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96
00895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아니. 그건 안 돼.”
그때였다.
타나토스가 귀찮다는 얼굴로 끄덕거리는 와중, 감미로우면서 점잖은 음성이 둘 사이를 가로지른다. 멜리너스가 바라본 곳에는 준수한 외모의 악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타나토스의 앞에 선 루시퍼는 정중히 머리 숙였다.
“우선 혼란스럽게 한 점 사과 드리겠습니다.”
“흐응?”
“저희 육 대 악마도 대 도시로 가겠습니다. 물론 악마 십사 군주는 물론, 최상급 마족도 여럿 데려갈 생각입니다.”
“루시퍼 님!”
큰소리를 냈던 멜리너스는 서슬 같은 눈이 돌아보자 얼른 목소리를 낮췄다.
벨리알이 사탄의 최측근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공식 지위는 악마 십사 군주. 대 악마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타락 천사’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이윽고 루시퍼가 눈빛을 거두니 멜리너스도 두어 걸음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벨리알, 아니 멜리너스. 사탄의 계획은 어긋나지 않았어.”
“…예?”
“북 대륙이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하기는 했지. 확실히 변수는 맞아. 그러나 네 말대로 하게 되면, 그때야말로 계획이 틀어져 버릴지도 몰라.”
“하, 하지만.”
“약속의 신전까지 길을 뚫는 건, 남은 마족으로도 충분해.”
이 이상의 이견은 받지 않겠다는 듯 루시퍼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멜리너스는 조용히 침묵하기로 했다.
현재 모든 악마는 사탄이 구상한 틀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어.’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결과에 불과할 뿐, 과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즉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아니. 단 한 명 있기는 하다. 루시퍼는 사탄이 씨앗이 되기 직전 만난 유일한 악마다. 그러니 사탄의 심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자신보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멜리너스가 입을 닫은 이유였다.
“같이 가든 말든 너희 멋대로 하는 건 좋은데….”
입술을 살짝 핥은 타나토스는 다른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또 한 무더기의 인간이 살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괜찮겠어?”
“예?”
“뭐….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나도 사탄의 지식은 상당 부분 받아들였거든.”
“아, 그렇습니까?”
“응. 탁 까놓고 말해서, 너희 이대로라면 질지도 몰라?”
“아마 그렇겠지요.”
말을 마친 타나토스는 살며시 눈을 흘겼다.
그러나 루시퍼는 발끈하기는커녕 바로 긍정했다. 흡사 왜 당연한 말을 하느냐는 것처럼. 타나토스의 실쭉해진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잠시 후, 한껏 들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우리는 이미 졌어. 그렇지? 루시퍼.’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동안, 타나토스는 시꺼멓게 침잠한 눈동자로 상대를 뚫어지라 응시한다. 속내를 단숨에 꿰뚫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러나 루시퍼는 담담히 미소 짓고 있을 뿐, 그 이상의 반응은 않는다.
결국, 먼저 반응한 건 타나토스였다. 싱겁다는 듯이 코웃음 치더니 아담한 어깨를 들먹거렸다.
“하여간 웃기는 놈들이야. 뭔 일을 이렇게 어렵게 하는지.”
“실제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잖아요? 뭐, 상황이 많이 복잡해졌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만.”
“헤~. 인간이라면 이미 수중에 얻었을 텐데? 꼭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말씀처럼 쉬웠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그리고 주력은 이미 동 대륙으로 돌렸으니, 남은 떨거지들은 데려가 봤자 일 겁니다.”
루시퍼는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리고 떠나가기 직전, 타나토스를 등진 채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타나토스 님이 이 사실을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요.”
“으응?”
“약속의 신전, 아니 제로 코드 말입니다.”
“…….”
아까부터 뜻 모를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다. 타나토스는 킥킥 소리 내서 웃더니 뻗었던 팔을 거두어들였다.
“그냥? 내가 모르는 만큼, 뒤통수 맞을 일도 염두에 둬야 하잖아?”
“그건.”
“오해하지는 마. 배신하지 말라는 소리는 아니란다.”
“……?”
“우선은 너희 뜻대로 움직여줄게. 재밌으니까.”
“…설마요.”
루시퍼는 약간 늦게 회답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미소 띤 낯으로 말을 잇는다.
“배신이라니요. 또, 이미 인질은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기는 해.”
타나토스는 순순히 수긍했다.
“너희가 그렇게 믿어 마지않는 사탄이 돌아오려면, 아직은 내가 필요하겠지?”
“그런 것도 있지만, 요정의 참전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요정?”
“아, 별건 아니에요. 단지 타나토스 님을 해방할 때, 약간의 안배를 해뒀을 뿐입니다.”
그러자 타나토스는 절레절레 고개 저으며 힘껏 기지개 켰다.
“아~. 싫네. 자꾸 뜬구름 잡는 소리만 찍찍 내뱉는 거.”
“하하….”
“아무튼, 가는 건 가는 거고. 그래도 얘네는 먹고 가도 되겠지?”
“그럼요.”
타나토스가 인간 더미를 가리키자, 루시퍼는 안 될 게 뭐 있겠느냐는 듯 빙긋 미소 지었다. 이어서 한 손을 가슴에 대고 느긋이 허리 숙이며 말했다.
“부디 마음껏 즐겨주시길.”
*
밤이 지나고, 동녘 하늘이 밝아왔다.
어젯밤 전투가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맑고 조용한 아침이었지만, 성내는 아직도 살짝 부산스럽다.
시가지로 들어온 적을 쫓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전후 처리가 문제였다. 워낙 동 대륙이 일방적으로 압살당한 탓에,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발생한 부상자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사제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 결국에는 북 대륙 사제까지 총출동하고 말았다. 보아하니 새벽 내내 치료 활동을 한 것 같은데, 이제 어느 정도 잦아든 듯싶다.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황혼의 전투는 우리가 압승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어제 추가로 돌진해 온 부대 중 세 곳은 도주로를 확보한 후 바로 돌아섰고, 한 부대는 형의 뇌신에 당해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우리 쪽 사상사도 없지는 않으나 극히 적은 수준이거니와, 남 대륙은 사용자 이삼천 명이 사망했으니.
물론 적의 주력 부대는 고스란히 살아 있고, 남은 인원도 우리보다 갑절은 많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악마가 등장하지 않았다. 즉 전투는 이제 겨우 서장을 넘겼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윽고 성을 돌아보려 나선 찰나, 공교롭게도 형이 나를 찾아왔다. 상념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얼굴빛이 약간 피로해 보인다.
“수현아. 잠깐 이야기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회의라도 잡혔어?”
“아니. 개인적으로.”
“……?”
그렇게 말한 형은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성 내부는 곳곳이 부서져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어제보다는 훨씬 낫다. 어제 흐드러지게 널려 있던 부상에 신음하는 사용자나 흉측한 시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형이 걸음이 멎은 곳은, 사용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거리를 가로질러, 상당히 구석지고 한산한 장소였다. 걸음을 멈추자마자 바로 나를 돌아본다.
“내가…. 아, 말은 들었지? 남 대륙이 상당히 거리를 벌렸다는 거.”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정찰 인원을 풀 것도 없이 형의 능력만 있으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남 대륙은 어제 아군의 도주를 도운 후, 신속히 거리를 벌렸다. 아주 도망쳤다는 건 아니고, 약 이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새로 진을 쳤다. 그리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동 대륙 부상자를 회복시키고, 한편으로는 급하게 달려온 만큼 체력을 회복할 필요도 있으니까.
“그리고 악마는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고.”
뭘 말하고 싶으냐는 의미로 쳐다보자,
“그래서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이다.”
형이 돌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혹시 저 남 대륙도 미끼가 아닐까?”
“미끼?”
“그래. 미끼. 서 대륙으로 그랬던 것처럼, 남 대륙을 이용해 우리를 잡아두고, 그 사이 악마들은 약속의 신전으로 간다는….”
“하하.”
자못 중대하게 말했지만, 순간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형은 내가 웃을 줄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걸. 사탄이 바보도 아니고.”
“왜?”
“간단해. 약속의 신전은 천사나 악마는 들어갈 수 없거든.”
“뭐라고?”
“들어봐. 편의상 약속의 신전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제로 코드가 있는 곳은 일종의 보호 지역이라고 해도 좋아. 천사와 악마는 물론, 신, 괴물, 짐승 등은 얼씬도 못 하는 곳이야. 애초 출입이 허락된 존재는 소수 인간뿐이고, 손을 댈 수 있는 것도 오직 인간뿐. 즉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법칙이 작용하는 법역(法域)이라고 해야 하나.”
“법역…?”
형은 멍하니 내 말을 따라 하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빛을 보였다. 조금 쉽게 설명해볼까.
“생각해봐. 그게 가능했다면 악마는 왜 애초 약속의 신전으로 가지 않았을까? 천사야 그 당시 불리한 상황에 부닥쳤기는 했다만, 왜 굳이 우리를 데려왔고?”
그러자 간신히 알아들었는지 형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한다.
“잠깐만. 그럼 이럴 가능성은?”
금세 도로 심각해지기는 했지만.
“악마가 남 대륙 사용자를 데리고 가는 수도 있잖아? 지금 우리와 대치하는 놈들을 미끼로 쓰고.”
으음. 이건 확실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글쎄. 사탄이 그런 선택을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그러나 나는 망설임 없이 부정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오히려 고맙지.”
“어째서?”
“아까도 말했지만, 그곳은 법역이야. 워낙 법칙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다 보니 보통 사용자는 어떻게 할 수도 없어.”
“인간은 출입 가능하다며? 아까 그랬잖아.”
“그러니까 소수라고 했잖아. 애초 일 회차에서는 출입 허락이 떨어진 사용자도 없었고, 외부에서부터 차근차근 공략해나갔다고.”
“공략?”
형의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무에 그리 궁금한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심정으로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일차적으로 법역을 깨트려야 하는 건 맞지만, 그걸 해제했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거든. 그림자 지대, 검의 지대, 피와 철의 지대, 신성 지대, 거기다 시험의 지대까지…. 가는 도중에 얼마나 많은 함정을 지나고, 또 어떤 수호자가 등장했는지 알기나 해?”
“그래?”
“그래. 최정예 일만 명이 열여덟 번이나 원정해서 겨우 약속의 신전을 발견했다고. 그 안에도 무시무시했지. 아마 거기까지만 해도, 가는 기간까지 포함해서 반년은 걸렸을걸?”
“그럼….”
“정 형의 말이 맞는다고 치면, 우리는 이러면 돼. 최대한 빨리 남 대륙 주력 부대를 전멸시키고, 바로 북 대륙으로 돌아가서 약속의 신전으로 가는 거지. 그리고 손가락만 빠는 악마 놈들을 처치한 후, 안에서 한참 고생하고 있을 남 대륙 잔여 인원을 처치한다. 아무리 늦어도, 넉 달이면 가능할 것 같은데?”
“아하! 각개격파를 하면 된다.”
그제야 형은 탄성을 질렀고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결국에는 기우라는 거지. 차라리 우리를 꾀어내려고 거리를 벌렸다는 게 더 신빙성 있겠다.”
“Ok. 알겠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겨우 안심했는지 형이 씩 웃는다.
그러나 곧 눈을 깜빡거리며 머리를 갸우뚱 기울인다. 이런, 설명이 부족했던 건가.
“그런데 아까, 소수지만 출입이 허락된 존재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응? 응.”
“그럼 아무 무리 없이 들어가려면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거야?”
“그건….”
나는 말을 흐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나도 잘은 모른다. 그때는 관심이 오롯이 제로 코드에만 쏠려 있었거니와, 겉으로 밝혀진 사실만 알뿐.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한 명의 왕…. 아니 네 여왕이라고 했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때 어떤 말을 들었더라?
============================ 작품 후기 ============================
이번 회를 보고 아차 하신 독자 분들이 계실 거라 사료됩니다.
아마 예전 내용을 찾아보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온데,
찾기 귀찮으실 까봐 오늘 후기를 빌려 제가 복붙을 하겠사옵니다. _(__)_
– 죽은 마군(魔軍)의 지대를 피와 철의 지대로 수정합니다.(01시 51분)
*
똑같이 주변을 둘러보던 마르는 곧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심심했는데, 갑자기 신기해 보이는 것들이 우수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김수현의 집무실에 비해 이곳은 아마 신천지나 다름없으리라.
결국 조용히 구경하는 건 잠시.
“웅아!”
마르는 입을 헤 벌린 채 한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한다.
“보자…. 저번에 들어온 게 빛과 어둠의 결정이고. 다른 결정 두 개는 어디 있지?”
이유정은 이런 마르의 이동을 전혀 모르는 중이다. 그저 이번 임무를 잘 마치면 김수현이 또 이마에 뽀뽀해줄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상상을 하며, 한창 창고 정리 삼매경에 빠져있을 뿐.
그러나 이유정은 알까?
오늘 마르를 이 창고에 데리고 옴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그일 때문에, 지금 이유정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어딘가가 발칵 뒤집혔다는 사실을.
그리고.
예전 두 번이나 품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유현아를 처단한, 돌이킬 수 없던 김수현의 선택을 극적으로 되돌렸다는 것을.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