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06
00905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크흐흐흐흐흐흐흐!”
쿵, 쾅, 쿵, 쾅!
무자비하게 창이 찍히는 굉음과 함께 광기에 찬 웃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무리 전장이 잠잠해졌다고 하나, 특이하게도 소리의 근원지는 직경 오십 미터 안으로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아군은 질렸다는 얼굴로, 적군은 두려움에 찬 얼굴로 떨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 겨우 이게 끝이냐? 끝이야? 크하하하!”
꽝, 또 한 번 창을 메어친 공찬호는 입이 찢어지라 광소(狂笑)했다. 형형히 빛나는 눈이나 침을 뚝뚝 떨구는 어금니는 흡사 발광하는 광인을 보는 듯하다.
그런 공찬호의 앞에는 뭉개지다 못해 완전히 으깨어진 시체 하나가 놓여 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유정을 몰아붙이던 녹스 로드는, 어느 순간 저민 고기라 해도 믿을 만큼 곤죽이 돼 있었다. 얼마나 누르고 밟아 쳤으면 뇌수나 살점이 부스러기로 변해 핏물에 섞여 녹는다.
아주 가끔, 부르르 떨며 얼기설기 이어 붙는 부분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공찬호가 귀신같이 창으로 후리니, 결국에는 무참히 찢겨 움직임이 멎는다.
투쾅!
그 순간 적막한 전장에 돌연 거센 소리가 휩쓸었다. 귓전이 저릿해질 정도의 소음이라 공찬호조차도 흘끗 눈을 돌렸다. 돌아본 곳에는 먼빛으로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붉은색 막이 내려와 있다.
“오호.”
공찬호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무언가 재미난 걸 발견한 것처럼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이제 본 무대인가.”
기쁜 어조로 말한 공찬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뛰어가기 시작했다.
*
그 무렵.
“어! 신호 온 거 아녜요?”
성벽에 서 있던 선율이 호들갑을 떨며 한 곳을 가리켰다. 붉은 장막이 처져 있는 곳이었다.
“자~! 머셔너리 로드의 시그널도 왔으니 어서…?”
고개 돌려 말한 순간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돌연 멍해졌다. 왜냐면 좀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김유현이 어느 순간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성벽 계단을 후다닥 뛰어 내려가는 중이었다.
“참, 누가 동생 바보 아니랄까 봐….”
낮게 뇌까린 선율은 곧 살그머니 옆을 흘겼다. 그곳에는 아직 한소영이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안 가봐도 괜찮겠어요? 사랑하는 그이가.”
“라운드 하우스(Round House).”
웅웅웅웅!
“아, 뭐라고 하셨죠?”
손등으로 은은한 보랏빛을 비추는 한소영이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 아니에요.”
선율은 쓰게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전장 지휘는 제가 잘~ 하고 있을 테니 잘~ 다녀오시라고요.”
*
그 시각.
“왔다!”
마찬가지로 성벽서, 그러나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제갈 해솔이 총총 뛰었다.
“흠.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인가.”
하승우도 발 하나를 벽돌에 얹은 채 한껏 무게를 잡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갑니다. 저의 발로 가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놓아주십시오.”
“아이참, 같이 가면 좋잖아?”
“으에에에! 가, 갈게요! 간다니까요? 그래도 가슴의 준비는…!”
“응? 뭔 가슴의 준비? 혹시 찌찌?”
제갈 해솔은 금세 근원과 차희영을 끌 듯이 데려왔고, 이내 근원의 빗자루인 ‘혼돈의 솜니움’에 사뿐 궁둥이를 붙였다.
“그럼 출발!”
흡사 청룡 열차라도 탄 것처럼 양팔을 활짝 벌리는 제갈 해솔. 근원의 낯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딱히 내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조용히 주문을 외우니 세 여인을 태운 빗자루는 용케도 날아올랐다.
한편, 졸지에 홀로 남게 된 하승우는 훨훨 멀어지는 빗자루를 멍하니 바라봤다.
“후.”
이윽고 뜻 모를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혼자서 쓸쓸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하승우마저 내려가자, 성벽에는 또 다른 세 여인이 남게 되었다.
“저희도 슬슬 준비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정하연이 지팡이를 꺼내며 묻자 사라가 빙긋 미소 짓는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우선 소환하고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이 옳다 여긴 정하연은 바로 끄덕였고, 사라는 정신 집중에 들어가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는다. 정하연도 서둘러 마력을 모으려는 찰나, 갑자기 아차 한 얼굴로 눈을 돌렸다.
“비비앙?”
“응?”
몰래 성벽 계단 쪽으로 가던 비비앙이 어색하게 웃는다.
“어디 가요?”
“에, 잠깐 아래 좀. 성벽은 너무 좁아.”
“아래?”
“으응. 실은 이번에 소환하려는 군단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거든.”
쑥스럽게 웃으며 질서의 오르도를 흔들던 비비앙은, 돌연 화난 표정을 짓더니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그러자 정하연의 고운 입술이 아주 살짝 비뚜름해졌다.
“이번에 소환하려는 군단?”
*
한동안 소강상태로 있던 전장은 어느 순간 서서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 변화의 중심은 김수현이었다.
영역 선포를 사용한 이후, 타나토스와 악마들은 발 빠르게 물러나 영역서 벗어났다. 상대가 화정을 가진 건 물론, 얼마나 위험한 힘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같은 불 계열인 흑염(黑炎)을 사용하는 아스타로트로서는 상성이 최악이라 할 수 있다. 까닥 잘못하면 한순간 불길에 휩싸여 소멸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김수현은 겉으로는 침착해 보이나 속으로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왜냐면 악마들의 태도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일 회차 때 홀 플레인을 쥐고 흔들었던 악마를 상대로 인간이 이길 수 있었던 건, 지나치게 독립성이 짙었던 악마의 특성에 기인한다. 오죽하면 포로로 잡은 철혈 여왕을 서로 가지겠다고 싸울 정도니 말 다하지 않았는가.
한데, 다르다. 예전 같았으면 혼자로도 충분하다고 거들먹거렸을 놈들이, 잔뜩 긴장한 채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다. 꼭 서로 협력이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아무리 과거와 현재가 달라졌다고 하지만, 김수현으로서는 생소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후르르르, 후르르르!
갑자기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방으로 심상찮은 흐름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악마들도 모종의 전조를 느꼈는지 곧바로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찰나의 순간, 물기 담뿍 젖은 바람이 스쳤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악마들은 뜻밖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공기 중에 포함돼 있던 물들이 청소기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모이고 있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군집하더니 각각 균등한 형체를 갖춰나간다.
잠시 후, 속속히 모여든 푸른 빛들이 넘실넘실 아름답게 물결치기 시작했다.
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
이어서 흘러오는 아스라한 노랫가락.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수백의 물의 정령으로 이루어진 ‘정화의 군단(The Legion Of Purification)’이 부르는 합창이었다. 그 노래를 들은 김수현의 안색이 한층 밝아졌다.
아무리 김수현이 독보적으로 강하다고 하나, 타나토스와 모든 악마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영역 선포로 준비한 신호를 보냈는데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게다가 정화의 군단 맞은편으로는 시뻘건 불길이 이글거리며 올라올 조짐까지 보이고 있었다.
아직이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오라!”
문득, 낭랑한 외침이 고요한 전장을 짱짱하게 울렸다.
“오라! 베히모스! 제 3군단을 지배하는, 적을 정토(征討)하는 최후의 왕이여!”
그 순간이었다.
– 딱딱딱딱…. 딱딱딱딱….
어디선가 이를 연속으로 부딪치는 소슬한 소음이 흘렀다.
– 하하…. 정말, 이제야 불러주시는 겝니까.
거의 동시에 깊숙한 구렁텅이서 기어 나오는 듯한 어스름한 악성이 들리더니,
두두두두…. 두두두두….
느닷없이 땅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진동이었다. 언뜻 지진 난 것처럼 들리나, 한편으로는 수백 수천의 말발굽이 대지를 짓밟으며 올라오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으음.”
상황을 지켜보던 멜리너스는 침음을 흘렸다. 김수현을 에워싸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느 순간 되려 포위당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두 정령 군단은 그렇다손 쳐도, 멀리서 느껴지는 악기는 자신조차도 거슬릴 정도의 기운이다. 김수현 하나만도 만만치 않건만 이대로라면 여기서 영원한 소멸을 당할지도 모른다.
‘최소한 저 마수 소환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멜리너스가 조용히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였다.
“짜짜짜잔~!”
돌연 상큼한 음성과 함께 갑자기 무시할 수 없는 마력이 송곳처럼 짓쳐 들었다. 기함한 멜리너스가 황급히 물러서는 동시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코앞을 살짝 스치듯 지나쳤다.
“아이 아깝네. 아무튼! 제갈 해솔 여기 등장이오!”
그렇게 외친 제갈 해솔은 부드러이 하강하는 빗자루서 촐랑촐랑 뛰어내렸다. 멜리너스는 찡그리는 와중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순간 무시무시한 열기가 뿜어졌다.
– 분석 종료.
그때 무심한 음성이 들리는 동시, 시린 냉기를 뿜는 마법 진 하나가 정면으로 생성된다. 진은 가볍게 공격을 받아냈고, 열기는 허무하리만치 먹혀 들어가 짙은 수증기를 피웠다.
“…누구냐, 네 년들은?”
본능적으로 경시할 상대가 아님을 직감한 멜리너스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상대는 제갈 해솔, 아니. 오늘따라 몹시, 이상할 정도로 텐션이 높은 제갈 해솔이었다.
위협적으로 말하는 멜리너스를 보더니 척 팔짱 끼며 앵두 같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느그냐, 네 넌드른?”
그리고 입을 요리조리 놀리며 괴상한 목소리로 말을 따라 한다. 그 잔망스럽기 짝이 없는 짓거리에 멜리너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미, 미친년인가?”
“에베베베?”
“이년! 정녕 처발려 봐야 그 요망한 주둥아리를 닥치겠나!”
“바르긴 뭘 발라요? 아, 배고프니 식빵에 잼이나 발라주시던가?”
오늘 말발이 좀 오른 걸까. 제갈 해솔은 천연덕스레 입맛을 다시며 배를 쓱쓱 문지르기까지 했다. 멜리너스는 머릿속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걸 느꼈다.
몹시 경망스럽기는 하지만, 기실 자존심으로 먹고 사는 악마를 도발하는데 이만한 것도 없었다.
한데, 분노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가만히 지켜보던 아스타로트가 분노해 고함치며 몸을 날렸다. 김수현과 상성이 나쁜 만큼 지원군을 끊는 것도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문제는.
파지지직!
“당장 아가리를 찢어, 헉!”
접근하기도 전, 보랏빛 전류를 튀기는 거대한 창이 순간적으로 예리하게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황급히 몸을 비튼 아스타로트는,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한 명의 마법 숙녀(?)와,
“내 동생 건드리지 마라. 이 개새끼들아.”
잇따라 짓쳐 들어오는 뇌신의 번개를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으어어어.
오늘 오후에 너무 피곤해서 잠깐 잤는데, 그 대가가 참혹하네요.
세상에, 일어나니까 21시가 넘어 있어서….
OTL
PS. 어느 독자 분이 질문해 주셨는데, 제 다른 소설인 현대 마법사는 차기 작품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 방향에서 고민하는 중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