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07
00906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상황이 오묘해졌다.
갑자기 기습한 악마들은 김수현을 에워싸는 건 성공했으나, 곧바로 달려온 사용자들에 의해 도리어 둘러싸이고 말았다. 거기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에이스라 봐도 좋은 이들이다.
당장 아스타로트를 맞상대하는 두 명만 봐도 알 수 있다. 김유현은 뇌신을, 한소영은 멸살(滅殺)을 상징하는 롱기누스의 창을 사용하지 않는가. 사용자 정보도 내로라하는 수준인데 신을 해할 수 있는 권능까지 더해졌다. 아무리 대 악마라도 결코 얕볼 상황은 아니었다.
“메타몰포시스(Metamorphosis)!”
우지지직, 우지지직!
위기감을 느낀 아스모데우스의 형태가 빠르게 변화한다. 시커먼 살가죽이 쩍쩍 갈라지며 온몸이 물풍선처럼 불어나기 시작한다. 이 미터에 불과하던 덩치가 삽시간에 사 미터를 넘어서더니, 종래에는 팔뚝 하나가 성인 남성만 한 거대한 괴물로 변태했다.
“후.”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아스모데우스를 보며 하승우는 혀를 내둘렀다. 방금 막 도착해서인지 호흡이 약간은 거칠다. 서둘러 숨을 고르던 하승우는 문득 어깨에 나긋한 손길이 닿자 눈을 깜빡거렸다.
“안녕? 비밀 병기 씨?”
나른한 목소리를 내는 여인이 쳐다보고 있었다. 하승우가 무어라 말할지 몰라 말문이 막힐 무렵, 고연주는 씩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보아하니 곧 시작할 것 같은데 슬슬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예?”
“꽤 기대하고 있다고? 전 부랑자 로드의 진짜 실력을 말이야.”
“……!”
하승우의 눈이 순간적으로 치떠졌다. 그러나 곧 표정을 가라앉히더니 한층 목소리를 낮춘다.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모르는 게 어디 있다고?”
“그럼 어째서.”
“왜 이래. 죽이려면 진작 죽였겠지?”
이 한 마디면 충분했다. 하승우는 쓰게 웃으며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적당히 좀 하시죠. 살기 풀풀 날리면서 말씀하시면 참 잘도 믿겠습니다.”
“어머. 악명 높은 복제술사치고는 너무 약한 소리 아닐까?”
“상대가 당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부랑자 시절 살문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하고, 그림자 여왕이 나타나면 무조건 후퇴하라고 경고한 적도 있으니까요.”
“됐고, 어서 실력이나 보이도록 해. 그이가 살려준 값은 해야 하잖아?”
“예, 예. 아무렴요.” 빈정대듯 말한 하승우는 먹잇감을 찾아 눈을 돌리는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봤다. 흡사 첫 해부 실습에 들어간 의대생처럼 온 정신을 집중해 상대를 똑바로 직시한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두 눈에 번쩍 빛이 돌았다가 사라졌다.
“좋아. 기억 완료.”
그렇게 말한 하승우는 두 팔을 아래로 편하게 늘어트렸다.
잠시 후.
전신이 은은한 초록빛을 띠는 동시에 하승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메타몰포시스!”
우지지직, 우지지직!
“저, 저건 또 뭐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리리스가 한껏 놀라 소리 질렀다. 왜냐면 하승우의 몸이 아까 발생했던 변화와 똑같은 변형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살구색 살이 부풀고 몸뚱이는 삽시간에 거인만 해지더니, 끝내 시커멓게 변색하며 또 하나의 아스모데우스가 탄생했다.
수우우웅!
“무슨, 악!”
그렇게 두 아스모데우스가 맞닥뜨리려는 찰나, 갑작스레 쇄도해온 물빛 광선들이 리리스의 전신을 타격했다.
바로 눈을 치뜨며 돌아보자, 푸른 인어 형상을 한 물의 정령들이 사방에서 삼지창을 겨냥하고 있다. 리리스는 “감히!” 라고 외치며 분노하면서도 가슴 한 켠으로는 초조함을 느꼈다.
혹시 몰라 눈을 이리저리 굴려봐도 어느 곳이나 비슷하다. 특히 벨제부브의 경우는 자신과 완전히 판박이였다. 붉은 새의 모습을 한 불의 정령들에 둘러싸여 격전을 벌이는 중이다. 한 번의 손짓에 무려 열댓 마리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졌지만, 금세 재생성하는 광경을 보니 절로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어쨌든 불행 중 다행으로 정령 왕은 보이지 않으나, 아니 설령 있어도 상대하는데 큰 상관은 없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혼자 있다는 것이다. 불의 정령 군단이 벨제부브를 전담하듯 정화의 군단은 리리스를 마크하기로 한 것 같은데, 리리스로서는 썩 달갑잖은 상황이다. 안 그래도 힘이 제한됐고, 또 완벽히 회복한 것도 아닌데. 지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적잖은 시간 동안 발목 잡힐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크으으으!”
결국, 연달아 들어오는 광선을 보고 욕설과 함께 날아오른 리리스는 양 날개를 우산처럼 쫙 펼쳤다. 그러자 검은 리본 끈 같은 것들이 푹 터져 나와 땅으로 세차게 내리꽂힌다.
그리고.
“쯧.”
침착히 전황을 살피던 루시퍼는 나직이 혀를 찼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찰나의 순간, 대 악마 다섯이 붙잡혔다. 리리스와 벨제부브는 각각 정령 군단에, 아스모데우스는 웬 이상한 복제판에, 아스타로트는 두 마법사에게, 그리고 바알은 좀 전 ‘도와리야!’ 를 외치며 달려온 거한에게 습격당해 한창 전투를 치르고 있다.
게다가 멜리너스와 올리비아조차도 까불던 여인이 이끌고 온 무리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고.
결국,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은 자신과 남은 악마 군주 일곱.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땅에 자욱이 흐르던 연기가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대신,
철그렁, 철그렁!
– 딱딱딱딱, 딱딱딱딱….
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이 부딪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먼빛으로 검푸른 빛으로 된, 반투명한 말을 탄 해골 기사들이 서서히 거리를 줄여오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선두에 있는, 흑색 갑옷을 걸치고 뿔 투구를 쓴 해골은 유난히 신경 쓰일 정도였다. 건장한 체구는 물론,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악마 14 군주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진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쉽게 이길 수 없는 정도라고 해야 하나.
원래의 힘으로 붙으면 압도할 자신이 있는 루시퍼로서는 굉장히 억울하지만, 기실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왜냐면 악마들은 중간 세계로 억지로 뚫고 나온 입장이거니와, 그나마 사용할 수 있는 힘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베히모스는 계약을 통한 정당한 소환이 이루어져 상대적으로 힘의 손실이 적고, 게다가 비비앙의 마력을 듬뿍 먹은 상태였으니.
잠시 후, 끊임없이 이어지던 쇳소리가 뚝 멎었다.
‘…어쩔 수 없나.’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루시퍼는 남은 악마 군주 중 일곱을 전부 불렀다. 지원군 중 가장 위험한 마수 군단을 우선하여 처리해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나 환영해주시다니…. 우리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어느새 도착했는지 근거리서 소슬한 음성이 흐른다. 루시퍼는 아무 말도 않고 전투를 준비했다.
그때,
두두두두, 두두두두!
느닷없이 지축은 흔드는 소음이 전장의 중심을 강타했다. 소리는 몹시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타락 천사가 있는 곳으로.
루시퍼의 낯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분명 마수 군단은 진군을 멈췄는데, 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걸까?
해답은 오벨로 기사단이었다. 타나토스로 인해 큰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아직 살아남은 기사들도 있었다. 김수현이 위기에 처하자 기사 단장을 필두로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 광경을 확인한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젠장, 악마 군주들은 저놈들을 맡아라!”
결국에는 악마 군주들을 시켜 오벨로 기사단을 처리하러 보내자, 또 한 번 딱딱한 소음이 흘렀다.
“이야, 우리를 너무 얕보시는 거 아닙니까?”
이제는 혼자 남은 루시퍼를 조롱하는 말투였다.
“조용히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여기까지 기어올라왔는지 모르겠군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항상 정중한 루시퍼도 험한 말을 쏟아내고 말았다. 하기야 정신이 없을 만도 하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으니까.
오죽하면 김수현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며 외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적당히 좀 하면 안 되느냐고.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렇게까지 준비했냐고.
그 순간 킬킬 웃던 베히모스는 투구 속 퀭한 눈구멍을 붉은 안광으로 희번덕거렸다. 이어서 허리춤에 걸린 칼을 뽑자, 섬뜩하게 빛나는 검신이 햇볕을 반사한다.
“뭐, 잘됐지요. 마침 당신네한테는 빚도 있고 하니.”
예전 악마가 지옥을 침공한 사건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윽고 조용히 침묵하던 해골 기사들이, 아니 로열 나이트라고 해야 하나. 아득한 옛날, 빅토리아 왕국의 통일 전쟁을 이끌었던 기사들이 각자 검을 꺼내 왕의 명령을 기다린다.
겉보기에는 갑옷 입은 해골 기사처럼 보이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죽어서도 마수로 변해 충정을 바치는 기사들은 하나하나가 죽음의 기사 이상 가는 무력을 갖추고 있다.
괜히 지옥 정규 토벌대로 활약하는 게 아닌 만큼, 왕의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거센 폭풍으로 변해 적을 토벌할 터.
루시퍼는 신속히 뒤를 살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수현과 타나토스는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버티자…. 어떻게든 최대한 버텨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으나, 루시퍼는 계속 엄습하는 불길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지만.
설령 계획이 성공한다손 쳐도, 최악에는 데려온 전력의 절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
“헤에.”
주변을 돌아보던 타나토스가 얼빠진 탄성을 터뜨렸다.
“정령은 그렇다 치고. 오벨로 기사단은 아까 봤고. 어, 빅토리아 로열 기사단이잖아? 세상에, 어떻게 저 두 기사단이 협동을…. 우와? 세계의 근원도 있어? 와, 진짜 장난 아니네?”
그렇게 한동안 중얼중얼하다가, 불현듯 나를 흘끗 흘겼다.
“얘, 얘. 있잖아, 이건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너 혹시 쟤네한테 깊은 원한이라도 있는 거니? 미래를 아는 것도 아닐 텐데, 아주 작정하고 준비했네?”
순간 가슴이 뜨끔하기는 했으나 애써 무시했다. 왜냐면 화정이 타나토스가 하는 말은 모조리 무시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 이상하네, 이상해….
그러더니 지금은 연신 이상하다는 말만 되뇌고 있다. 무언가 굉장히 석연치 않다는 듯이.
죽음을 관장하는 타나토스는 게헨나와 화정과 동급의 신이라고 한다. 아무리 중간 세계라도 원래대로라면 나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을 터. 하여 여차하면 염화를 발동할 생각마저 있던 나로서는 상당히 신경 쓰이는 말이었다.
‘뭐가 그렇게 이상해?’
– 응? 아니 아니.
‘흠? 아무튼, 어떻게 해? 염화를 발동해야 하나?’
– 미쳤어? 쟤 죽이고 너도 죽게?
‘아니, 하지만.’
– 기다려봐. 끙….
단호히 말을 끊은 화정은 한참을 뜸을 들였다. 그러나 타나토스가 슬슬 주변 상황서 관심을 거두는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그때였다.
– 후유, 글쎄다. 사실 아직 딱 짚이는 건 없는데, 어쨌든 염화까지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응?’
– 그러니까, 네가 더 강하다는 소리야.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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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화정이 그렇게나 호언장담을 했는데, 아무리 악마가 손을 썼다지만 타나토스의 봉인이 이렇게 쉽게 풀립니까?’ 라고 질문해주셨던 독자분께서 계셨지요. 개인적으로 좋은 질문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에피소드 2에서 답변을 드리겠다고 했는데, 정정해서 이번 파트 안으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아마 3회 ~ 5회 안으로 끝날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