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94
00893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니, 이걸로 몇십 명째더라?
모르겠다. 하늘은 이제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전투 중 적을 죽인 숫자를 세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을 테니까. 사실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다. 계속 휘두르다 보면 언젠가는 끝나 있겠지.
마침 눈앞에 허둥지둥 도망치는 놈들이 보여, 나는 서슴없이 땅을 박차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눈에 걸리는 대로 무차별로 빅토리아의 영광을 휘두르자, 붉은 기운이 섞인 잔상이 길쭉하게 늘어나더니, 도망치는 놈들의 목덜미로 예리하게 스민다.
써걱써걱, 육질과 뼈를 자르는 감촉이 섬뜩하다. 이내 오른 방향으로 그었던 손을 힘 있게 떨치자, 등을 보이던 놈들의 머리가 동시에 굴러떨어졌다. 차례대로 무릎을 꿇고 힘없이 쓰러진다.
잠시 참았던 숨을 내쉬자, 사방에서 약한 비명과 웅성거림이 귀를 때렸다. 뭐라 지껄이는지 모르겠으나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얼른 처리할 생각으로 이기어검술을 발동하니 무검, 일월 신검, 칼리고 아브락사스가 긴 검음을 터뜨리며 휘날리듯 하늘로 오른다.
‘검의 군주’를 계승함으로 얻은 이득 중 하나가, 내가 사용하는 검들과의 연결 고리가 한층 강해졌다는 데 있다. 몸의 일부로 여겨지는 신검합일을 넘어서 내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잘 사용하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웅웅웅웅!
있는 힘껏 마력을 불어넣자, 세 자루 검은 구멍으로 빙글빙글 돌아 흘러가는 물처럼 사납게 회전하며 사방을 강타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몹시 차다. 흡사 가로막는 모든 걸 부숴버리는 폭풍과도 같이, 칼날이 스치기만 해도 깨지고 조각조각 부스러진다. 가슴에 닿으면 가슴째로 잘려나가고, 허벅지에 닿으면 믹서기에 갈려 나가듯 다리가 뚝 떨어진다.
그 와중에도 방패를 들거나 방어막을 세운 놈들은 있었지만, 덧없는 일이다. 칼날의 돌풍에 휩쓸리는 두꺼운 쇳덩어리는 순식간에 금이 쩍쩍 갈라져 깨지고, 흰 장막은 일 초도 버티지 못하고 세절기에 넣은 종이처럼 분쇄된다. 단순히 회전력만 계산해도 막을까 말까인데, 검술 전문가의 권능인 결까지 곁들였으니 막을 리가 만무하다.
잠시 후, 수십 명이 뿜어낸 핏물이 공중으로 치솟으며 교차하고, 시끄럽게 귀를 긁던 철성 섞인 고함도 점차 잦아드는 찰나.
쐑!
갑자기 허공을 가르는 예리한 소음. 목을 노려오는 날 선 살기가 상당히 매섭다. 순간 검으로 후려칠까 하다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망토를 쥐어 끌어당겼다. 허연 김이 어른거리는 길쭉한 강철의 창이 짓쳐 들어온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니, 잠깐만. 강철로 된 창이라고?
『붉은 달 망토의 능력 ‘흡수’를 발동합니다.』
『아이론 랜스를 흡수합니다.』
아이론 랜스? 아이스 랜스가 아니라?
아무튼, 기세 좋게 쳐들어오던 강철 창은, 오는 속도 그대로 망토 안으로 쑥 사라졌다. 잠깐 몸에 받치는 듯한 감각은 느꼈으나 금세 사라졌다. 붉은 달 망토의 성능이 발동된 것이다.
강철의 창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자, 후드를 푹 눌러쓴 여인이 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발을 굴러 튕기듯 돌진했다. 강철을 사용하는 마법을 보니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궁신탄영으로 들어가자 거리는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여인은 깜짝 놀란 몸짓을 보였으나 순간적인 대응은 훌륭했다. 균형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뒷걸음질 치며 침착히 손을 내뻗는다. 그 순간 나는 조금이지만 속으로 기함하고 말았다.
쩡, 쩡, 쩡, 쩡, 쩡, 쩡!
딱히 주문을 외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돌연 여섯 번의 철성이 귀를 찔렀다. 흘끗 아래를 흘기니 새로운 강철의 창 여섯 개가 땅을 뚫고 솟구치고 있다. 흡사 살아 있는 생물처럼 한 바퀴 돌더니 빙그르르 회전하며 육방에서 찔러왔다.
확실히 의외의 공격이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바로 마력을 끌어올렸고, 이형환위를 발동해 단숨에 여인의 후방을 점거했다.
앞을 응시하자 강철의 창들이 남은 잔상을 무자비하게 헤집는다. 여인은 큰소리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상이 차차 흐려지기 시작하자 돌연 발을 헛디뎠고, 그대로 내 품으로 무너졌다. 가슴에 닿는 어깨가 가녀린 걸로 보아 여인임이 분명하다.
흠칫 어깨를 움츠린 여인은 곧 천천히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몸을 떠는 감각이 온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후드 아래 살짝 비친 두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 한껏 치떠져 있었다. 왜인지 목에 걸린 강철 빛깔이 흐르는 검푸른 장미 목걸이가 유난히 눈에 밟힌다.
제 3의 눈으로 빠르게 정보를 훑어보자, 나도 모르게 끄덕이고 말았다.
“과연. 그러고 보니 남 대륙에도 세 개 뿌렸다고 했던가?”
이미 상대는 무력화된 것이나 다름없다. 왼손을 뻗어 가냘픈 목을 움키고,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도시는, 어느새 서서히 조용해져 가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돼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혹시나 악마가 있지 않을까고 곳곳을 돌아다녔건만, 악마는커녕 남 대륙 주력 부대도 볼 수 없었다. 기껏 본 거라고는 약탈에 정신 놓은 떨거지뿐.
물론 승리한 건 응당 기뻐해야겠지만….
뭐, 일단 이 정도로 만족해둘까. 구원군이 도착했다는 걸 알면 어떻게든 행동하겠지.
일련의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딱딱히 굳은 여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화르르륵, 화르르륵!
밖에서 보는 성은 완전한 난장판이 돼 있었다. 부서진 성벽과 곳곳에서 오르는 불길, 게다가 시커먼 연기는 성 외부까지 흘러나와 매캐한 냄새를 물씬 풍긴다. 짙은 황혼이 드리운 도시에 불이 오르니, 성이 타는지 하늘이 타는지 모를 정도였다.
엘도라는 쓰디쓴 얼굴로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명은 좀 전부터 사그라졌지만,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능히 짐작이 가는 만큼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동 대륙을 침공한 남 대륙의 병력은 순수 이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엘도라의 명성이나 남 대륙의 인구를 생각해보면 상당히 적은 숫자임은 부인할 수 없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현재 이곳에 있는 인원이 엘도라의 명분에 공감한 사용자들 전부였다. 말인즉 따라오지 않은 이들은 엘도라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기야 천사의 속내를 만천하에 밝혔다손 쳐도, 모든 사용자가 그렇구나 하고 바로 받아들이는 건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결국에는, 혼란에 빠진 남 대륙을 뒤로한 채 도망치듯이 동 대륙으로 오고 말았다.
물론 적극적으로 찬성해준 세력도 없는 건 아니었다. 가령 녹스나 카르페디엠을 들 수 있을 터.
그러나 그들은 애초 명분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전쟁 두 글자에만 초점을 맞춘 이들이다.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라 참가를 허락했지만, 그런 만큼 어느 정도 행동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왜 전쟁에 열광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제한하면 등을 돌릴 것은 명약관화였으니까. 즉 일종의 거래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리하여 엘도라에게 남은 건, 인간을 위한다는 합리성, 그리고 성과를 내고 자신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면 다시 지지해줄 거라는 믿음. 이 두 가지뿐이다. 이 두 명분을 원동력 삼아 엘도라는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쓰라린 전쟁도 오늘로 끝이다. 남 대륙은 경쟁 대륙을 떨어트렸고, 이곳을 발판 삼아 한층 세력을 키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천사 대신 남 대륙의 뒤를 봐주는 소위 악마라는 자들의 힘도 커지게 된다. 그래, 그러니 오늘만 지나면…?
그때, 한참 상념을 정리하던 엘도라의 아미가 살며시 찌푸려졌다. 이제 거의 다 끝났다고 여겼건만, 갑자기 비명이 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부서진 성벽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그림자가 속출한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에드워드도 신속히 몸을 날렸다.
잠시 후.
“반격이라고요?”
“예, 예. 갑자기 워프 게이트에서 우르르 넘어왔다고….”
황급히 돌아온 에드워드에 보고에 진영이 살그머니 술렁인다. 엘도라는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곧 표정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북 대륙 구원군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북 대륙? 구원군?”
아키로프가 건들거리며 반문하자, 엘도라는 조용히 끄덕였다.
“그자들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천사 쪽에서도 발 빠르게 행동을 취할 테니, 최대한 빠르게 동 대륙을 점령해야 한다고.”
“허…. 그럼 얼마나 빨리 왔다는 거야?”
“저도 놀랍기는 하지만, 그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지. 그래서 어쩔 건데?”
잠깐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엘도라가 당황하지 않고 중심을 잘 지켜서기도 했지만, 애초 원탁의 기사들은 북 대륙 출현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기조였다.
“우선 부대를 넷으로 나누겠습니다. 각자 성문으로 가서 아군의 도주로를 확보해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바로 멜리너스 님에게 연락하겠습니다. 혹시 이상 현상이 생기면 바로 통신하라 하셨으니, 무언가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글쎄. 그놈들하고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부를 필요가 있을까? 우리만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말이야. 큭큭.”
그렇게 말한 아키로프는 휙 몸을 돌려 부대를 소집했다. 그리고 간다는 말도 없이 빠르게 황혼 속으로 사라졌다. 심지어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기실 아키로프가 여유로운 것도, 아니 원탁의 기사들이 어깨를 으쓱이는 것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남 대륙 사용자들은 기본적으로 자부심이 상당히 강하다. 간단히 말해 자신이 속한 대륙 수준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동 대륙을 상대해오며 자부심에 확신이 더해졌으니, 북 대륙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해도 딱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자신감의 발로.
아키로프가 즐겁다는 듯이 달려나간 것에는, 이러한 바탕이 깔려 있었다.
아키로프는 소집한 부하들과 함께 가장 가까운 문을 향해 나는 듯 달리는 중이었다. 성이 가까워질수록 입가에 걸린 미소도 진해진다.
실제로 아키로프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가끔 불평하고는 했다. 왜냐면 엘도라가 오딘 클랜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엄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시가지 전투에 참가해 욕망을 채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인데, 약탈은커녕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니 날로 불만이 쌓였었다.
그래서, 북 대륙이 시기 적절하게 등장해준 걸 오히려 고맙게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 대 도시를 앞두고 거의 포기하고 있었건만, 막판에 유흥 거리를 만들어줬으니까.
이윽고 성문이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공교롭게도 아키로프는 도망쳐 나오는 아군과 맞닥뜨렸다.
“아, 아키로프 님!”
허겁지겁 뛰쳐나오던 무리는, 아키로프를 보자마자 쓰러지듯 엎어졌다. 잠시 안도의 한숨을 짓더니 아차 하며 뒤를 가리킨다.
“서, 성안에!”
“아아, 들었다. 새 원숭이들이 출현했다면서?”
“예, 예?”
“한데 참, 꼬락서니 하고는…. 쯧쯧. 고작 털 노란 원숭이도 못 당해내고 도망쳐? 창피하지도 않나?”
조롱하듯이 꾸짖자, 엎드린 사내들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곧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 그게 아닙니다! 그놈들은 정말로 괴물 같은!”
“괴물이라.”
또다시 말을 끊은 아키로프가 낄낄 웃는다. 그러다 뚝 웃음을 그치더니, 스산한 눈빛을 빛냈다.
“이야, 거참 무섭네. …그런데, 그놈들이 괴물일까? 아니면 내가 더 괴물 같을까?”
그 말에 사내들은 입을 다물었다. 상대를 깔아보는 몹시 거만한 태도에 절로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로는 묘한 안도감도 느꼈다. 왜냐면 눈앞의 사용자는 남 대륙 중에서도 손꼽히는 기사니까. 무엇보다 그 오딘 클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둥이 아닌가.
경외의 시선을 느낀 걸까.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기야 명색이 한 대륙인데, 유별난 원숭이 한두 마리야 없겠어?”
천천히 눈빛을 거두며 오만하게 웃음 짓는 아키로프.
“그러니 너희 같은 보통 놈들은, 보통 원숭이나 상대하고 있으라고.”
그리고 돌연 사내의 어깨를 탁 짚더니,
“특출난 원숭이는, 이 몸이 맡아줄 테니.”
불길이 흐르는 성 내부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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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죽고 싶으면 뭘 못하겠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