 스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그 속도는 굉장히 빨라, 흡사 용광로에 섞이는 아이스크림을 보는 듯하다. 아무리 비위가 좋은 인간이라도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을 터.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용해된 인간은 곧 한 줄기 액체로 변해 여인의 체내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더미가 줄어들수록, 진의 빛이 강렬해질수록, 실처럼 가늘던 줄기가 서서히 두께를 키워간다.
“하~아.”
여인은 희열 어린 탄성을 터뜨렸다. 양분으로 화한 사용자의 기운이 들어올 때마다, 텅 빈 것 같던 몸이 조금씩 채워지는 기분이다.
물론 본래 낼 수 있는 힘에 비하면 극히 미약한 수준이나, 어쨌든 이거라도 어딘가. 마력이 증강되고 권능이 돌아오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하다.
“좋아, 아주 좋아!”
힘이 돌아오는 것이 그리 기쁜지, 까르르 웃으며 한층 거세게 기운을 빨아들인다.
“사, 사탄!”
그러나 그때, 급한 음성이 옆으로부터 끼어들었다.
“흐응? 나 지금은 사탄 아닌데?”
한창 좋을 때 방해받아서인지 여인은 짜증 섞인 얼굴로 눈을 흘겼다.
그러자 긴 수염을 날리며 달려오던 노인이 주춤하더니 공손히 허리 숙인다. 멜리너스였다.
아니, 벨리알이라고 해야 하나.
“죄, 죄송합니다. 타나토스 님.”
“뭐, 됐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니. 아무튼, 왜?”
“방금 통신을 받았습니다. 북 대륙 구원군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응?”
타나토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어 번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픽 웃음을 터뜨렸다.
“와, 진짜? 너희도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정말 빨리도 왔네?”
“예, 예.”
“아, 그럼 도시는?”
“함락 직전에 넘어왔다고 하더군요. 우선 후퇴하고, 저희가 넘어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 했습니다.”
“헤…. 그건 좀 아쉽다. 거기도 양분 꽤 있다고 하지 않았나?”
“…….”
천연한 음성에 멜리너스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중요한 계획 하나가 성공해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황이 급변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고 한창 진행 중이다.
사탄이 구상한 심계는 놀랍도록 촘촘하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하나라도 틀어지는 즉시 사상누각처럼 무너질 것이다. 말인즉 변수가 발생하면 신속히 대응해야 하는데, 눈앞 여인의 태도는 느긋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무언의 시선을 느꼈는지 타나토스는 입맛을 다시며 끄덕거렸다.
“아아, 알았어. 그러니까~.”
“우선 타나토스 님과 저, 그리고 이안은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그리고 다른 놈들은?”
“육 대 악마와 그 권속들은….”
멜리너스는 말을 흐리더니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길을 뚫을 겁니다.”
============================ 작품 후기 ============================
으악, 업데이트 시간이 다시 늦어지고 있네요.
이러면 안 되는데. ;ㅅ;
마음이 급해서 우선 완성되자마자 올립니다.
바로 줄 조정 수정하고 문맥 확인 작업 들어갈게요. ㅜ.ㅠ
* 완료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