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05
00904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꽈앙!
– 어?
갑자기 고막이 찡해질 정도의 굉음이 터지더니 화정이 놀란 음성을 터뜨렸다.
– 이 힘은….
반신반의하는 소리에 이어 폭음이 들려온 곳을 쳐다봤다가, 순간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전장을 거침없이 휘젓고 다니던 오벨로 기사단이 허공에 우수수 흩날리고 있다. 방금 소음의 근원에 당한 듯 전신이 걸레짝이 된 채로.
– 김수현!
화정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나는 왼손에는 엘도라를 잡은 채 오른손으로 엑스칼리버를 땅속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무검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엑스칼리버가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메시지가 왜 안 뜨는지 모르겠으나, 깊게 생각할 틈이 없다.
신속에 가까운 속도로 다가오는 기운은 총 열댓 개. 동서남북 사 방향서 내가 있는 곳으로 나는 듯 접근해오고 있다. 언뜻 무시무시하지만, 한편으로는 낯설지 않은 기운, 아니 악의였다.
잠시 후.
훌훌 솟구친 십수 개의 그림자가 에워싸듯 느닷없이 난입해 들어온다.
“이런 이런. 뭔 짓거리 중이었던 거야?”
처음 시야로 들어온 건, 느물거리는 말을 뱉으며 뛰어내리는 아스타로트였다.
“어머? 저 무슨 파렴치한 짓이래?”
두 번째로 내려앉은 리리스는 박쥐 날개를 팔락거리더니 몸을 살짝 꼬며 교태를 부린다.
이윽고 바알, 루시퍼, 벨제부브, 아스모데우스, 게다가 악마 14 군주와 두세 명의 사용자까지.
…아니, 사용자가 아니잖아?
“메, 멜리너스….”
내 손에 잡혀 있던 엘도라가 눈물 젖은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멜리너스라. 겉모습은 늙은 노인이지만 제 3의 눈은 벨리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문득, 남 대륙이 넘어간 정황을 아주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하나하나 확인한 후 가볍게 숨을 추슬렀다.
마침내 대 악마 놈들이 등장했다.
“…….”
…하지만, 어째서일까?
무언가 대단한 등장 같은 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가슴은 단 한 번의 두근거림조차 없이 몹시 조용하다. 그냥 올 것이 왔다는 담담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머리가 시리도록 차갑다.
심안의 영향일까. 아니면 어쨌든 나올 거라고 예측했기 때문일까.
아니, 둘 다 아니다.
이토록 고요한 심신의 근원은 자신감이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 말이다. 실제로 일 회차 때 엄청난 명성을 떨쳤던 엘도라도 방금 압도적으로 패배시키지 않았는가.
예외는 없다. 설령 상대가 대 악마라고 해도, 아니, 악마라면 더더욱 자신이 있다.
왜냐고?
이놈들만 바라보고 이 홀 플레인에서 십사 년을 살아왔으니까.
“사용자 김수현.”
그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우선 삼가 인사 드리겠습니다.”
누군가 차분히 걸어 나오는 기척을 느꼈다.
“저는 타락 천사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루시퍼…. 아, 이미 알고 계시려나요?”
루시퍼는 한 손을 가슴에 대고 정중히 허리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살짝 고개 들더니 부드러이 웃는다.
“아무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싶습니다만.”
“이야기?”
“예. 이 무의미한 전쟁을 이어나가는 것보다는, 대화로 풀어나가는 게 훨씬 좋지 않을까요?”
“호오.”
순간 코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태도도 예의 바르고, 목소리도 여전히 달콤하고 유혹적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과거의 나였다면 아마 솔깃했을지도 모르겠다.
“대화라…. 좋지. 아니, 못할 것도 없지.”
“예?”
“두 가지 조건만 받아들인다면 말이야.”
“뭐라고?”
아스타로트가 고함쳤다. 그러나 루시퍼는 얼른 손을 들더니 천천히 허리를 폈다.
“예. 경청하겠습니다.”
“첫 번째. 현 시간부로 남 대륙 사용자 전원이 전장을 이탈할 것.”
“어렵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요?”
“이것도 간단해. 첫 조건을 이행한 후, 너희가 저 성 안으로 얌전히 들어오는 거야. 거기서 느긋이 이야기 나누자는 거지. 어때?”
말을 끝낸 순간 리리스가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루시퍼는 웃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뚫어지라 나를 응시하다가, 돌연 눈매를 가늘게 찢으며 쓰게 미소 짓는다.
“애초 대화할 생각이 없으셨군요.”
“오, 협상은 결렬인가.”
“아니요, 아직입니다. 생각해보시죠. 왜 이 많은 사용자가 천사들한테서 돌아섰는지. 한 번쯤 들어볼 가치는 있지 않겠습니까?”
“아, 천사의 이중성을 말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
“…예?”
“일단 너희 먼저 처리하고, 걔들은 다음에….”
일부러 말을 흐리자, 루시퍼의 얼굴빛에 처음으로 동요가 번졌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 거만하던 놈들이 자세를 낮추고 이런 제의까지 하다니. 나름 대우해준다는 건가?
“그걸 알고 계신다면 우리가 굳이 싸울 필요가 없을 텐데요?”
“확실히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지. 그런데 너희는 아니야.”
“무언가 오해가….”
“아니. 천사는 제로 코드를 지키려는 입장이지만, 너희는 필요로 하잖아?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그 말에 루시퍼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킥킥 웃고 나서 엘도라의 등으로 무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미끈한 살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전신이 펄떡 들썩였고, “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원래는 고기 방패로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별로 먹힐 것 같지도 않고….
확실히 악마들의 반응은 담담했다. 잠깐 주춤하기는 했으나 그뿐,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기야 저놈들에게 있어서 엘도라는 도구에 불과할 터. 죽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혹시 몰라 내부로 커다란 마력 폭발을 일으킨 후, 축 늘어진 엘도라를 쓰레기 던지듯 내버렸다.
요요한 침묵이 흐른다.
자유로워진 왼손으로 엑스칼리버를 드는 동안 상대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짙어지는 적의는 곧 벌어질 상황을 예고하고도 남는다.
나는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우선 이곳에 나타난 대 악마는 일곱 중 여섯으로, 사탄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악마 14 군주는 씨앗으로 개화한 사용자 세 명까지 포함해 총 아홉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두 사실로 나오는 의문은 두 가지.
하나는 사탄은 어디 있느냐는 것.
다른 하나는 남은 악마 14 군주 중 한 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내가 알기로 이제껏 소멸한 악마 14 군주는 메피스토펠레스, 마몬, 플루톤, 프로세르피나 이렇게 총 넷으로 알고 있다. 그럼 열 놈이 있어야 하건만, 보이는 건 아홉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장에 등장한 건 악마뿐, 마족의 존재는 한 놈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기실 남 대륙과 처음 맞닥뜨렸을 때부터 이상하기는 했다. 이번 전쟁에 사활을 걸 생각이었다면 왜 처음부터 같이 싸우지 않았을까. 어째서 남 대륙이 패배하기 직전 공교롭게 등장한 걸까.
뭘 꾸미고 있는지 모르겠다.
단지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다면,
“흥~. 흥~.”
몸집에 비해 커다란 로브를 걸친 채 조용히 콧노래를 부르는 여인. 심지어 제 3의 눈으로도 정보가 읽히지 않는다.
– 타나토스야.
그 순간,
“타나토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밖으로 말을 뱉고 말았다.
“앗?”
거의 동시에 상대도 약한 탄성을 질렀다.
“알고 있었어?”
푹 눌러쓴 후드를 젖히자, 눈을 동그랗게 뜬 긴 흑발의 미인이 드러났다.
그렇게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갑자기 짝 손뼉 치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아! 그렇구나~. 그러네. 격이 같으면 감지할 수도 있겠네. 그래도 숨긴다고 숨겼는데, 아까 웬 이상한 놈들을 처리할 때 힘을 너무 썼나 봐. 히히!”
혼자 말하고 혼자 끄덕거리더니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흡사 구김살 없는 밝은 아이 같은 모습이었으나, 나는 방심의 끈을 풀지는 않았다. 한껏 기함하기는 했으나 속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예전에.
예전에 한 번 그런 적이 있다.
그 당시에 왜인지 계속 타나토스가 신경 쓰여 끈덕지게 캐물었고, 화정은 위험한 미친년이라는 말로 일축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절대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닐 터.
하긴, 악마를 상대하면서 언제 한 번 쉬운 적이 있었던가.
사탄이 바보가 아닌 이상 악마 진영의 불리함은 인지했을 테고, 그래서 타나토스의 봉인을 풀었다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말인즉 일종의 비밀 병기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싱거운 웃음이 터졌다. 아무래도 그때 타나토스의 출현을 염두에 두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어, 웃어?”
그 순간 타나토스가 뾰족한 소리를 질렀다. 두 눈을 앙증맞게 깜빡거리더니 갑자기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정말 미친년이구나.
“왜 웃는 거야? 별로 웃을 상황은.”
“생각해보면.”
타나토스의 말을 끊으며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너희는 항상 그랬지.”
“……?”
“그래, 언제나 그랬어. 일이 좀 잘 풀리는가 싶으면 꼭 나타나서 어떻게든 훼방을 놓더라고. 그것도 치 떨릴 정도로 말이야.”
“그건 오히려 저희 쪽이 할 말 같습니다만.”
약간 뜬금없는 말이었는지 루시퍼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왠지 이런 상황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고 들렸다면 제 착각입니까?”
나는 빙긋 웃었다.
그럼 몇 번을 당하고 또 당했는데, 당연히 했지.
“설마 안 했겠냐.”
조롱하듯이 말한 후 두 검을 교차시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영역 선포(Area Declared).”
============================ 작품 후기 ============================
허허….
어, 음. 우선은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경고 문구를 넣은 건 독자분들의 항마력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예전 나탈리가 거열형을 당하는 장면 때 어느 독자분께서 작성해주신 코멘트 때문이었습니다. ‘요즘에는 경고 문구를 넣어주지 않으시네요.’ 이런 말씀을 해주셨고, 보자마자 아차 싶었습니다.
노블레스에는 많은 독자분들이 계십니다. 거열형이나 어제의 내용 정도는 당연히 무리 없이 읽으실 수 있는 독자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니, 사실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까맣게 잊었고, 이건 제가 반성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어제의 스킵 권유는 소수의 독자분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_(__)_
그리고 천XX혈XX 님에게.
Q1 ) 작가야, 작가야. 공찬호랑 다른 사용자랑 맞짱을 떴을 때도 사용하지 않은 열화 검을 사용하고,
Sol ) 김수현이 그때 열화 검을 사용한 건 큰 의미는 없습니다. 물론 다른 방법으로 싸울 수도 있었겠지만, 엘도라가 사용한 능력인 ‘모습을 보여라, 엘도라도.’에 대응해 사용한 것뿐이지요. 단지 이번 전투에 있어서 김수현의 목적은 엘도라를 단순히 끔살시키는 게 아닌, 압도적으로 패배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남 대륙 진영에 충격을 주는 것에 우선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말인즉 여러 전투 방법 중 하나를 선택했을 뿐이지, 전력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Q2 ) 또 왜 그게 예상한 수치 값의 엘도라의 무력이었는지 설명 좀.
간단해요. 김수현이 추측한 엘도라의 예상 무력은 1. 제 3의 눈 2. 현재가 사 년차에서 오 년차로 넘어가는 시점. 이 두 사실에 기인해 계산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전에 ‘이 회차의 사용자들이 일 회차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를 주제로 한 파트가 나온 적이 있는데, 엘도라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더군다나 칼집도 없는데, 일 회차 때보다 약할 거라고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