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04
00903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오늘 내용은 중반, 후반 내용에 성적으로 불쾌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독자분께서는 넘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엘도라의 낯빛은 ‘저놈은 정말 뭐 하는 놈이지?’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앙칼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자, 구체들이 한층 환한 빛을 발하며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기운이 고여가기 시작한다.
낯의 핏기가 눈에 띌 정도로 빠지는 것이 상당히 무리하는 것 같으나, 점차 밝아지는 구체는 숫제 심상찮은 진동마저 뿜어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와 엘도라의 사이는 빛과 진동 그리고 이글거리는 소리만이 남은 기이한 공간으로 변했다. 어느새 엘도라의 모습은 구체가 발하는 빛에 가려 희미하다.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형상도 보이지 않는다. 꼭 우리 둘만 다른 차원에 있는 느낌이다.
“Ostende Te!”
그렇게 생각한 찰나, 문득 한 외침이 공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귀를 찔렀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중구난방 떠 있던 구체 수십 개가 갑자기 춤을 추듯 움직이다가, 소라 껍데기처럼 빙그르르 나선을 그리며 끌어당기듯 모이기 시작한다.
이동 속도가 그다지 빠른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한 점으로 차곡차곡 집중되더니, 곧 하나의 커다란 원으로 군집해 아까보다 몇 배는 밝은, 흡사 태양처럼 눈 부신 빛을 터뜨렸다.
이쯤 되니 나도 마냥 넉넉하게 있을 수가 없다. 좀 더 싸울 줄 알았건만, 엘도라는 이번 공격에 남은 여력 전부를 쏟아붓고 있는 듯하다. 현명하다면 나름 현명한 판단.
하여 나도 그에 발맞춰 화정의 기운을 가일층 끌어올렸다.
공간을 흔드는 소용돌이 속 지그시 감긴 두 눈동자.
거세게 펄펄 나부끼는 황금빛 머리카락.
잠시 후, 엘도라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눈빛은 더없이 강한 승리의 확신이 서려 있다.
그러더니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은 힘껏 말아 쥔 채,
“El Doradooooooooooooo!”
악에 받친 듯 목이 터지라 소리 지른다.
그 순간,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황금의 구체와 땅이 맞닿은 부분서 한 차례 세찬 불꽃이 튀기더니,
꾸우우웅!
빙그르르 회전하는 동시, 천지를 떠르르 울리는 소음을 토해내며 잠력(潛力)을 폭발시킨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압도당하는 것 같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기운. 이내 가로막는 모든 걸 아우르며 서서히 전진해오는 장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장대하다.
한편,
– 꽤 하잖아!
화정이 외치며 열화 검들이 발사된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정 본연의 기운에 4.5배로 증가한 마력 흐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섬광처럼 쏴진 열화 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짙은 잔상을 흘리며 남김없이 구체의 전면과 격돌한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온 세상을 뒤흔들며 다가오는 빛의 태양, 그리고 모든 것을 불사르며 막아서는 붉은 검 줄기들. 나는 물론, 엘도라도 그곳에서 터져 나오는 기세를 이기지 못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친다.
그러나 두 기운은 서로 한 치도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기하급수로 기세를 더해간다. 수십의 칼끝이 꽂힌 표면으로, 황금빛 파문이 연신 물결치며 넓적하게 벌어지는 광경은 진정으로 장관, 아니 화려한 절경이었다.
다음 순간,
화르르륵!
정 중앙에 꽂힌 열화 검 하나가 거세게 타오르며 작은 구멍을 뚫었다. 아니, 녹여냈다는 표현이 옳으려나.
그 순간을 기점으로 구체는 순식간에 치즈처럼 구멍이 뻥뻥 뚫리더니, 끝내 침입을 허용하고 말았다. 온 세상을 밝히던 빛무리가 점차 사그라지며 구체의 형상이 일그러져 붕괴하기 시작한다.
살아남은 열화 검들은 해를 산산이 무너뜨리며 혜성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엘도라는,
“아아아아아아아아!”
흡사 절규하듯 고함을 내지르며 화르르르, 무수한 불줄기에 뒤덮인다.
그리하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온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고 돌풍도 잦아들었다.
끝났다.
“후.”
나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쉬며 기운을 추슬렀다. 그리고 빠르게 몸을 점검했다.
속이 조금 허전하기는 하나, 역류 현상이나 상처 입은 곳은 없다. 쉬운 상대는 아니었으나 고대 악신처럼 어렵지도 않았다.
그냥 딱 생각했던 정도인 것 같다. 하기야 한낱 사용자인데 화정도 인정하는 고위 신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앞을 바라보자, 온몸을 덮은 불길이 서서히 연소해 가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엘도라는 용케도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화정이 사그라지고 드러난 모습은, 선 채로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처참하기 짝이 없다. 아름답던 금발은 시꺼멓게 그을렸고, 작고 단단하던 체구는 여기저기 찢겨 버리기 직전의 걸레를 보는 듯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힘이 꺾였다고 하나, 열화 검을 정통으로 먹고도 저 상태라니. 아마 그만큼 보호 장갑이 좋을 것 같은데.
뭐, 잘됐네. 보아하니 장갑이나 장신구 덕을 좀 본 것 같으니 같이 가져가면 되겠다. 물론 어디까지나 엑스칼리버가 우선이지만.
한데, 설마 이때 누가 짠하고 등장해서 칼을 훔쳐가는 건 아니겠지?
혹시 몰라 서둘러 걸음을 옮기자, 엘도라가 힘겹게 눈을 떴다. 시뻘게진 두 눈동자는 조용히 떨리고 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간신히 입을 열었다가, 콜록 기침하며 선홍빛 핏물을 주르륵 쏟아낸다.
결국에는 엑스칼리버를 툭 놓치고, 끓는 침음을 흘리며 힘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흠.”
확실히 신검은 신검인가.
그 난리 통을 겪었음에도 엑스칼리버는 햇빛을 반사하며 고고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하기야 홀 플레인에 현존하는 칼 중 첫손으로 꼽혀도 무방할 정도니 이 정도로 반항할 수 있었던 거겠지.
그나저나 생각할수록 칼집이 아쉽네. 아아, 아쉽다. 정말로 아쉬워.
“안 돼….”
“응?”
그때, 정확히는 막 엑스칼리버를 집어 든 찰나, 아련한 음성이 귓전을 흐른다. 바들바들 떨리는 팔이 나를 향해 뻗어져 있다. 엘도라는 호흡조차 곤란한 듯 꺽꺽거리면서도, 애처롭기 그지없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돌려줘….”
뭔 말을 하는가 했더니.
설마 돌려달라는 뜻인가?
“싫어. 아니, No.”
“돌려줘…!”
“미쳤냐. 여기로 온 이유 중 하나가 이 칼 때문인데.”
“아, 아…?”
나는 싱겁게 웃으며 엘도라가 올린 손등을 지그시 내리밟았다.
“히아아악!”
뿌드득, 뼈를 밟아 부수니 고개를 한껏 쳐들며 울부짖는다. 그러나 곧장 발로 턱을 걷어차 버리자 비명이 뚝 끊기며 날아가 땅을 구른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새우처럼 웅크려 신음하는 엘도라를 잡아 올렸다. 핏물로 범벅된 얼굴은 상당히 초라하다.
이윽고 제 3의 눈으로 빠르게 훑자, 역시나. 시엘라스의 수호 갑옷, 아이렌의 순결한 처녀 장갑, 뷔에르의 숙녀 부츠, 귀여운 곰돌이 속옷…. 아니, 이건 됐고.
걸친 갑옷과 장비나 장신구 등 하나하나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굉장한 보물들이다.
어쩌지. 아직 전쟁 중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소강상태기도 하고. 그리고 이 정도 성능의 장비라면 잠깐 시간 들여 회수할 가치가 차고도 넘친다. 괜히 놔뒀다가, 누가 몰래 훔쳐가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갑옷부터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망연하던 엘도라의 눈매가 갑자기 치떠졌다.
“가만히 있어라.”
“무, 무슨!”
“루루, 루루루루….”
“시, 싫어! 하, 하지 마!”
이런. 기력을 잃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심하게 발버둥 치며 저항한다.
“도와줘! 누가 제발 도와줘!”
“이노오옴! 당장 손 떼지 못해!”
연거푸 Help라는 말을 외치는가 싶더니 어디서 분노에 찬 음성이 터졌다. 흘끗 눈을 돌리니 가짜 신재룡, 아니 흑형이 달려오고 있다. 전투 전 안솔과 일기토를 벌인 사내였다. 심판의 기사라고 했나?
“천벌을 받으라!”
얼마나 급하면 오면서 메이스를 들었으나,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애초 이런 번개 따위가 내 항마력을 뚫을 리가 없다. 두 번 세 번 거듭 내리쳐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아무튼, 오는 건 좋은데 저렇게 막무가내로 달려와서는….
쐐애애액!
찰나의 순간, 공기를 가르며 날아온 검붉은 살은 상대를 아주 정확히 노려 머리통을 관통했다. 화살을 보니 선유운이 쏜 것 같다.
거한은 달려오는 그대로 우당탕 쓰러졌고, 엘도라는 악을 썼다.
“에드워드으으!”
그래, 더 와라. 오면서 계속 저격당하면 더할 나위 없고, 대장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사기를 상실하면 그것대로 좋고.
“으윽, 으으으윽!”
장비를 하나씩 벗길수록 엘도라의 저항도 더욱 심해졌다. 나중 가서는 약간 거슬릴 정도도 심해져, 주먹으로 있는 힘껏 복부를 세게 후려갈겼다. 그제야 몸이 축 늘어져 겨우 갑옷을 벗길 수 있었다.
이왕 시작한 거, 나는 거침없이 손을 놀렸다. 목걸이와 반지를 회수한 후, 받쳐입은 옷까지 빼앗았다.
최후로 속옷까지 딱딱 긁어내 홀딱 벗겨내자, 희디흰 나신이 여과 없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가늘게 떨리는 아담한 어깨, 도도록이 솟은 분홍색 가슴, 부끄러운 듯 꼬아 움츠리는 탄탄한 허벅지, 심지어 아직 덜 여문 음부까지 전부 노출한 것이다.
그러자, 그렇게나 충격이 큰 걸까. 아니면 이런 비참한 상황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걸까.
“윽…. 흐흑….”
엘도라는 어느새 완전히 겁에 질려 작게 흐느끼는 중이었다. 첫 대면 때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빛 잃은 눈동자는 보통 소녀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라 있다.
“이제 그만…. 제발, 제발….”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수치심 때문인지 울먹임 섞인 소리를 횡설수설 웅얼거리더니,
“어엉…. 멜리너스…. 으아아앙….”
결국에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나는 아이처럼 우는 엘도라의 머리채를 세게 휘어잡았다. 그리고 남 대륙 사용자들이 있는 방향으로 여 보라는 듯 최대한 높이 들어 올렸다.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과연 미쳐 날뛰며 달려들어 올까?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칠까?
“어어어엉….”
목놓아 우는 소리가 경악한 전장에 구슬프게 울려 퍼진다.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에피소드 3도 팔부능선을 넘었네요.
전쟁은 아직 두 번 남아 있습니다.
2에 한 번, 1에 한 번 남아 있지요.
스케일로 따지면 1 > 2 > 3으로 볼 수 있겠네요.
내용 길이(?)로는 3 > 1 > 2로 될 것 같습니다.(물론 완결은 7, 8월 중으로 납니다.)
아마 에피소드 1까지 전쟁을 제외한 부분은 진도가 빨라질 것 같사오니,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벌써 새벽 5시가 다 되가네요.
독자님들 모두 활기찬 수요일 맞이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