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42
00941 If You Change, One. =========================================================================
엘도라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아니. 깨어나자마자 찾아와 하는 말이 칼을 어쨌냐니. 당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곰곰이 따져보니 가슴이 뜨끔해졌다. 엄밀히 말하면 엑스칼리버로 엄한 짓을 안 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말로 압박하고, 손놀림으로 희롱하고, 혀로 날름날름 핥고, 때로는 이쑤시개로 활용하는 정도…?
(왜 말을 안 하는 거지?)
“어, 어? 모, 모르겠는데.”
결국에는 발뺌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곧이곧대로 말하기는 좀 그렇잖은가. 또 한소영도 옆에 있는데.
엘도라는 여전히 노려보는 눈매로 나를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모르겠다고?)
“그래. 애초 엑스칼리버는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고. 그런데 내가 뭘 알겠어?”
일단 적당히 넘겨야겠다는 생각에 되는 대로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 순간, 뜻밖에도 엘도라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너….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조심스레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도라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한동안 나와 엑스칼리버를 번갈아 보다가, 입꼬리를 비웃듯이 올리며 천천히 칼을 거뒀다.
(하기야…. 엑스칼리버가 네놈 따위를 주인으로 인정할 리가 없지. 이해했다.)
심지어 목소리에는 묘한 기쁨마저 서려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나를 쏘아보며 말을 잇는다.
(그렇다면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건가…. 좋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다.)
엘도라는 지금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지만, 간신히 참는다는 듯이 말한 후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나는 멍하니 응시했다.
무어라 해야 할까. 돌연히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방금 엘도라의 모습에서 옛날 열등감에 찌들었던 공찬호가 겹쳤다면 착각이려나.
“하~아.”
그때 앞에서 푹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한 명만 들어온 게 아니었지.
이윽고 정면을 돌아보는 순간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해해. 괜찮은 척해도, 지금 쟤 꽤 혼란스러울 거야.”
쭈그려 앉은 채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이는 다름 아닌 타나토스였다.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싱긋 웃으며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생각보다 일찍 깨어났네? 뭐 다 내 덕분이기는 하지만.”
“뭐?”
“후후. 감사의 인사는 언제쯤 들을 수 있으려나?”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네게 감사해야 할 기억은 없는데.”
스스로 들어도 차가운 음성이었다.
하지만 타나토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까르르 간드러지게 웃더니 검지로 내 가슴의 중앙을 콕 찔렀다. 그리고 천천히 빙그르르 돌리며 말을 잇는다.
“야. 이러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니?”
“……?”
“봐봐. 부서져 가는 육체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사그라져가는 영혼을 되살리고. 무로 돌아가려는 네 존재의 뿌리를 붙잡고. 이게 가능한 게 누구일 거라고 생각해?”
“뭐…. 윽!”
그때 갑작스레 명치가 쿡 쑤셔지는 바람에 약한 신음을 터뜨렸다. 나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찰나, 순간적으로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검지가 찌르고 들어간 부분을 중심으로 가슴 전체에 시커먼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고 있다. 이내 손가락이 살그머니 떨어지자 칠흑빛을 번들거리는 작은 반달 문양이 눈에 밟혔다.
“응? 누굴까~?”
속살거리는 음성이 흐르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계속 듣고 있으려니 나를 소생시킨 장본인이 자기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예전에 염화를 발동했을 때도 두 번 모두 게헨나에게 목숨을 구원받기는 했다. 그 게헨나와 동급으로 취급되는 타나토스라면 확실히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하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어떻게…? 너는 힘의 절반을 잃었을 텐데?”
“어머? 그 말은 나 무시하는 거니? 자존심 상하게. 이래 봬도 죽음을 관장하는 신인데.”
뾰로통하게 말한 타나토스는 한두 걸음 물러나며 양손을 허리에 짚었다. 이어서 두 눈을 살며시 치뜬다.
갑자기 정색하니 느닷없이 오싹한 한기가 스쳤다. 그러고 보니 예전과 무언가 달라진 것 같기도….
“뭐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 아니. 맞아. 그때 조각났던 상태로는 네 소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어.”
홀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타나토스의 입가에 오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럼 여기서 문제. 나는 어떻게 너를 살릴 수 있었을까?”
“…몰라.”
“아.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었나? 그럼 다시. 방금 말했지만, 그 당시 나로서는 너를 회생시킬만한 힘이 없었어. 그러니 너를 살리려면 조각나기 이전, 즉 최소한 온전했을 때 정도로 힘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지. 여기까지 이해가 가?”
“그래서.”
“좋아 좋아. 건방지지만 이해했다는 걸로 알아들을게. 그렇다면~. 내가 힘을 되찾는 데는 어떤 방법이 있었을까?”
“그거야 네 내부에 있는 봉인 진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화정에게 들은 대로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문득 동 대륙 전투 때의 상황이 뇌리를 스치는 찰나,
“동급의 힘으로…. 파괴….”
호흡이 뚝 멎었다.
동시에 온몸이 얼어붙는 감각마저 느껴졌다.
있다.
타나토스의 힘을 회복하는 방법이.
설마….
“헤~. 보아하니 아직 못 들었나 보네?”
놀리듯이 말한 타나토스는 쭉 기지개를 켜며 다시 생글생글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내가 말해주지.”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
타나토스는 김수현의 심장에 손을 댄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현재 김수현의 안에서는 총 두 개의 기운이 동시에 사그라지는 중이었다.
썰물처럼 흘러나가는 하나는 김수현의 생명 그 자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염화로 증폭된 화정 본연의 기운.
흩어지는 속도는 비슷하지만, 기운의 강도나 늘어난 양의 워낙 심후해 아직 체내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통제가 아니라…. 심장에 품었잖아? 그럼 힘을 빌리는 형태인가?”
다음 순간, 타나토스는 두 손을 뻗어 쓰러져 있는 김수현을 일으켰다.
“야. 듣고 있지? 화정?”
그 순간이었다.
타나토스가 말을 걸자마자 감겨 있던 김수현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그와 동시에 맑은 진홍색으로 채색된 안광이 상대를 가만히 응시한다.
단지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김수현이 평소 짓는 야수 같은 눈이 아니라, 알 듯 말 듯하게 날카로우면서도 고아한 눈빛이었다. 흡사 여인이 조용히 조소하는 것처럼.
죽은 줄로만 알았던 김수현이 눈을 떴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주춤주춤 물러나는 가운데, 오직 타나토스만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역시 예상이 맞았어. 너는 자의로 힘을 빌려주고 있었던 거야. 이야~. 그 콧대 높은 영원히 타오르는 화정께서 웬일이래?”
“…….”
“아니. 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고. 천사들 때문인가? 아니면 설마 얘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야?”
“…….”
“아니지? 그냥 나처럼 재밌어서 그러는 거지? 응?”
“…….”
타나토스가 연신 말을 걸었으나 김수현은 묵묵부답이었다. 오직 차갑게 노려보기만 할 뿐. 그러자 타나토스의 미소도 약간 시들해졌다.
“뭐…. 하기야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네가 유희를 하든 뭘 하든.”
빈정거리듯 말한 순간 불현듯 타나토스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순식간에 반투명해졌으나 저번처럼 붉은 진은 나오지 않는다.
타나토스 봉인의 중추를 담당하는 진.
천신사법(天神四法)의 구역. 해계 금진(解界 禁陣).
저번에 형상화에 성공했던 건 어디까지나 내부에 사탄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지, 기실 타나토스는 이 진의 털끝조차 건드릴 수 없다. 원래대로라면 김수현이 일격을 내리칠 때를 노려, 찰나의 순간 진을 드러내 파괴하게 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안솔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눈앞의 실체는 이 진을 파괴할 수 있는 지식도 힘도 충분한 지고지순한 존재니까.
타나토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든지, 혹은 네 기운이 먼저 흩어지든지…. 시간 없으니까 빨리 결정하자고.”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하며 조용히 속닥거렸다.
“살릴 거야, 말 거야?”
*
“…그래서 화정이 내 봉인 진을 파괴하는 데 성공. 충분한 힘을 되찾은 나는 네게 생명력을 부여. 이렇게 거래가 성립됐다는 말씀이지.”
타나토스는 으쓱거리듯 말하며 설명을 마쳤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대꾸할 생각조차 못 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흡사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타나토스의 말인즉 화정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였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염화 발동 직후였으니 화력도 충분했다고.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다. 여태껏 화정이 전투 중 알아서 나를 보조하거나, 발끈할 때마다 스스로 불꽃을 터뜨리는 걸 몇 번이고 보고 겪지 않았는가.
즉 화정은 마음만 먹으면 내게 힘을 빌려주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이것은 내가 화정을 완벽히 통제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심장에 거주 공간을 마련하고 힘을 빌리는 형태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이렇게 일이 터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불현듯 속에서 열불이 급격하게 치밀어 올랐다.
미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있는 대로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리 나를 살릴 방법이 없었다지만 타나토스의 봉인을 해제하면 어쩌자는 말인가.
물론 화정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서운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 회차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화정을 얻은 걸 후회했다. 아니. 화정의 선택을 후회했다.
“흐흐. 그 표정 좋네. 신선하잖아. 그렇게 분해?”
“너….”
“에이~. 너무 노려보지 마. 어쨌든 네 생명의 은인이잖아?”
“큭….”
이를 갈며 힘을 줘 노려보자 타나토스는 깔깔 웃으며 물러났다.
“그럼 이야기도 충분히 했으니 이만 가볼게. 워낙 너랑 만나고 싶은 애들이 많으니 이쯤에서 물러나야지.”
“자, 잠깐.”
“여하튼 일만 잘 풀리면 너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때까지 죽은 듯이 지내라고.”
“기다려!”
마지막 말이 신경 쓰이기는 했으나 나는 황급히 타나토스를 붙잡았다. 사실 내가 어떻게 살아났는지보다는, 어떤 목적으로 나를 살렸는지가 더 궁금했다.
“너는 왜 나를 살린 거지? 어째서?”
“응?”
다행스럽게도 타나토스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천연덕스레 어깨를 들먹였다.
“글쎄…. 부탁받았으니까? 걔가 너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해서 살렸을 뿐이야.”
“걔? 부탁?”
“굳이 말하라면 나는 너를 별로 살리고 싶지 않은 쪽이었어. 왜냐면 무서우니까.”
“…뭐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물론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강해진 건 맞지만…. 이렇게 봉인이 해제됐다고 해서 무적이 된 건 아니거든?”
“그건 또 무슨 말이지?”
계속 질문이 이어지자, 조금 갑갑했던 걸까. 타나토스는 쯧쯧 혀 차는 소리를 내더니 한쪽 팔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아니. 생각 좀 해봐. 원래 이 세상에 강림하는 즉시 힘의 대부분이 제한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법칙이니 차치하고. 먼저 저번 전투 때 나눴던 여섯 조각 중 세 개가 너희한테 소멸당했으니 빼도 박도 못하게 절반 깎였고.”
“남은 세 개 중 하나는 엘도라한테 박았으니 여기서 하나 빠지고. 거기다 너한테도 하나 박았으니까 또 하나 빠지고. 결국, 현재 나한테 남은 조각은 하나.”
“결과적으로 홀 플레인에 작용하는 법칙 속에서 내가 낼 수 있는 힘은 원래 그릇의 육분의 일.”
“하지만 이조차도 아직은 그릇에 불과해. 즉 제물이든 양분이든, 물을 채우지 않으면 그릇이 넓어져 봤자 소용없다는 거지.”
긴말을 마친 타나토스는 돌연 킥 웃음을 터뜨렸다.
“자. 이제 왜 이걸 너한테 얘기해주는지 답변해주면 되니?”
“…….”
“간단해. 화정도 나랑 똑같이 생각했을 테니까. 설령 내가 옛날처럼 깽판을 친다고 해도, 네가 또 한 번 그 능력을 발동하면 나 정도는 가볍게 잡을 수 있다. 아마 이렇게 계산하고 봉인을 풀어준 거겠지. 하여간 앙큼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셔~.”
“…….”
끝에 가서 은근한 어조로 비아냥거린 타나토스는,
“아무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
이내 입구 쪽으로 몸을 돌리며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었다.
“그 이상은 네 스스로 생각해보렴. 뭐, 어차피 곧 알게 되겠지만.”
그리고 뜻 모를 말을 남긴 채 입구 너머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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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구상했던 대로 소신껏 적도록 하겠습니다.
단 독자분들의 의견을 고려해, 해당 내용의 무게를 조절하는데는 반영할 수 있을 듯합니다. 🙂